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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 ‘근대를 넘어선’ 근대 사상가 마르크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우위에 두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 헤겔을 비판… “모든 경제가치가 화폐의 형태로만 규정되는 자본주의는 물화(物化)된 사회”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마치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부르주아 사상을 겨냥하고 있다.
이른바 무조음악(atonal music)의 시대를 연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의 ‘피아노 작품 11번’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제대로 된 멜로디도 없고, 화음이나 일정한 규칙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조음악이란 ‘조성(tonality)’이 없다는 뜻이다. 조성음악의 경우 다장조, 사장조, 내림마장조 등의 조성이 정해져 있으며 이 조성의 기준에 따라 음계(scale)가 형성된다. 가령 다장조(C major)의 음계는 (#)이나 플랫(♭)이 전혀 없다.

피아노로 설명하자면 검은 건반을 누르지 않고 흰 건반만 낮은 도(Do)에서부터 높은 도까지 치면 다장조가 된다. 멜로디에 반음이 들어갈 경우 조가 바뀌거나 일시적인 일탈, 음악용어를 빌자면 경과음(passing note)으로 기능할 뿐이다. 만약 조성을 무시하고 흰 건반이나 검은 건반 상관없이 마음대로 건반을 두들긴다면 다장조라는 음계는 무의미할뿐더러 혼란스러울 것이다. 무조음악은 이처럼 조성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매우 혼란스럽고 어떤 규칙도 없는 무정부적인 음악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무조음악에 대한 완전한 오해다. 쇤베르크가 추구한 것은 어떠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아니다. 그는 조성음악과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법칙과 질서를 발견하고자 했다. 조성음악이 따르는 법칙을 강제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쇤베르크에 따르면 전통적인 조성 음악에서는 조성과 화음의 법칙은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치 왕과 귀족, 평민과 노예의 신분을 하늘에서 정한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법칙의 필연성도 외부에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쇤베르크의 생각이었다.

외부로부터 미리 주어진 어떤 전제도 거부


쇤베르크의 ‘피아노 작품 11번’ 첫 부분. 멜로디의 첫 세 음은 단3도와 반음으로, 그 다음의 세 음은 장3도와 반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형태가 곡 전체에 일관되게 반복된다.
때문에 어떠한 법칙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쇤베르크의 피아노 작품 11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는 매우 엄격한 법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외부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법칙과 다른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는데, 이 곡의 첫 세 마디만 보아도 이러한 특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멜로디의 첫 세 음은 단3도와 반음으로, 그 다음의 세 음은 장3도와 반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형태가 곡 전체에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단3도와 반음의 형태가 멜로디의 수평관계뿐만 아니라 세 번째 마디에 표시한 첫 번째 세 음이 수직적으로 단3도와 반음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의 선입견과 완전히 상반되게 쇤베르크는 매우 치밀한 방식으로 이 곡을 구성하고 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법칙 일반이 아니라 마치 자연법칙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진 전통음악의 법칙인 것이다.

사회주의 이론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사상의 출발점도 쇤베르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모든 이론적 전거를 마련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핵심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마치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부르주아 사상을 겨냥한다.


마르크스의 대표 저서인 <자본론> 초판. 총 3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의 교과서로 간주된다.
마르크스가 배격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회의 법칙을 넘어 초역사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착취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법칙이라고 믿었으며,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이러한 착취를 교묘하게 은폐하거나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를 대표하는 저서는 <자본론>(Das Kapital, 1862)이다.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자본론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의 교과서로 간주된다. 하지만 자본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봐도 정작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없다.

이 때문에 후대의 많은 이론가나 혁명가들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정작 어떤 사회를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적잖은 사람이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을 현실화한 체제가 구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세기에 존재했던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지본론>에는 분명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천적 관심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서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가 아니라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설계하기 위한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었다.

마르크스를 관통하는 이론적이면서도 실천적인 하나의 지침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당대의 많은 사상가와 구분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인간의 사유라는 것이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정신노동으로서 다른 육체적인 활동과는 차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자질이라고 믿는 근대의 많은 사상가와 분명히 달랐다.

이는 <자본론>을 집필하기 훨씬 이전인 청년기부터 마르크스가 지닌 일관된 신념이었다. 청년기를 대표하는 그의 저서 <경제학-철학 초고> (Ökonomische-Philosophische Manuskript, 1843)만 보더라도 이러한 특징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나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와 같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후반부에서도 헤겔의 ‘노동’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 두 가지의 이론적 작업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개념이 이 둘을 묶어주는 하나의 끈이 된다.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가 ‘노동가치설’을 통해서 상품의 가치를 이루는 근원이 노동이라고 주장한 것에 상응하여 헤겔은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활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 점에서는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 그리고 헤겔은 위대한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노동’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비판


1955년 미국 일리노이 주 데스플레인즈에 최초로 생긴 맥도날드 매장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가치가 화폐가치로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물화된 사회’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들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이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다듬기 위해서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와 같은 정치경제학자가 노동을 경제적 부의 원천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헤겔은 기존의 사상가들과 달리 ‘노동(Arbeit)’을 주요한 개념으로 확립했지만 그의 ‘노동’은 여전히 육체적인 활동보다는 정신적인 활동에 국한됐다는 한계가 있었다.

