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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남북 관계 ‘현장 목격자’ 김영규 전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한미동맹 이완되면 월남 사태 배제 못해”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한반도 ‘가자지구’ 될 수도… 전쟁 가능성과 일상 속 균형 잡아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반미 정서 낳았지만 다행스런 선택”
■“유사시 한반도 미군 증파(增派)는 한미동맹의 강고함이 좌우할 것”


▎김영규 전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은 11월 9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정전협정처럼 한번 만들어진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기에 세월이 무서운 것”이라고 한반도 안보 정세를 진단했다.
대한민국 국적(國籍)의 김영규(76) 씨는 44년 동안 주한미군 군무원 신분이었다. 1979년 3월 미 2사단 공보실 직원에서 출발해 올 10월 31일 퇴임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부·한미연합사령부·유엔군사령부의 공보관으로 복무했다. 그가 군사정전위가 관리하는 판문점을 취재 지원 차 방문한 횟수만 1000여 회. 그에게 주어진 미션의 상당 부분이 일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비무장지대, 민통선에 걸쳐져 있다. ‘한·미동맹의 산증인’, ‘주한미군사령관의 눈과 귀’, ‘주한미군의 대(對)언론 창구’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붙은 배경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70년째 전쟁이 중단된 정전(停戰)지대로 남아 있다. 남북(南北) 간 간헐적 충돌은 있었지만, 일방의 폭주가 허용되는 일은 없었다. 비교적 오래, 평온한 대치상태를 이어오는 까닭에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김영규 전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은 분단과 동맹이 가리고 있는 리얼한 현실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주로 안에서 밖을 향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면, 그는 외부의 시선으로 대한민국을 들여다보는데 익숙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그의 삶은 여느 한국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주한미군의 구성원으로 늘 실전(實戰)의 관점에서 예측하고, 분석하고, 대비하는 게 그의 전공(專攻)이었다. 월간중앙은 11월 9일 김영규 전 공보관을 만나 ‘주한미군’, ‘판문점’, ‘북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한 그의 얘기를 들었다.

국적은 한국인데 일은 주로 주한미군, 유엔군, 한미연합사에서 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미군의 정체성이 혼재된다는 느낌이 들진 않던가요?

“제가 하는 일의 성격도 그렇지요. 한국과 미군의 가교 역할이니까요. 저는 주한미군 지휘부에 올릴 뉴스를 선택하는 일로 제 하루 일상을 시작했어요. 아침에는 모닝 뉴스, 저녁에는 미디어 리포트를 제작하는 일이죠.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뉴스를 모아 전달하는 것인데, 저는 이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미 관계를 돌이켜보세요. 우리(대한민국)가 미국, 미군이라는 존재를 대할 때면 주인의식, 주권의식에 사로잡히곤 했어요. 그래서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요. 감정이 개입하면 사건과 사물을 보는 시야가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한국 국민이 느끼는 감정의 근원과 진의를 있는 그대로 주한미군 지휘부에 전달하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주한미군이 한국인의 입장과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이해하고, 판단토록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이죠.”

“K팝 파워 실감… 한반도 근무 희망 미군 늘어”


▎1990년대 자신의 집무실에서 촬영에 응한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 사진:제공 김영규
올해가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해였지요. 관계라는 게 세월이 흐르면 이해도가 깊어지는 법인데 한·미 관계는 어땠나요?

“많이 발전하고 변했지요. 사건을 대하는 방식부터가 달라짐을 확연히 느껴요. 예전에는 미군이 한국군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관계였다면, 지금은 협의하는 관계라고 할까요. 그 사이 한국의 국가 위상도 상당히 높아졌잖아요. 과거 미국에 기대는 국가에서 미국과 동등하게 가는 국가라는 인식이 주한미군 사이에서 퍼졌지요. K팝, K드라마 등이 주는 매력으로 인해 한국에서 근무하겠다는 미군이 증가하는 것도 새로운 현상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아주 불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왠지 화석화된 느낌도 줍니다. 너무 오랜 세월 비(非)전쟁 상태가 지속해서 그런 걸까요?

“이스라엘하고 하마스가 전쟁하는 ‘가자지구’를 보세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늘 부닥치던 곳이죠. 결국 정면충돌하지요. 남북한도 그렇습니다. 양쪽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잖아요. 언제, 어떤 갈등이 전쟁으로 번질지 아무도 몰라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만 해도 그래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미루나무 가기 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지요. 이 사건 직후 미군은 미루나무를 아예 절단하게 되는데, 이때 북한군이 추가 도발했다면 전쟁으로 비화했을 겁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미군은 ‘폴 버니언(Paul Bunyan)’ 작전이라고 항공모함과 B52 폭격기 등을 동원해 북한의 대응이 있을 시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계획이었어요. 제가 그때 취재에 나섰는데, 동두천 캠프 케이시 정문 앞에 모든 군용 차량이 북쪽을 향해 도열해 있던 장면이 삼엄했어요. 북한이 자세를 굽히면서 그냥 넘어간 것이지요. 서해 북방한계선(NLL)도 늘 위태위태합니다. 더구나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무장했잖아요. 1980년 말 판문점 회담장을 취재 나온 북한 고참 기자의 얘기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느낌입니다. ‘김 선생, 남쪽은 경제가 우리보다 낫지, 막강한 미군이 있지, 우리는 뭐로 우리를 보호해야 하나요, 핵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라고 토로하더군요. 상황은 첨예해요.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남북한 간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점점 더 잊혀져 갑니다. 저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는 군대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걸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겁니다.”

