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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15) 

기술과 부의 지도 다시 쓴 도자기 무역(2)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위상을 높이고 자본을 축적하는 바탕이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 공예부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가면서 “조선의 기술자를 모조리 잡아와라”라고 명령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 ‘일본 도자기의 신’이라 불렸던 이삼평(李參平) 등 남원, 김해, 웅천 등지에서 조선 도공 400여 명이 납치됐고 수십 년간 쓸 백자토까지 약탈을 당했다. 도자기를 파손한 왜군은 즉결처분될 정도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도자토, 기술, 기술자가 모두 조선의 것이고 불만 일본 것이라는 의미에서 ‘불뿐만’이라는 뜻의 ‘히바카리’라는 이름이 도자기에 붙여졌다. 이삼평은 규슈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에서 청화자기 생산에 성공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다이묘들이 조선 도공을 납치하는 데 열을 올렸고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 히젠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다. 덕분에 사츠마와 히젠은 일본의 주요 도자기 생산 지역이 됐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인 자기 생산 기술을 확보했다. 이후 17세기 일본의 도자기 기술과 생산량은 조선에서 끌고 온 도공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해상실크로드 시대 도자기.
기술을 천시하던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으며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이름도 새기지 못했던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서 사무라이 중에서도 높은 지위의 대접을 받으며 신분을 보장받았다. 이들은 큐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해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만들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다이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꾸준히 기술을 개량해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도자기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고 기술력에서도 조선을 능가할 정도였다. 북큐슈 히젠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산 도자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650년부터 1757년까지 약 100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수출된 아리타산 도자기는 무려 120만 점이 넘는다. 사츠마와 히젠 사가번의 주된 재정 수입이 도자기 판매 이익이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렀다.

코레아호가 자카르타에서 조선으로 출항을 준비하던 때로부터 11년 전인 165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의 후예들이 일본에서 유일하게 청화백자를 생산하던 아리타 도요에 도자기 5만6700개를 주문했다. 아리타 도요는 이 주문을 맞추는 데 무려 2년이 걸렸지만, 아리타 도자기는 유럽에서 대박을 쳤다. 첫 수출 후 70년 동안 약 700만 개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1653년부터 19세기까지 일본에서 유럽으로 수출된 도자기는 무려 2000만 점에 이른다.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도자기가 있다. 이처럼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서 붐을 일으킨 이면에는 조선 자기의 우수성이 『하멜 표류기』에 의해 유럽에 알려진 덕분도 있다.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도공의 기술로 시작된 일본의 도자기 수출은 세계에 일본의 위상을 높이고 근대화를 위한 자본 축적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근대화 시기, 일본은 백자를 수출하면서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문물은 일본에 ‘남만학(南蠻學)’, 즉 남쪽 오랑캐의 학문이었지만, 네덜란드의 ‘난학’은 1623년부터 1850년대 중반까지 200여 년 넘게 일본인들이 서양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됐다. 일본도 조선과 같이 바다를 막는 해금정책을 썼지만 네덜란드에만 부분적으로 무역을 허용했고, 네덜란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의 지식과 정보를 책자로 제공해야 했다. 일본은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어떻게 식민지로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아편전쟁 관련 정보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미국의 페리함대가 일본을 개항하러 올 것이라는 정보도 네덜란드를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개혁세력의 돈줄이었던 도자기


▎19세기 조선의 청화백자. 6.25전쟁 때 깨졌다.
일본 도자기는 19세기 말에도 유럽에서 잘 팔려나갔다. 1876년 만국박람회에 일본은 큐슈의 아리타 도자기를 출품했다. 이 도자기를 팔아서 부국강병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국과 인도 같은 강대국들조차도 서구 열강의 총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만 일본은 하급 사무라이와 상인들이 주축이었던 개혁세력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올랐다. 이 메이지유신 개혁세력의 돈줄은 도자기 수출이었다. 특히 사가현은 도자기 밀수출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화력이 강한 암스트롱포와 최신식 함선을 삿초 동맹군에 지원했다. 또 1300도가 넘는 도자기 가마 전통 기술을 활용해 고품질 철강을 만드는 반사로를 완공하고 철제 대포도 만들어냈다. 아리타 역사는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도자기가 가져온 것임을 우리 아리타 마을 주민은 명심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この大砲も軍艦も吾が有田の磁器がもたらしたものである事は有田町民として銘記すべきことと思うのである。)”.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의 도공들


