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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27) EUV 스캐너와 물소 뿔 

 

반도체 장비 중 가장 비싼 장비가 네덜란드 ASML이 만드는 EUV 스캐너다. 한 대에 2000억원 정도 되는 장비로, 5나노 이하의 첨단 반도체를 만들려면 꼭 필요하다. 1년에 50대 정도 만드는데, 이 장비를 만들려면 전 세계 수천 개 회사의 최첨단 부품 30만 개가 공급되어야 한다. 삼성, SK하이닉스, TSMC, 인텔, 마이크론 등 세계적인 회사들이 글로벌 반도체 ‘슈퍼乙’ 기업 ASML에서 이 EUV 스캐너를 사려고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고 있다.

세계 통신장비업계 1위로 올라서서 5G 통신망을 장악해가는 중국 화웨이에 대만과 미국 기업이 첨단 반도체 공급을 막으면서 ‘화웨이 질주’가 멈췄다. 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중국의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게다가 미국은 추가적으로 ARF 이머전 스캐너의 중국 수출 금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국도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장비 국산화나 3차원 패키징 기술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하지만, 서구가 수백 년 동안 쌓아올린 최첨단 기술의 공급망을 단기간에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30여 년간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굴기를 지켜봤다. 봉제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부터 시작해서 철강, 화학, 조선, 전자 등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국이 세계적인 생산능력과 기술을 보유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세계의 산업 생태계가 같이 격변해왔다. 사실 전 세계는 중국이 낮은 인건비와 정부 지원으로 만들어낸 값싼 Made in China를 즐겨왔다. 한국은 중간재를 수출하며 중국의 굴기에 가장 큰 혜택을 봤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 바깥의 수많은 기업이 주식회사 중국과의 경쟁에 밀려 문을 닫았다. 불과 30년 만에 전 세계 제조업의 공급망이 중국 중심으로 재구축된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에 ‘일대일로’ 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중국 때문에 미국의 패권 유지가 불안해지자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국은 무섭게 치고 올라와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를 먹으면서 이뤄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국의 아킬레스건은 반도체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아야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미일 반도체 전쟁이 1990년대 초중반대까지 십수 년간 지속된 사례를 보면 세계 경제와 산업을 주도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중심에 있는 반도체 산업을 두고 벌어지는 미중 무역전쟁은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 볼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옛날의 전략물자, 활·쇠뇌·물소 뿔·화약


▎신라의 쇠뇌.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미국과 중국의 EUV 스캐너 금수조치를 둘러싼 갈등을 보면서 불현듯 ‘활’, ‘쇠뇌’, ‘물소 뿔’이 떠올랐다. 미국이 EUV 스캐너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명분도 미사일 같은 대량 살상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조상들이 오랜 기간 독립을 유지했던 비결은 산성에서 고성능 화살, 쇠뇌를 쏘면서 외적을 물리친 덕분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이름 ‘주몽’도 활을 잘 쏜다는 의미였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명궁으로 유명했다.

당나라는 신라의 ‘쇠뇌’를 탐냈다. 신라의 쇠뇌는 1000보, 800m 거리에 있는 적을 맞출 정도로 사거리가 길었다고 한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신라는 어쩔 수 없이 쇠뇌를 만들던 구진천이라는 기술자를 당나라로 보냈다. 당나라로 끌려간 구진천은 쇠뇌를 만들었지만 30보 정도만 날아갔다. 구진천이 나무 재료 핑계를 대자 당나라는 신라에서 나무 재료까지 받아왔다. 구진천이 다시 만든 쇠뇌는 고작 60보 정도 날아갔다. 화가 난 고종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구진천은 “바다를 건너오며 나무가 습기를 먹은 것 같다”며 머리만 조아렸다. 고종은 엄한 벌을 주겠다고 위협했지만 구진천은 신라의 쇠뇌만큼 뛰어난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활은 한 가지 재료로 만든 ‘단일궁’과 여러 소재를 합쳐 만든 ‘합성궁’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활은 대부분 합성궁이다. ‘각궁’은 그중에서 최고로 꼽히며, 여기에서 ‘각’이란 황소나 물소의 뿔을 이른다. 기다란 황소 뿔이나 물소 뿔을 얇게 깎아서 나무 활대에 겹겹이 붙여 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요즘은 탄소섬유로 활을 만들지만 근대까지 물소 뿔만 한 탄성을 지닌 재료가 없었다. 각궁 하나에는 물소 한 마리가 들어가는데, 원료는 100% 중국 남부와 동남아에 가야 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각궁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전략물자였고, 각궁의 보유 수량은 곧 우리나라의 군사력이었다.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에 올라가서 화살을 쏘면서 나라를 지켜야 했던 고려와 조선에서 물소 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물자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중국 대륙의 제국들은 잠재적인 위협인 한반도 나라들에 물소 뿔을 수출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고려 고종 18년(1231)에 무신정권의 최우는 상인에게 광포를 주어 물소 뿔을 사 오도록 명령했는데, 상인은 물소 뿔을 구하지 못해 아름다운 채색 비단을 대신 가져왔다. 최우는 이 채색 비단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상인이 하는 수 없이 물소 4마리를 다시 구해오자, 그제야 최우는 인삼 50근과 포 300필을 주었다고 한다. 송나라는 고려가 물소 뿔로 화살을 만들지 못하게 칙령을 내렸지만, 고려는 상인들을 통해 몰래 물소 뿔을 들여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대마번을 통해 물소 뿔을 구해왔다.

조선시대에는 활에 쓸 나무를 구하러 갈 때 말이 제공되었고 지방관리에게 접대까지 받았다. 궁방에서 20년 이상 근속하고 활을 1000개 이상 만들면 관직을 내렸고, 군영에서 난동을 부린 궁인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사농공상을 따져가며 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이처럼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이유는 활이 국가 전략무기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활과 화살 제작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중국 사신과의 접촉을 막기도 했다.

강력한 대포가 필요했던 조선은 화약 제조에 몰두했다. 그런데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주원료 중 유황과 분탄은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는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염초 확보는 군사력 증강에 필수적이었다. 염초 확보에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들은 역관과 상인들이다. 이들은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에서 인삼을 팔아 번 돈으로 염초를 구입해 들여왔다. 염초 확보에 많은 공을 들인 세종은 국내에서 염초 제조용 흙을 구하면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따라서 인삼 무역으로 번 돈으로 중국 염초를 수입한 것은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21세기의 최종 병기는 첨단기술


▎ASML의 EUV스캐너.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첨단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려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언론에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기술 유출은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회사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한다. 어느 시대에나 첨단기술을 가진 자들이 시장과 세상을 지배했다. 서구와 일본의 기술을 배우고 도입해서 성장한 대한민국이 불과 몇십 년 사이에 기술을 지켜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순풍이 지나가고 신냉전 시대의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기술전쟁은 앞으로도 수십 년 더 갈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반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최첨단 반도체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물소 뿔을 수입해서 만든 세계 최고 성능의 최종 병기 ‘활’로 한반도를 지켰듯이 21세기 한반도를 지킬 수 있는 최종 병기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최첨단 반도체가 될 것이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206호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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