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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의 만남 | 조인원 경희대 총장 - “실용주의 틀 넘어서야 인류가 나아갈 새 길이 보인다” 

확신의 충돌이 공포와 혼란 일으켜… 세상을 끌어안아야 위기 넘어설 수 있어 

최재필 월간중앙 기자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whanyung@joongang.co.kr]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 우리 인류 앞에 들이닥칠지 모른다. 알렉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에 따르면 지난 1천여 년은 민주주의가 꾸준히 앞으로 전진한 역사였다. 가끔은 퇴보하기도 하고 갈지자걸음을 걷기도 했으나, 민주주의 앞에선 군주제·전체주의·권위주의는 결국 모두 나가떨어졌다. 민주주의는 또 시장경제에 힘을 불어넣었다. 민주적 자본주의는 풍요를 가져왔다.

▎조인원 경희대 총장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낼 화두로 ‘포월(包越)’을 제시했다. 세상을 포용하고, 편협한 세계관을 넘어서는 게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콤비’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성공을 이룬 비결은 균형과 종합이었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동체, 여자와 남자, 국가와 종교, 서양과 동양 사이에 균형을 모색했다. 한데 균형을 가능케 한 것은 종합(綜合·synthesis)이었다. 종합을 ‘주의(主義·ism)’로 표현하면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는 갈등구도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최상의 것들을 자유로이 가져다 쓰며 최상의 솔루션을 만들었다. 예컨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혼합경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최적, 적어도 차선으로 융합된 결과다.

균형과 종합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포월(包越)’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포월은 빅뱅(Big Bang)과 같아서 완전한 새 출발이다. 포월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원점을 모색하는 것이다. 포월이 종합과 비슷하지만 종합이 아니듯, 포월은 또 상생(相生)과 비슷한 것 같지만 상생도 아니다. 상생은 서로 갈등하는 A와 B의 공존과 협력과 생산성을 도모하지만 초월의 세계는 아예 각종 A와 B가 아직 존재조차 않는 세계다. 포월 시대에는 주체 자체가 재구성된다. ‘자유 vs 평등’, ‘민족국가 vs 국제사회’라는 식의 주체의 구조 자체가 새롭게 배열될 것이다. 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한 초월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조인원 경희대학교 총장(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 박사)을 만났다.

40억 년 전, 지구 최초의 생명체 아리에스(Aries)가 있었다. 진화생물학은 그렇게 전한다. 살아남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기나긴 진화의 여정과 함께했다. ‘지구를 정복한 인류’도 그런 생명체 중 하나다. 생존과 번성의 ‘생명 과업’을 이어 가며 삶의 질서를 창조했다. 현생인류는 그 질서에 인간 특유의 삶의 규준, 실용의 문명 기획을 불어넣었다. 생존과 번성, 이익과 효용을 추구하며, 풍요의 인간시대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 성취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풀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산재한 소외와 고통, 갈등과 폭력. 인간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여전히 실용의 기획이 유일한 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또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 실용의 기저에 인간의 ‘인간적 가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무한한 인간 영혼의 우주적 기원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포월(包越)의 초대’. 벗어나고, 넘어서고, 포괄하는 인간역량과 함께, 또 다른 사유와 실천의 미래가 필요하다.

‘포월(包越)’이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한자 사전을 보면 포는 아우르다, 받아들이다는 뜻이고 월은 넘어가다, 경과하다, 흐트러뜨리다와 같은 뜻이 있다. 그런 말의 종합인가? 왜 지금 포월을 말하나?

“인간은 세계 내의 존재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주의 일부다. 우리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눈은 우주적 역동과 진화의 산물이다. 질서와 무질서가 변환을 거듭하고, 생명은 태초로부터 펼쳐져온 창성과 소멸, 융합과 이산(離)의 우주적 본성을 이어간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펼쳐지는 ‘태초의 파문’을 몸과 정신에 새겨왔다. 우주적 본성인 생과 사를 둘러싼 고뇌와 번민은 우리 모두의 내면 깊이 침잠해 있다. 인간의 이 속성은 삶의 또 다른 국면을 열어왔다. 창성과 필사의 숙명에 반응하며 위안의 실존을 일깨웠다. 실존의 일깨움을 통해 인간은 두려움에 맞서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연결과 협력을 꿈꿔왔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세계는 우주의 극히 일부다. 우주적 본성은 정신에 있다. 태초의 질서와 무질서의 상호작용은 시공을 초월해 인류 역사와 삶 속에 깊이 관여한다
포월(包越)은 그런 문맥의 말이다. 우주적 본성을 열린 정신으로 이해하고, 고뇌와 희망이 교차하는 삶의 조건에서 인간의 상생지대를 창조하자는 필요에서다. 우리 삶의 주변엔 생사 숙명과 관련된 고정된 ‘진리의 확신’이 넘쳐난다. 그에 따른 파열음이 이어진다. ‘이것이 진리다’, ‘이 길 만이 살 길이다’, ‘저 말은 틀렸다’, ‘잘못된 판단이다’…. 옳고 그름을 둘러싼 진리 공방은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야기했다. 하지만 이는 ‘궁극의 실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의 ‘인간적 믿음의 소산’일 뿐이다. 이 점에서 피어스(Joseph C. Pearce)의 통찰이 눈길을 끈다. “인간은 진리와 확신이란 우주 알(cosmic egg)에 거주한다. 그러나 그 알에는 늘 균열(crack)이 존재한다.” 때로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멸절을 불러오는 진리와 확신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무엇을 통해 ‘더 나음’을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길은 균열 사이로 드리워진 ‘빛의 원천’, ‘실재의 궁극’을 함께 찾아나서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 ‘절대의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유로움을 통해 존재의 안위와 희망을 말하는 것’. 탄생과 필사의 존재, 인간이 구해야 할 또 다른 과업이다. 포월은 그 과업을 위한 사유방식이자, 실천 가능성이다. 아직 모를 진리와 실재를 향해 ‘벗어나고, 넘어서고, 함께 일궈야 할’ 인간의 인간세계를 찾아나서는 존재와 자기창조 양식이다.”

