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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개] 잊혀진 전쟁의 기억… 생생한 사진기록 

포연 속 개마고원 기도는 간절하다 

글·사진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령
미국 적국 노획문서에서 들쳐본 1950년 즈음의 한반도 파노라마 … 봉인해제되지 않은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무더기로 미국 내에 방치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은 6·25전쟁이 올해로 65주년을 맞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를 입수, 분석해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전쟁 당시의 실상을 담은 사진을 상당수 확보, 그 일부를 월간중앙을 통해 처음 공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 국토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우리에게는 사진을 찍거나 기록을 남길 여유가 없었다. 엄동설한에 가족을 이끌고 피란길에 나서야 했던 그 시대의 고단한 여정은 단지 사라져가는 세대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을 뿐이다.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거지 차림의 아이들, 포연이 쓸고간 자리에 경건하게 종교 의식을 치르는 군인과 민간인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배 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군번 없는 용사들…. 한반도의 1950년대 초반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면들로 가득했으나 이를 기록한 사진은 태부족이다.


이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은 주로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의 통신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전쟁 기록사진 촬영이지만 길에서 만난 처참한 민간인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셔터에 손이 올라갔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사진들은 필자가 2012년과 2013년 미국에 직접 건너가 수집해온 것들이다. 주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미 육군군사연구소의 서류 더미를 뒤져 찾은 원본을 촬영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전 세계 근·현대 자료의 보고(寶庫)다. 1770년대 노예 선박, 로키산맥에서 찍은 인디언 부족, 나폴레옹 서명이 들어간 서류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록물과 일본 항복 문서까지 미국이 모은 사진 자료가 보관돼 있다.

미국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체 분량조차 추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의 한국관련 자료가 이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만 해도 숱한 영상·사진 자료가 지하의 자료실이나 ‘기타’라고 이름 붙여진 캐비닛에 분류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다. 미국엔 그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자료지만 우리에겐 ‘잃어버린 역사의 일부’다.


이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오래전부터 6·25전쟁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왔다. 특히 2013년부터는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 육군군사연구소(워싱턴 DC)를 비롯해 미 전쟁대학연구소(펜실베이니아), 미 특수전사령부역사실(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전역으로 수집 범위를 넓혔다.

미국에서 촬영해온 사진들 중 3분의 2 이상이 출처나 시기가 없다. 사진 속의 부대마크나 인물 뒤의 건물, 간략히 기록된 부대명을 보고 퍼즐 맞추듯 역사적 장면들을 하나하나 규명해나가야 한다. 50년대 한국의 역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 점차 본연의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1. 전쟁통에 길 잃은 아이들(사진1-1~4)


고아, 거지, 전쟁통에 동생을 돌보는 아이의 사진… 언제 보아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전쟁이 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다.

미 국립문서관리청에 있는 6·25전쟁 사진 중 아이들의 사진은 상당히 많다. 당시 공식 기록사진을 촬영하던 이들은 미 극동군사령부 통신대 소속의 부사관 혹 병사였다. 사진기를 들고 전장을 누비면서 내일이면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모를 아이들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심정은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발생한 고아의 수는 남북을 합쳐 10만 명을 웃돌았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먹을 것이 풍부한 미군부대 주변에 머물며 목숨을 연명했다. 전쟁 발발 직후 등장한 대부분의 고아원도 미군이 세웠다.


미군과 6·25전쟁 당시 고아들에 관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1950년 11월, 북한으로 북진했던 미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진해야 했을 때, 미군은 부대 주변에 모여든 고아들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했다.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중공군에 밀려 쫓기는 입장이 된 미군은 고아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미 제5공군 군종목사 러셀블레이즈델 대령은 수송기에 고아 1500명을 태워 남쪽으로 이동시킨다. 그는 후일 이 문제로 징계를 받기도 한다.

2. 1·4후퇴 당시의 참상과 체념, 초월(사진2)


1951년 1·4 후퇴 당시의 사정을 이 사진 만큼이나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진도 드물 듯하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인근 변두리에서 촬영된 것이다. 죽음마저도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체념과 초월이 묻어난다.

전쟁의 와중에 피란민들의 삶은 따로 돌봐줄 이 없는 각박함 그 자체다. 피란민의 삶은 인류가 역사 속에서 겪은 모든 비극이 하나로 응축돼 있다. 혈족과의 생이별, 기아와 공포, 삶과 죽음의 기억은 한 개인의 생애를 뛰어 넘어 집단의 기억으로 각인되면서 두고두고 사회의 상처로 남는다.

이런 사진은 이때를 체험했거나 적어도 피란과 관련된 일들을 들으며 자란 세대가 지나고 나면 다시 그 배경의 역사를 밝혀 적을 일이 요원하다. 관심도가 점점 낮아지기 때문이다. 남들은 재미로 넘겨보는 사진을 필자가 돋보기로 확대해보기도 하고 만나는 고령의 어르신이나 참전 할아버지들께 본 일이 있느냐고 여쭤보는 이유이다.