한국인들이 마주한 현실이 너무 고단해서 가혹한 전쟁을 상상할 여력이 없는 건 아닐까요?

“답답한 거죠. 그렇다고 우리가 늘 (전쟁) 불안 속에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국민에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니 대비해야 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게 옳아요. 그런데 사회가 여기에 너무 깊이 빠져들면 또 일상이 불안해지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하는 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요. 삶 자체가 모순이듯, 상반된 것을 상반된 것으로 공존케 하는 게 혼돈과 불확실의 시대를 사는 이들의 내면이 아닐까 합니다. 분명한 점은 남한 정권이 북한에 어떻게 나오든 북한 정권의 본성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판문점 공동선언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이런 것들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순간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게 북한의 행적이었으니까요. 북한 정권은 자기 내부 사정에 따라 맘대로 남북 관계를 훼손, 단절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관계 개선이 어려운 겁니다.”

“남북 관계 파탄은 주로 북한 내부 사정에서 비롯”


▎1990년대 판문점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기자회견장에서 브리핑하는 김영규 유엔군사령부 공보관(가운데 뒷짐 진 남성). / 사진:제공 김영규
한미연합사령부를 있게 한 주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끌어낸 이승만 전 대통령이지요. 44년을 한미연합사 공보실에서 일한 김 전 공보관께 이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 개인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한 이해가 아주 해박했고, 정확했던 분이라고 봅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 예우를 받아야 했는데 장기집권을 꾀하다 하야에 이르렀지요. 4·19혁명 당시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어요. 그 시절 저는 이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주한미군에서 일할 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 서적과 우호 서적을 두루 읽고, 현실도 접해보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공보관 업무와도 관련이 있군요?

“1980년대 한국에선 반미(反美) 감정이 드세게 일었죠. 해방 직후 미군정(軍政)과 6·25 한국전쟁을 주류 학계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룬 이영희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서적은 당대 젊은이들의 필독서였어요. 주한미군 공보관은 한국 사회 일각의 흐름과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런 책들을 읽었어요. 그때 출판된 사회과학서적을 광범위하게 섭렵했어요. 지금도 제 서가에는 그런 책들로 가득해요. 누가 보면 저더러 운동권이냐고 할 정도로요(웃음). 반미 감정의 뿌리는 1945년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더군요.”

그러고 보니 사학(史學)을 전공하셨죠?

“제가 역사에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건 아니에요.(김 전 공보관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다만 주한미군 공보관으로서 한국 내 반미 감정, 반미 여론의 본질과 실상을 잘 알아야 대처하지 않겠어요? 제가 본 바로는 1945~1948년 미군정, 1950년 한국전쟁 이 두 가지를 보는 관점에 따라 반미와 친미(親美)로 나뉘어져요.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세계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전쟁인데도 브루스 커밍스 교수 같은 학자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지요. 제가 막 주한미군 공보관 일을 할 즈음 미군정,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의 그림자라 할까 허물을 부풀리는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해방 전후 한반도에는 사회주의가 득세했잖아요. 그런 영향 탓인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상당수 국민이 반대한 것 같아요. 이후 이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80년대 발행된 사회과학서적들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죠. 국민이 바라지 않는 단독정부 수립을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이 밀어붙였다는 투로 말이죠. 그때 아주 힘들었어요. 미국 사람들에게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요. 한국 분들에게는 이런저런 책과 분위기로 인해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설명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껏 한다는 얘기가 ‘반미는 소수다. 한국에서 대다수가 반미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치부하는 정도였죠. 그 시절은 세계적으로도 반미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기도 합니다.”

다수가 반대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했다고 전제하고 이 시점에서 그걸 평가한다면?

“다행이죠. 우리 국민의 의사와 다르게 비민주적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게 다행스러운 선택이었지요. 이건 현장에서 일하며 느낀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모든 체제를 갖춘 조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미군정이 잘못한 것이겠죠.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어지러운 시대 아니었던가요. 미군정이 질서를 잡고자 강압을 동원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던 사정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뜻과 반대되는 선택도 나온 것이라고 해석해봅니다.”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은 비민주적이었으나 불가피”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은 판문점에서 북측 기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1980년대 후반 북한 기자와 함께한 김 공보관(가운데). / 사진:제공 김영규
판문점을 1000회 이상 방문했습니다. 그런 곳도 자주 가면 정이 드나요?

