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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탁소와 디지털 장의사의 세계 - 당신의 ‘잊혀질 권리’를 지켜드립니다 

온라인을 떠도는 사생활 기록 청소해주는 ‘디지털 세탁소’ 국내 상륙… 망자의 기록 정리하고 지워주는 ‘디지털 장례식’에도 관심 커져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개인의 사생활 유출 피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한번 유출된 기록물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20대 후반의 여성 A씨의 하루는 컴퓨터 앞에서 시작 되고 끝이 난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해온 지가 벌써 여러 달째다. 악몽의 계기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소년 시절 호기심에 누드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게 화근이었다. 곧바로 사진을 삭제했고,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몇 달 전 친구의 연락을 받고 문제의 사진이 다시 유포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경찰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했지만 시간이 오래돼 최초 유포자를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대답을 들었다. 개인 간 파일공유 사이트(P2P)들을 이 잡듯이 뒤져 찾는 족족 삭제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다. 몇몇 중간 유포자를 찾아내 신고해도 대부분 100만 원 정도의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곤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죄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 가벼워 보였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자 A씨는 결국 자살을 시도했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B씨(26·휴학 중)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이다. 여자친구와 장난삼아 찍은 성관계 동영상이 인터넷을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간직하려고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인데 공개 범위를 잘못 설정한 게 문제였다. 이미 주변 지인들이 영상을 봤고, 여러 자극적인 제목이 달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P2P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B씨는 “저와 여자친구의 삶은 죽음으로 가기 일보직전”이라고 도움을 호소했다.

개인의 기록이 담긴 일기와 사진, 영상의 저장매체가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가 불어나고 있다. 정보가 유출되면 기하급수적으로 무한 증식하는 온라인의 확산력 때문이다. 일일이 주워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대응하기엔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 특히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유출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멸시키기도 한다. 한때의 치기 어린 행동에 대한 대가 치곤 너무나 가혹하다.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아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임시조치’란 제도가 있다.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게시물로 인해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가 블라인드 처리를 요구할 경우, 포털 사업자들은 일단 30일 동안 해당 글을 차단한다. 이 기간에 차단조치의 부당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영구적으로 자료가 삭제된다. 그러나 일일이 찾아내 해당 웹사이트 관리자에게 삭제를 요구해야 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해외에 서버를 뒀거나 정체가 불분명한 불법 사이트라면 그마저 쉽지 않다. 세계를 연결해 정보의 무한한 유통을 가능케 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의 개방과 공유 정신이 피해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는 셈이다.

디지털 발자국 지워주는 ‘디지털 세탁소’ 등장

정보 유출에 대한 피해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업종이 등장했다. 이른바 ‘디지털 세탁소’라고 불리는 온라인 개인정보 관리 대행 서비스다. 2000년대 들어 연예인이나 정치인, 기업체 등 온라인 평판에 민감한 소수의 사람들이 암암리에 이용했던 서비스가 대중화된 것이다. IT 전문가와 법률지원팀 등 정보 관리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한데 모아 전문 서비스로서 모양을 갖췄다.

이 업체들은 의뢰인의 유출된 정보를 찾아서 삭제하거나 과거에 곳곳에 남긴 ‘디지털 발자국’들을 지워주는 대리인 역할을 한다. 의뢰인에 대한 비방 등 명예훼손성 기록에 대한 법률지원을 대행하기도 한다. 자신의 과거를 지워 온라인의 이력을 ‘세탁’하려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이 서비스를 반긴다. ‘잊혀질 권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첨병으로 여기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는 7~8개 업체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직은 사업 초기라 제대로 구색을 갖춘 곳은 2~3곳 정도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서비스의 특성 때문인지 대부분 운영 자체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올해 4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프라이버시앤컴퍼니’의 경우 아예 사무실 주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전화와 온라인 상담을 통해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고객만 서울 4곳에 마련한 방문센터에서 면담을 진행할 정도로 보안에 철저하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사업장 주소와 연락처 등을 공개하고 영업하는 곳은 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산타크루즈 캐스팅 컴퍼니(이하 산타크루즈)’ 한 곳뿐이다. 이 업체는 2008년부터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오다 지난해 5월 웹사이트를 만들고 정식 서비스를 개시했다.