죽음과 가난에 초연해진 인간의 모습을 대하기란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6·25전쟁을 기록한 사진에는 피란민, 전쟁고아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발굴하고 선별하여 분석하는 게 나 같은 1차 사료 담당자의 임무이지만 작업 후에는 트라우마가 생긴다. 악몽을 꾸거나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찾아든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사진과 글에 파묻히다 보면 실제의 삶에서 유리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찾아낸 자료로부터 일정한 심리적인 거리를 두는 게 사료 분석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노하우라고 하겠다.

3. 출처와 시기 알 수 없는 사진들(사진3-1~2)


컬러로 된 이 사진3-1은 일제 강점기 서울 인근의 어느 가톨릭 학교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 기법이나 복색을 보아 시기는 19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새로 발견한 사진 중에는 이런 것(사진3-2)도 있다. 사진의 뒷면에는 ‘항복한 북한 소년군을 심문하는 모습’이라고만 적혀 있다. 어린 소년까지 전투에 투입했음을 감안하면 1952년 이후일 것이고 복장의 상태를 보아 1953년 여름 무렵이 아닐까 판단한다. 고지전이 반복되던 시기였고, 미군은 소년들로부터 부대의 성격, 규모, 지휘관 성명 같은 기본적 정보나 전선 후방의 지휘부나 전투 근무지원 시설을 알아내려 했을 수도 있다.

4. 죽음의 탈출을 앞둔 장진호 인근의 예배(사진4)


전쟁 중에도 신앙은 계속된다. 1950년 10월 함경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의 하갈우리에서 미군 군종의 집전 아래 예배를 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다. 장진호는 1950년 미군 1만5천 명이 1950년 12월 혹한의 추위 속에 12만 명의 중공군 포위망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장진호 전투 직전의 평화로운 예배 장면이다.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공산 치하에서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 지붕과 내벽의 일부가 허물어진 예배당 안으로 따스한 햇살이 밀려들고 있다. 집전을 하는 이는 제7 해병 연대 소속 존 크레이븐 군종 목사다. 그는 살아 있는 미 해병대 역사라고 불린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이오지마섬에 상륙, 미군기를 게양할 때 그곳에 있었다. 6·25전쟁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했으며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는 장진호 전투에도 참전했다. 미 해병대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에 가장 오래 있었고 그런 그를 보면서 부대원들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측의 목사도 보이는데 이인섭이라는 이름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교회는 1910년도에 캐나다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졌을 뿐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이 교회의 이름은 ‘하갈우리 장로교회’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5. 최초의 한글판 컬러 만화 ‘예수의 일생’(사진5)

최초의 한글 컬러 성경 만화다. 6·25전쟁 시기 한국 포교용으로 작성됐다. 당시 미 제1군단 군종부에서 만든 것이며, ‘천주(하나님), 천신(천사)’ 등의 표현으로 보아 가톨릭 군종이 주체가 되어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36쪽의 분량으로 예수의 탄생과 그가 행한 기적과 언행, 죽음과 부활을 간략히 다루고 있다.

한글판 컬러 성경 만화는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이며 원본은 미국에 있다.

이런 자료를 찾는 경위는 대부분 우연이다. 매일매일의 예배 참여 인원, 군종 관련 회의 결과 등을 빼곡히 기록한 수천 장의 보고서 틈에서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찾아냈다.

6. 북한 내륙에서 작전중인 8240부대(사진6-1~4)

6.25전쟁 당시 미국은 심각한 정보부족으로 고전했다. 앞서의 전쟁들과는 달리 미군 내에는 전장(한반도) 전문가가 없었고 한국인과 외모가 확연히 구분돼 요원들을 북파하지도 못했다. 대안으로 찾은 게 북한 출신들을 북에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마침 남한에는 전쟁 발발 전후에 북한이 싫어 남한으로 탈출한 반공집단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지주이거나 엘리트 출신이었고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지자 자생적으로 유격대를 만들어 북한군을 소규모로 타격하고 북한 지역으로 침투해서 후방을 교란했다. 1951년 초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유엔군 소속의 유격대로 편제해 무기·장비·탄약 등을 지급했다. 이 부대가 바로 8240부대로 일명 캘로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미군이 운용한 비정규 한국군이다. 8240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소속이기도 했고 동시에 유엔군 소속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엔유격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8240부대의 주요 임무는 적진에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고 요인을 납치, 암살하거나 적의 중요시설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주로 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으로부터 탈출, 망명한 사람들을 요원으로 선발했다. 부대원이 많을 때는 3만2천 명에 달했다. 미군으로부터 체계적이고 고난도 훈련을 받았으며 실제 작전의 성과도 매우 혁혁했다. 고향 땅을 되찾고 두고 온 북의 가족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노스캐롤라이나 페이엣빌에 있는 미 특수전사령부는 역사실에 자신들의 모체 부대 중 하나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8240부대를 내세우고 있다. 8240부대가 펼친 작전은 미 특수전 관련 교범과 교육 교재에 인용돼 오늘날 세계 최강의 미 특전사 정신의 근간을 이룬다.