헤겔이 생각하는 노동이란 일차적으로 자연이라는 대상과 교호작용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는 정신적 활동이다. 이차적으로는 이렇게 터득한 법칙을 바탕으로 자연이라는 대상을 가공하는 일이다. 헤겔이 보기에 정신적 활동이 개입되지 않은 육체적 활동은 무의미할뿐더러 노동도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 같은 평가는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더욱 정교화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길동무’ 역할을 했던 철학자 알프레드 존-레텔(Alfred Sohn-Rethel)은 1986년 국내에 소개된 저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에서 ‘노동’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추상적인 사유 활동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이분법을 전제하고 정신노동을 육체노동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인간의 이성이나 사유활동을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육체노동은 항상 신체적으로 어떤 대상과 직접 대면하여 육체적 노고를 감내해야 하는 활동이다. 이에 반해 정신노동은 직접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감내할 필요도 없으며, 신체를 사용해야 하는 대상도 없다. 오로지 인간의 지적 능력만이 요구될 따름이다. 존-레텔은 이렇게 인간이 현실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 혹은 이러한 활동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야말로 정신노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지배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알프레드 존-레텔에 따르면 헤겔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무시되었던 노동이라는 개념을 철학의 무대 위로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노동에 국한됐다는 한계가 있다. 물론 경제적 부의 원천을 노동에서 찾았던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 역시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몸에 대한 철저한 억압이 근대사상을 설명할 수 있는 큰 특징 중 하나라면 일찍부터 육체노동의 중요성에 주목한 마르크스 사상은 근대적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면 이제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이 왜 그토록 마르크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보자. 이에 앞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름아닌 마르크스는 항상 자신을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학에서도 마르크스 경제학은 항상 애덤 스미스 및 리카도와 함께 고전경제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 같은 평가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근대사상에 묻혀버리고 만다. 이러한 평가가 온당한 것일까? 과연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스미스 및 리카도와 동일한 근대사상의 궤적에 놓여 있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 및 리카도와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와 마르크스 사이에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한다. 그러한 단절은 역설적이게도 스미스와 리카도의 사상을 충실하게 따를 때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을 일관되게 설명하다 보면 근본적인 모순이 도출되는데 그러한 모순을 은폐하느냐 드러내느냐가 그들과 마르크스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전경제학의 비일관성을 폭로하다

가령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6)에서 국가의 경제적 부를 이루는 원천으로 ‘노동’을 든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재화 혹은 용역은 상품으로 존재하는데 상품의 가치는 곧 노동인 셈이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가격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주지하다시피 애덤 스미스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국중앙은행이 발행하는 20파운드 지폐에 등장한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현상만을 충실하게 묘사하였을 뿐 그 현상 밑에 있는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다수의 공급자가 존재하는 경쟁체제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리하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은 경제적 위기(공황)가 발생할 경우 경쟁력이 부족한 기업은 파산하게 되며 소수 기업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 경우 독과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애덤 스미스는 이미 자신의 저서에서 이 사실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달할 경우 경제는 소수 기업이 독점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논리적으로 매우 일관된 것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장경제의 발전이 극소수의 독점으로 귀결되리라는 애덤 스미스의 언급만큼이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솔직한 묘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이런 결과를 그다지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록 독점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독점 기업가는 인구의 극히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하루 다섯 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소비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에게 독점은 심각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의 비일관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의 현상만을 충실하게 묘사하였을 뿐 그 현상 밑에 있는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데이비드 리카도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리카도 역시 부의 원천을 노동으로 보는 ‘노동가치설’을 충실하게 따른다.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노동이라는 것은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리카도의 경제학에서도 출발점을 이룬다.

물론 두 사람의 노동가치설에도 차이가 있다. 이른바 ‘지배 노동설’이라도 불리는 스미스의 이론은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과 얼마만큼 교환될 수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반해 ‘투하 노동설’이라고 불리는 리카도의 이론은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에 얼마만큼의 노동시간이 투여되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이론을 따른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리카도의 사상에도 치명적인 모순이 있음을 밝힌다. 리카도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 1817)의 전반부에서 노동가치설을 치밀하게 설명한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노동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는 틀어진다. 그는 자본의 수익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이윤, 이자, 지대로 나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리카도가 제시한 전반부의 노동가치설에 따르자면 이윤, 이자, 지대의 원천은 노동이라는 단일한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리카도는 이윤, 이자, 지대의 원천을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이윤은 자본의 이익에서 비롯되며, 이자는 화폐로부터 발생하는 수익, 지대는 토지가 지닌 비옥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가의 수입이나 이자, 혹은 토지소유자의 지대는 땅이나 화폐에서 솟아난 것이 결코 아니라 착취된 노동의 다양한 형태에 불과하다. 따라서 리카도의 이론은 이윤, 이자, 지대가 모두 노동의 착취일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이를 교묘하게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해석하는 두 이론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원묘지에 있는 마르크스 묘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거대이론에 의지한 근대사상을 넘어서고자 한 근대 너머의 사상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다시 쇤베르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쇤베르크가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비판한 것과 마르크스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을 비판한 것은 정확하게 평행관계를 이룬다.