서비스 범위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개인 블로그와 카페, 커뮤니티 등 인터넷 기록뿐만 아니라 SNS 이용 기록, 다른이들이 남긴 비방 게시글, 사진과 영상물 파일 등 고객이 원하는 모든 기록을 대상으로 한다. 과거의 불리한 기록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게 서비스의 목적이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인터넷 사용기록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지문처럼 남는다. 실제로 이성교제나 취업 과정 등에서 인터넷 기록은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최근 미혼남녀 33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소개팅 전 상대의 SNS를 몰래 검색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67%나 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기업 5곳 중 한 곳은 채용 시 지원자의 SNS 내용을 참고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서비스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다. 의뢰인이 제공한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이용해 인터넷 사용 기록을 검색하고 정리할 데이터를 걸러낸다. 데이터가 저장된 해당 웹사이트 관리업체를 통해 기록을 삭제하는데, 경우에 따라 가처분신청 등 법적인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서비스 이용을 원하는 이들은 대체로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 결혼을 앞두고 과거의 이성교제 기록을 지우고 싶거나,불륜 상대와 찍은 영상을 없애줄 것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김호진(44) 산타크루즈 대표는 “청소년들은 옛 기록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까봐 걱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성인들은 유출된 은밀한 개인정보 때문에 결혼과 취업 등 진로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온라인 평판 관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과 연예인들도 주요 고객이다. 인터넷 상의 악성 댓글이나 언론사의 오보 등을 실시간으로 차단해 확산을 막는 서비스다. 김 대표는 “악성댓글의 파급력은 1개월마다 4배 이상 증가해 그대로 방치하면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을 수 있다”며 “자체적으로 법무팀과 온라인 대응팀을 운영할 여력이 없는 기업이나 연예인들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망자의 기록 정리하는 ‘디지털 장의사’도 선보여


인터넷을 떠도는 개인의 기록들을 대신 지워주고 관리해주는 ‘디지털 세탁소’가 등장했다. 국내 1호 디지털 세탁소인 산타크루즈 컴퍼니의 김호진 대표.
이용료는 서비스 범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산타크루즈의경우 일반인은 50만~300만 원을 받는다. 기업과 연예인은 연 단위로 계약을 맺어 1억~1억5천만 원의 이용료를 받고 관리를 맡는다. 산타크루즈는 대신 청소년에게는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사회적 기여 차원에서다. 김 대표는 “돈도 없고, 가족에게 말할 수도 없어 혼자 고민하다 제때 처리하지 못하고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많아 공익적 차원에서 무료화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산타크루즈 주 이용자는 10대 청소년들이다. 국내에서 인터넷 보급이 확산된 2000년대에 유·소년기를 거친 ‘디지털 세대’인 만큼 지우고 싶은 기록도 다른 세대보다 많은 것이다. 산타크루즈의 경우 개인 회원 323명 중 19세 이하 청소년이 192명이나 된다. 지난해 3~12월 사이에 상담을 의뢰한 청소년 388명의 상담 키워드는 사진·동영상 유출(40%),개인 사생활 유출(20%), 정치적인 발언(20%), 부정적인 말이나 욕설 게시물(15%) 등으로 나타났다.

이성친구와 교제 과정이나 채팅 등을 통해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이 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교생인 C양은 7년 전에 장난삼아 했던 화상채팅이 무단으로 녹화돼 유포되고 있는 걸 친구를 통해 최근에야 알게 됐다. 이미 파일공유사이트를 통해 널리 퍼진상태였다. C양은 “어렸을 때 했던 철없는 행동이 이렇게 크게 문제를 일으킬 줄 몰랐다”며 산타크루즈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밖에 ‘왕따당한 친구를 험담한 게 인터넷에 떠돈다’, ‘지식인에 올린 성적인 질문이 퍼 날라졌다’, ‘일베(일간베스트)에 멋모르고 특정 정치인을 욕한 글을 올렸는데 검색되지 않게 해달라’ 등 어린 시절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세탁소의 사업 영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망자(亡者)가 남긴 ‘디지털 유산’을 관리하는 서비스도 선보였다.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라는 신종 서비스다. 사망한 사람의 인터넷 홈페이지나 각종 웹사이트 아이디 등을 쉽게 파악해 정리할 수 있는 서비스다.