현실정치의 현안인 좌우 문제, 통일 문제 같은 경우도 포월이 답인가?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인간사, 사회현상 대부분이 그렇듯이 ‘유일한 정답’을 찾아 내려는 노력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그런 인류 역사가 과연 존재했나? 인간과 사회 기저엔 항상 열린 가능성이 내재한다. ‘1+1=2’다. 이 답은 산수를 위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현상, 사회 현상은 다르다. ‘1+사과’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할 경우도 있고, ‘사과+행복’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때도 있다. 물리 현상, 정신 현상의 결합인 인간과 사회 현상은 그런 문제를 다뤄야 한다. ‘좌우 문제와 통일 문제’. 그간 수많은 사람이 이를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차이와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과 갈등, 폭력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아직도 교착상태다. 문제가 불거진 후 반세기가 넘도록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몇가지 과제가 중요해 보인다.

우선 차이와 경계 문제를 다뤄갈 ‘민주’와 ‘시민’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다. 민주의 사전적 의미는 ‘민(民)이 주권 행사를 통해 주체가 되는 것’이다. 시민은 개인과 사회의 공생을 위한 각성과 책임, 유대를 기치로 삼는다. ‘나와 다른 생각은 죄악이다’, ‘배척 대상이다’와 같은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좌도 인간이고, 우도 인간이다. 좌든 우든 인간적 삶의 융성과 고통받는 이들의 권한 강화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은가. 통일 문제는 이보다 복잡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명제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통일의 궁극 목적이 무언가? 통일을 위해 다수의 생명을 앗아갈 시련과 고난을 불사해야 한다면, 결코 쉬운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긴 호흡의 전망과 대안이 필요하다. 민주·시민의식의 개진을 통해 ‘상생의 부름(communal evocation)’, 혹은 협력 관계 구축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다.

또 다른 과업은 ‘현실정치’에 관한 것이다. 현실정치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권력과 투쟁, 전략과 쟁취 같은 말이다. 서양에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동양에선 진수의 <삼국지>가 그 이야기의 표상이다. 창성과 소멸, 파괴와 변전의 자연 현실, 현실적 삶의 조건에선 현실정치가 주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인간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냉엄한 자연 현실과 함께 인간의 인간적 가치, 사회적 가치를 일깨우며, 더 나은 자신과 사회를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인식 차이의 극한 대립과 갈등 문제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의미부여로부터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유일한 해답 버리고 상생의 부름에 답해야


▎꼬인 매듭을 푸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즉 실용주의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문제의 해법은 늘 실용적일 수만은 없다. 다소 시간이 걸려도 철학적 사유와 실천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발문에서 ‘실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실용주의만 잘해도 사회와 국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지 않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삶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실용주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실 분석, 목적 달성을 위한 실천이 중요해진다. 현대적 사유의 한 축을 이루는 실용주의는 유럽의 전통과 관습을 넘어 ‘신천지’를 개척하는 ‘미국적 상황’에서 꽃피었다. 고정된 진리와 보편의 집착을 버리고, 현실, 실리, 입증, 성취와 같은 사유와 실증 결과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실용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가 더욱 현대화하는 데 기여한 철학이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만 잘해도 나라와 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풍요와 번영의 문명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부분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드러난 현실과 유용성, 합리성, 실리를 강조하는 실용주의는 철학과 실천의 도구적 기능 너머 세계를 간과한다. 인간의 역사를 이끄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좌절과 분노, 성찰과 반성, 수렴과 사랑… 인간의 내면엔 계량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정조(情調)가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실용주의는 이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 내면을 향해 길을 열어야 한다. 그런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용주의는 ‘창백한 삶의 철학’, ‘현상에 흩뿌려진 약속의 철학’일 뿐이다. 모든 것이 결국 생산과 교환, 경쟁과 소유의 물량으로 환원되는 이 시대,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주제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말한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재구성 같은데, 이러다가 아무것도 안 되는 것 아닌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다. 짤막하게 몇 마디만 덧붙인다. 실용주의는 국가적 차원에서 성장과 번영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국가의 통치와 정책 차원에서 현실과 실용을 배제한 고려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엇에 기반을 두어야 하나? 무엇을 궁극적으로 지향할 것인가?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삶의 목적과 가능성을 포용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 가치에 경도되는 경향을 보인다. 모든것이 결국 경제와 시장논리로 귀결된다. 물론 이 추세는 우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현대의 시류에 편승한 국가에 편만해 있다. 하지만 국민적 삶이 경제 문제로 환원되는 사회문화, 정치문화, 정책문화는 가치의 다양성을 희생시킨다. 현 정부는 집권 초 인문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문화융성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창조경제’와 우리 사회가 다양한 시민적 가치와 가능성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창조와 재구성이 순환해온 인류의 역사


그런 길을 위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도 재구성돼야 하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은?