쇤베르크가 보기에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조성과 화음의 법칙을 인위적인 것이 아닌 신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전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설이 바로 그러하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을 자본주의사회에 ‘한정된’ 법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법칙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경제법칙은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법칙인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로빈슨 크루소’ 일화는 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애덤 스미스는 혼자 섬에 표류하게 된 로빈슨 크루소마저도 가계부와 상품 목록을 기록하고 이를 화폐 단위로 계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야말로 경제관념을 갖춘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스미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이미 인간은 화폐 계산능력을 지니고 재화를 화폐단위로 환산하며 교환을 전제한다. 이는 원시시대에도 이미 조개나 곡물이 화폐를 대신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과연 그럴까? 로빈슨 크루소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온 사람이므로 그러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원시시대에 조개나 곡물이 화폐처럼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적 화폐의 형태를 일반화하여 과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에 화폐가 사용되었지만 화폐경제라고 말할 수 없으며 시장경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재화는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직접적인 소비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폐경제를 일반화하여 과거의 사회까지 소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중세음악의 선법이나 바로크 음악의 대위법이 조성음악의 맹아적 형태라고 보는 거만한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히고자 한 것은 ‘노동가치설’의 정당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허위적 기능에 있다고 보는 해석이 최근에는 우세하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이른바 ‘실체론’과 ‘형태론’이 대립하다가 ‘형태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설명한다. 가치 실체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상품의 가치를 실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정량화하려고 했다는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란 해당상품의 생산에 투여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를 그것에 투여된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단순하지는 않을 뿐더러 불가능하다. 가령 볼펜 한 자루를 만드는데 투여되는 노동시간을 계산하고자 한다면, 볼펜심·포장지·플라스틱 케이스·잉크 등 무수히 많은 재료에 투여된 노동시간을 계산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볼펜심만 하더라도 또다시 철을 가공하는데 드는 노동시간, 운반 노동시간, 볼펜심을 만드는 주조틀을 짜는 데 투여된 노동 시간 등을 계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 출신의 경제학자 모리시마는 온갖 계량경제학적 방법을 총 동원하여 실체론의 입장에서 마르크스 가치론을 실체화하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설혹 상품에 투여된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의 계산에 성공하여 상품의 가치가 어떤 값을 갖는지 알았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가치가 곧바로 가격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우연적 변수에 의하여 가치는 가격과 일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가치가 가격으로 변화하는 ‘전형(변형, transformation)’의 문제를 고려했는데, 가격은 우연적인 변수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형태론’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이 상품의 가치를 정량화하고 실체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목적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형태론적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이론을 송두리째 넘어서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1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라고 할 수 있는 상품을 분석한다. 마르크스가 상품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분석을 통해 얻은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가 과거의 사회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이, 화폐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일반화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라는 보편적인 등가물에 의해 모든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사회인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모든 경제적 가치가 화폐의 형태로 규정되는 유일한 사회가 곧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제 사회, 고대 동아시아 사회, 노예제 사회 등 어떤 사회의 형태도 모든 경제 가치가 화폐의 형태로만 규정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가치가 화폐가치로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물화된 사회’로 묘사했다. 물화(物化, Reification)된 사회에서는 사람이 주체가 아닌 사물이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가령 재래시장에서 상품을 팔고 사거나 혹은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교환과 거래는 사람이 아닌 사물들 혹은 숫자의 움직임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로 주식시장의 애널리스트나 경제학자는 사람들이 주체라기보다는 숫자가 주체이며 사람들은 그 숫자의 움직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 사상이 근대의 한계를 넘어선 까닭

마르크스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정확하게 물화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수요와 공급, 자연가치와 시장가격 등의 경제적 지표들이 초역사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가치설은 바로 상품의 교환법칙이 하나의 자연적인 법칙인 것으로 추상화하는 물화된 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형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상품의 가치가 추상적인 노동으로 정량화되는 자본주의의 착취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통하여 상품경제의 법칙은 초역사적인 법칙이 아닌 단지 자본주의사회에 ‘한정된’ 법칙일 뿐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물론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형태론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정치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 경우 엄청난 분량과 지적 노고가 깃든 <자본론>은 그저 부르주아 경제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정치입문서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단순히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넘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명칭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거대이론에 의지한 근대사상을 넘어서고자 한 근대 너머의 사상이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01409호 (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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