평소 죽음에 대비해 각종 인터넷 계정과 기록들을 정리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거다. 그러나 이메일과 블로그, 개인홈페이지의 각종 기록들 중 가족에게 남겨줄 것과 삭제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한 고민은 한 번쯤 해봄직하다.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가 지난해 51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공개 콘텐트를 가족 또는 친구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응답은 76%에 달했다. 하지만 비공개 콘텐트를 가족에게 공개하고 싶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살아있을 때에 공개 콘텐트와 비공개 콘텐트를 계정별로나눠 관리한다면 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두 가지 콘텐트가 하나의 계정으로 혼재돼 있다면 사후에 이를 구분해 일부만 상속하는 건 불가능하다.

잊혀질 권리 논쟁은 세계적 흐름


현재는 인터넷 포털 사업자마다 규정과 처리 방법이 다르다. 구글은 휴면계정 관리자 서비스를 통해 일정 기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콘텐트를 다른 사람에게 미리 보낼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사전에 받을 사람 등을 설정해야 한다. 야후는 망자의 콘텐트를 정리해주는 ‘야후 엔딩’ 서비스를 최근 선보였다. 페이스북은 유가족의 요구에 따라 망자의 계정을 기념 계정으로 보존해준다. 다음과 네이버 등 국내 포털들은 유족에게 가입 정보를 제공할 뿐 관리 권한을 부여하진 않는다. 유족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재주껏 알아내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런 고민을 대신한다. 서비스를 가입하면 자신이 죽은 뒤에 디지털 장의사가 삭제할 기록과 가족에게 남길 기록 등을 생전에 구분해놓은 대로 처리해준다. 사후흔적 정리 서비스, ‘디지털 장례식’인 셈이다. 국내에서 이 서비스를 시작한 곳은 산타크루즈뿐이다. 김 대표는 “가족에게 조차 보이고 싶지 않은 내밀한 기록을 노출하지 않고도 생전의 추억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보관리 대행업체의 호황은 자연스레 ‘잊혀질 권리’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잊혀질 권리’란 용어는 생소하지만 외국에선 인터넷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논쟁거리다.

1995년 유럽연합(EU)이 만든 ‘유럽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에서 ‘잊혀질 권리’가 처음 언급됐다. 2012년에는 EU가 제정한 ‘일반정보 보호규정’을 통해 법적인 보장을 받게 됐다. 최근 ‘구글 재판’으로 유명한 유럽연합사법재판소(ECJ)의 판결이 잊혀질 권리의 범위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곤살레스는 자신의 집을 경매 처분한 것과 관련된 1998년의 기사 내용이 더 이상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며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ECJ는 지난 5월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고, 이후 두 달 만에 10만 건 넘는 삭제 요청이 구글에 쇄도했다. 구글이 7월 중순 EU 데이터보호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잊혀질 권리에 근거해 삭제를 요청한 링크 수는 32만8천 건이나 된다.

윤종수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구글(포털)을 개인정보 처리자로 인정했다는 점이 판결의 요지”라고 설명했다. 그는“단순히 검색 결과를 통해 게시물과 사용자를 연결(링크)만 해주는 포털에도 정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것”이라고 덧붙였다.

판결 이후 잊혀질 권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자 EU는 연말까지 개인의 잊혀질 권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 하기로 했다. EU의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담당하는 유럽위원회 실무그룹은 지난 7월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야후의 담당자와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구글은 판결 이후 외부인사가 포함된 자문위원회를 설치해 삭제 요청 기록물에 대한 심사를 맡기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이미 관련 법을 만들어 내년부터 시행을 예고했다. 일명 ‘온라인 지우개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SNS와 인터넷 등의 게시물에 대해 나중에라도 해당 인터넷 업체에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법이 시행되면 게시물의 성격이 반사회적이거나 불법적이지 않더라도 최초 작성자가 원하면 삭제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무심코 올렸던 글이나 사진, 영상물 등의 정보가 향후 당사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신종 검열?


국내에서도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 논의가 시작됐다. 방송통신위원회는 8월 4일에 발표한 제3기 방송위 상임위원회 비전 및 주요 정책과제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이용자 보호’를 주요 의제로 삼았다. ‘잊혀질 권리’에 따른 삭제 대상을 개인정보에만 국한시킬지, 일반 게시글이나 댓글 등 모든 정보까지 인정 할지가 관건이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은 “폭넓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반을 꾸려 잊혀질 권리와 디지털 유산 등 최근 떠오른 인터넷 관련 이슈의 법제화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장관에 내정된 다음에 ‘아, 이런 것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다’ 싶어서 지운 것들도 있습니다.”