▎아리타 오카와치야마 도공무연고탑. 조선 도공 800여 명을 기린 비석이 탑처럼 쌓여 있다.
반면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도공 400여 명이 납치되면서 생산 기반이 붕괴되어, 광해군 때는 제사상에 올릴 변변한 도자기가 없을 정도였다. 명청 교체기에 중국의 도자기 생산과 수출이 막히자 유럽 장사꾼들은 조선을 기웃거렸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50년간 전후 복구로 도자기 생산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또 청화백자의 안료인 코발트를 살 만한 돈이 별로 없었고 중국 등과의 교역로가 불안정해지면서 코발트 수입이 거의 끊겼다. 백자에 푸른색 그림을 그려 넣지 못하자 철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백자, 동으로 그리는 진사백자 등 비주류 백자가 조선후기에 많이 등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코발트를 구하지 못해 특이해진 조선의 백자들이 희소성 때문에 크리스티 등 서양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로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 조선은 도자기 생산량을 엄격하게 조절했다. 조선 도공들은 국가 소속이었고, 수출은 금지됐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사 같은 관요에서 오직 국가와 귀족들을 위해서 이천 등의 도자기 공장을 돌린 셈이다. 꼭 필요한 양만 생산하도록 강력하게 통제한 것이다. 생산 여력도 별로 없었지만 바다를 막는 해금정책을 쓴 조선에서 유럽 장사꾼들이 도자기를 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국과 일본이 도자기 수천만 점을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조선은 도자기를 수출할 생각도,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네덜란드 코레아호가 조선에 도착해 무역을 요청했다면 받아들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중화사상에 심취한 정신승리의 대가, 조선 사대부들은 네덜란드 야만인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코레아호가 조선을 향해 출항했던 17세기 이후 100여 년간 조선과 무역을 했다는 배들은 기록에 없다. 조선은 바깥 세계의 나라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은둔의 나라였고,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도 굳이 바깥세상의 돌아가는 정세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200여 년 뒤 총포로 무장한 제국주의 국가의 전함들이 조선 앞바다에 나타났을 뿐이다.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가진 도공들을 천시했다. 양반은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았고, 직업 미술가는 중인 출신만 가능했다. 조선 도공은 천민 대우를 받았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최상위 계층의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 조선 도공을 모시는 신사가 있을 정도이다. 최고 대우를 받은 조선 도공은 자랑스럽게 자기 이름이 들어간 세계 최고 수준의 자기와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자기를 수출한 일본은 유럽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일본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가 일본의 채색 목판화인 우키요에였는데,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채색 목판화에 심취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놓고 말년에 그곳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는 일본의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들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유럽에서는 일본 열풍, 즉 자포니즘이 성행했으며 이때 유럽은 일본으로부터 ‘간결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배웠다.

조선은 세계 최고의 도자기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고 주자학적 관념에 빠져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실속 없는 문화적 우월감으로 오랑캐들을 교화하려고 했다. 중국, 일본과 같이 도자기를 수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요즘 최고의 인재들이 공대를 기피하고 의사와 공무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관념적인 주자학적 질서를 위해 상공업을 억제했던 조선과 달리 일찌감치 상공업이 발달해했던 중국과 대만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이 지금도 공대에 많이 간다. 조선시대 유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과거제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의 국가고시 제도에 공시생 수십만 명이 젊음을 바치는 모습에는 한숨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실용성이 전혀 없는 2000년 전 책들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공부하면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과거 공부로 세뇌해 주자학적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사대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조선시대 사농공상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공대 출신 장사꾼인 필자의 눈에는 사농공상의 잔재가 아직도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눈에 띈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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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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