“저는 갈 때마다 긴장해요. 1991년 유엔군 사령관이 유엔사 수석대표로 황원탁 소장을 임명하자,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담 참석을 거부했어요. 그리곤 1994년 군사정전위 북한군 및 중국군 대표를 철수시키는 등 군사정전위의 무력화를 꾀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판문점은 언제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었으니까요.”

판문점은 누가 지키고 있나요?

“유엔사령부 경비부대가 근무를 서지요. 한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과거에는 미군 90%, 한국군 10% 비율이었다면 지금은 그게 역전돼 한국군이 90%를 차지해요.”

판문점 영상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북쪽을 경계하는 우리 병사들은 왜 전신의 절반만 노출하고 나머지 절반은 회담장 건물 뒤에 가리는 자세를 취하는지요. 시선도 불편할 거 같은데요.

“전방과 측방을 다 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왼쪽 눈으로는 전방의 북한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오른쪽 눈으로는 우측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체크하는 식이지요. 혹여 오른편에서 북한군이 나타나면 신속하게 대처하면서 뒤로 빠져야 하니까요. 과거 북한군이 불시에 쳐들어온 사례가 있어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저는 들었어요. 1984년 옛 소련 관광 안내원이 견학단을 이끌고 판문점 북측을 둘러보다가 남쪽에 귀순한 사건이 있었어요. 이때 북한 경비병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총격을 가하는 통해 한국군 장명기 상병이 전사했어요. 미군도 다치고 북한군도 3명이 목숨을 읽었죠.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국내외 취재진도 판문점에 갈 때면 우리 경비병들의 엄격한 지시와 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판문점 하면 저는 늘 ‘긴장감’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10월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 여론조사에 따르면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보내 방어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찬성한 응답은 50%로 나타났습니다. 이 찬성 비율은 2021년 63%, 지난해 55%에 이어 지속적 하락세를 보이는데요. 이 수치가 발산하는 시그널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저도 눈여겨봅니다. 미국이라는 게 여론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론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군에 오래 몸담은 분들이 염려하는 게 전시작전권 전환입니다. 매뉴얼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67만 명의 미군이 파병됩니다. 전작권이 전환되면 한미연합사령관이 미군에서 한국군 장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미국 내 파병 여론이 잦아드는 마당에 이렇게 되면 미군 증원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전작권을 그대로 미국에 두자는 주장도 있지요. 저는 생각이 달라요. 한미연합사령관이 한국군 장성으로 바뀐다고 미군이 안 오는 건 아니니까요. 유사시 미군이 참전하느냐, 어느 정도 참전하느냐의 문제는 전작권이 아닌 동맹의 강고함 여부에 달린 겁니다. 한·미동맹이 굳건하면 미군은 승리하기 위한 병력을 보낼 거고, 그렇지 않다면 월남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한·미동맹이 충분히 공고하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요.”

40년 가까이 지속하는 ‘가까운 미래(near future)’

과거에 견줘 지금 한·미동맹은 충분히 공고한가요?

“지금은 많이, 아주 많이 발전돼 있지요. 동반자적 관계로 서로를 존중하는 등 동맹이 굉장히 끈끈하다고 봐야 합니다. 과거엔 정권에 따라 부침이 좀 있었지만 지금 기준에서 본다면 한·미 관계는 굉장히 강력하다고 봐야 합니다. 한·미 대통령이 도출한 여러 합의를 봐도 그래요. 특히 한·미 연합훈련에 미국의 전략자산이 전개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한·미는 연합훈련을 통해 강력한 결속을 도모하는 중입니다. 또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의 2세, 3세들도 한국에서 복무하는 등 대를 잇는 인연들도 한·미동맹의 든든한 자산이지요.”

남북한이 통일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셨나요?

“외신 기자들이 방한(訪韓)하면 꼭 ‘남북이 언제 통일될 것 같냐’고 물어요. 1980년대 이래 제 답은 한결같지요. ‘Not in the near future’ 즉, ‘가까운 장래에는 힘들 것’으로 봤어요. 북한 기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데 남과 북의 생각, 시각이 너무 달라요. 75년 분단의 세월이 사람들을 다르게 만들었어요. 이미 충분히 이질화된 상태인데 그걸 자꾸 동질화하려 들면 생기는 마찰도 적지 않을 거예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간극을 좁히자면 교류해야 하는데 북한은 그걸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100년이 더 흐른다? 이질화는 더 심화하겠죠. 세월은 무서운 겁니다.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을 때만 해도 이렇게 70년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외신기자들 질문에 제가 ‘Not in the near future’라고 한 지도 벌써 40년이 돼가네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북한은 호응하지 않아요. 구조적인 요인들이 가로막고 있어요.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남북 관계를 리셋(reset)하는 게 북한 정권입니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park.jongkeun@joongang.co.kr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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