지난 7월 10일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과거 그가 트위터에 올렸던 이념 편향적인 글들을 네티즌들이 찾아내 논란이 됐다. 그는 지난해 11월 트위터에 “조국·박창신·공지영·김용민… 이 사람들 북한가서 살 수 있게 대한민국 헌법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는 걸 상기시켜 드린다”고 조롱하는가 하면, 앞선 9월 6일에는 “최근 종북 파괴주의자들의 준동을 보면서 국민의 선택이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문재인이었다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적기도 했다. 청문회 직전에 2012년부터 SNS 상에 올린 글들중 문제가 될 만한 상당수를 삭제했지만 이미 온라인에 퍼져나간 기록을 다 주워담진 못했다.

만약 잊혀질 권리가 남용된다면 정 전 후보자의 청문회 결과는 달라졌을까? 전문가들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부패나 정경유착에 관련돼 있었거나, 그런 것에 대한 정보는 프라이버시로 보호될 수 없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가 잊혀지고 싶다는 이유로 정보들이 삭제 된다면 언론의 자유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의 지적대로 포괄적인 잊혀질 권리가 보장될 경우 공인의 ‘경력 세탁’에 이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실제 사례도 있다. 구글은 영국 프로축구 경기에서 판정 논란을 일으킨 심판과 관련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기사 링크를 삭제했다가 비판이 커지자 링크를 되살렸다.

지난 3월에는 서울의 한 병원이 과거의 의료사고 논란과 관련된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의 연관 검색어를 없애달라고 포털 측에 요구했다. 이 사건의 심의를 맡은 KISO는 병원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해당 검색어는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관에서 불의의 사고와 관련된 것으로 공공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잊혀질 권리가 확대되면 앞으로 이런 요구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2008년 9만 건에 불과했던 포털 사이트의 ‘임시조치’ 건수가 올 상반기에만 20만 건에 이르는 등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잊혀질 권리에 대항한 ‘기억할 권리’를 주장하는 쪽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박 교수는 “잊혀질 권리가 자신이 싫어하는 과거를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할 수 있는 권리까지 보장해야 하는 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의 정보들은 개인의 정보이기도 하지만 공공의 성격을 띤 역사적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KISO의 한 관계자는 “선조들의 낙서가 그 시대의 생활상과 여론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듯, 현재 인터넷에 개인들이 남긴 각종 기록, 심지어악성 댓글까지도 미래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KISO는 ‘공공의 이익 등에 부합하는 경우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운영 세칙을 마련해두고 있다.

‘잊혀질 권리’와 ‘기억할 권리’의 조화 필요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 재판’을 통해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구글의 위키피디아 링크를 제한 방침에 대해 ‘정보 검열’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외국에선 인터넷 열린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설립자인 지미 웨일스가 기억할 권리 옹호에 가장 적극적이다. 위키피디아는 ECJ 판결에 따른 구글의 조치에 가장 직접적인 타격에 직면해 있다. 구글은 판결 이후 위키피디아로 연결된 링크 50개를 삭제하고, 앞으로 1억 페이지 이상의 위키피디아 링크를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웨일스는 이를 두고 “신종 정보검열”이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그는 “인터넷 정보 공유활동이 부당한 검열 요구로 제약받지 않도록 인터넷 사용자를 위한 권리장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은 2007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시행을 앞두고 불거졌던 논쟁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인터넷실명제와 정부의 삭제 명령권을 ‘인터넷 검열’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잊혀질 권리’를 옹호하는 쪽은 과거의 인터넷 기록이 주홍글씨가 되어 개인의 인생을 옭아맬 위험성을 우려한다. 현행 제도로는 개인이 디지털 세탁소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정보의 확산력이 강한 인터넷의 특성에 대응하기가 역부족이란 것이다.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공해에 가까운 불필요하거나 유해한 정보들을 정리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기억할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마음대로 삭제할 수 있다면 특정인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이를 통한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수 없다고 반론한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제한해온 검열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들로 바뀔 뿐이란 것이다. 급성장하고 있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창의적 산업을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는 어떤 식으로든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방통위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거나 공익관련 정보 등은 삭제 대상에서 제외할 방침이다. 더불어 인터넷 계정의 상속 체계도 마련하기로 했다. 잊혀질 권리의 보장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누가,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삭제할 것인가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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