“인간을 창조하는 것은 ‘위대한 과업’이다. 인류 변천사는 그렇게 전한다. 진화의 굽이마다 ‘위대한 창조’가 있었다. 인류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루시(Lucy)의 등장, 지혜의 역사를 연 호모사피엔스, 개인의 계몽과 각성을 정초한 근대 인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인간을 발견했고, 창조했다. 언어와 도구, 벽화와 예술, 신화와 종교, 과학과 철학, 이념과 제도 이 모든 인위적 구성물(human artifacts)에는 인간과 우주의 새로운 결합과 이산이 있었다.

이제 지구 밖 우주에서 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오늘의 현대인도 그런 우주적 진화의 결과다. 그러나 눈부신 문명 탄생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간되기 과정에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궁금증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 근원적 질문은 인간의 ‘토대 모름’에 대한 고뇌의 표현이다. 태초로부터 비롯된 시공 연속체(time-space continuum)의 신비와 함께 생사(生死) 과업의 철학적, 실천적 가치를 고양해가는 존재가 인간 아닐까? 우주의 촘촘한 연결망에 던져진 인간은 우주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우주의 질서, 무질서를 내 몸과 영혼에 아로새긴다. 사회와 제도, 문화와 이념, 역사와 문명은 그런 인간적 숙명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항상 창조와 재구성에 열려있다.”

‘인간 영혼의 우주적 기원’을 말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기원이 고조선이지만, 지금의 현실과 고조선의 현실은 연관성(relevance)이 떨어진다. 인간 영혼의 기원이 우주라 하더라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나? 현실과 영혼, 우주는 거의 무관한 것 아닌가?

“고조선의 성립은 기원전 2000여 년전 이야기로 전해진다. 환웅과 곰, 단군의 건국 설화. 옛이야기다. 말 그대로 현실과 연관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우리와 고조선 사람,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시공의 현격한 차이 면에선 서로 먼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 우주의 자손인 인간의 관점에선 우리나 고조선 사람이나 동일 선상에 놓인다. 이를테면 먹고 사는 문제, 살기 위해 사유하는 문제, 이에 따른 행동을 구성하는 문제는 시대를 초월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국지성(locale)’, ‘지금, 여기’의 현실에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그 현실은 내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때 접근 가능하다. 내 존재의 의미를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돌고래와 태초의 찬란한 불꽃(우주의 시원)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인간도 그렇다. 태초의 질서와 무질서, 물리적 상호작용은 다음 세계에 출현할 인간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미래에 창성할 개별 인간의 사건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가능성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것이 물리학자가 우주의 신비인 중력과 팽창을 말하고, 시인이 심야 호수에 비친 별들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시상을 떠올리는 이유일 것이다. 때론 ‘권모술수의 정치’가 인간과 양심에 비추어 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과 현실, 영혼과 우주를 관류하는 ‘연결의 신비’. 그것에 근접하려고 노력할 때 현실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인간의 ‘눈(몸)’과 ‘영(靈, 정신)’은 그 전환의 매개로 작용한다. 이 매개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 속 삶을 조직한다. 모든 것의 시원인 태초 우주의 파문. 그 파문은 그런 점에서 나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저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내 안에 있다. 창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이어가는 우주는 시공을 초월해 우리 삶 깊숙이 관여한다. 인간은 그 현실과 함께 자신과 사회, 세계를 조직할 뿐이다.”

“‘확신에 찬 생각의 충돌이 정치적 혼란과 공포를 자아내는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관, 국가관, 우주관이 중요해 보인다. 과거 정치는 국가와 권력의 점유물이었다. 국가적, 파당적 투쟁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봤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시민의 시선에서, 열린 시민적 가치가 정치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시각이 힘을 얻는다. 개별 시민의 자유로운 표현과 자기 강화, 더 나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공감과 연결. 그런 시민적 가치가 새로운 추세로 떠오른다. 두 권의 책이 이와 관련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로베르토 웅거의 <주체의 각성>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이를 위한 각성의 문제를 다룬다. 마사 누스바움의<시적 정의>는 우주적 상상력과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문예의 힘에 주목한다. ‘기술적 사유와 원리’, ‘현실의 틀과 관성’에 경도된 법과 정의, 정치의 지평을 넘어설 ‘인간 지혜’를 말한다. 현실에 만연한 인간적 고통과 정치적 편견을 덜어내기 위해 필요한 논제들이다.”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whanyung@joongang.co.kr]

201503호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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