사진6-1은 북한 내륙의 어느 산에서 작전 중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북한으로 침투할 때는 어선을 타고 해안으로 들어가거나 미 공군의 협조를 얻어 공중침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요 활동 지역은 내륙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대부분 지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필요한 첩보를 얻은 뒤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적에게 사살되기도 하고, 복귀가 어려워지면 돌아오는 대신 북한의 군수기지, 곡식 창고, 관공서 등을 파괴하고 자신도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수많은 8240부대원이 북한의 내륙에서 작전을 폈지만 이 사진에서처럼 미군이 포함된 적은 거의 없다. 현지의 사정을 잘 몰라 작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포로가 되었을 때 구출할 수 있는 길도 막막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미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미 특수전사령부 역사사료실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미 특수전사령부는 외부인의 출입을 단 한번도 허용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접근할 방법을 찾다가 미 특수전사령부의 6·25전쟁 기념 행사일을 확인, 담당자에게 사전에 연락을 취했고 정복을 입고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전쟁에 사용된 장비와 참전 군인들의 휘장도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다. 사진은 당시 유엔유격군(UN Partisan Forces-Korea) 즉 8240부대원들이 착용했던 휘장(사진4)이다. 앳띤 얼굴의 군인(사진2, 3)은 8240 부대 소속의 소년 유격병들이다.

7. 대북 침투시 사용했던 위장 어선과 부대(사진7-1~3)


전쟁 당시 북한에 침투하여 첩보를 입수하거나 공산군의 주요 거점을 타격할 때 사용한 어선(사진7-1). 1952년 겨울로 추정된다. 어선을 조종하는 이들은 실제 이 일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었다. 물때나 조류를 잘 아는 이들만이 새벽 어스름이나 한밤중에 조명 없이 남과 북을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유격군 소속의 울프팩(늑대들)부대가 백령도에서 교육 훈련을 받는 모습으로 추정되는 장면(사진7-2, 3)도 카메라에 잡혔다. 울프팩(늑대들), 레오파드(표범) 부대는 처음에는 자생적으로 유격부대를 만들어 북한군을 습격하거나 소규모 약탈을 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장비, 물자 지원을 받은 이후에는 부대 지휘체계를 갖추고 정교한 작전계획에 따라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의 작전 성과가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미 육군군사연구소는 6·25전쟁 도중 이들의 작전을 따로 연구한 보고서 ‘6·25전쟁에서의 유엔유격군’을 내기도 했다. 360여 쪽에 달하는 이 연구보고서는 후일 미 특수전 야전교범의 참고 교재가 되기도 했다. 미 육군군사연구소가 작성했다. 표지에 나오는 ‘8086 Army Unit’은 미 육군 군사 파견대(Military History Detachment)를 의미한다. 전쟁 당시 사단 혹은 연대별로 한 명씩 파견되어 전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역사가의 관점에서 기록했다.

8. 영흥만 방어계획 문서(사진8)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는 ‘적국 노획문서’ 라는 파일이 있다. 미국과 전쟁을 벌인 국가의 문서들이다. 통상 RG242(Record Group 242)이라고 불린다. 적을 패퇴시킨 후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해당 국가로부터 군사를 포함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모든 문서와 기록을 수집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독일, 태평양 전쟁기간의 일본으로 수집한 방대한 분량 RG242가 가장 유명하다. 이들은 현재 각각 해당 국가로 원본이 반환되었고 사본만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돼 있다. 사본을 제작하고 사본의 보존·관리·검색을 위한 시스템의 마련과 관련된 예산을 해당 국가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원본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여기에는 6·25전쟁 기간 북한으로부터 수집한 문서들도 있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열차 객실 세 칸 정도에 해당한다. 문서나 기록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어지간한 식탁 크기 두 배 만한 교육용 걸개그림도 상당수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적국 노획문서군의 문서 중에는 북한이 치밀히 준비한 각종 전쟁 계획과 교육훈련에 사용한 책자가 많다. 북한은 1947년부터 소련 군관들로부터 전투 준비에 필요한 각종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교육용 자료의 작성은 2차대전에 참전했던 소련의 백전노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러시아어와 한글 병용으로 작성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한글로 번역돼 북한군 장병들에게 제공되었다. 특히 영흥만 방어계획은 호를 구축하는 방향과 원칙, 기관총과 철조망 설치의 방향까지 세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의 6·25전쟁 도발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당대 최고 군사강국의 하나였던 소련에 의해 모든 것이 뒷받침된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과 같은 곡해된 그리고 악의적으로 의도된 주장이 역사를 왜곡하고 국론을 분열시켰다. 그러나 적국 노획문서고의 수많은 북한 자료는 그러한 주장들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한다. 객관적 자료만이 왜곡된 역사를 정정할 수 있다. 미국 공공기관에 산재한 북한의 방대한 자료들을 한시바삐 국내로 환수해야 한다.

9. 비운의 유재흥 장군(사진9)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유재흥 장군(가운데)의 사진이다. 그는 6·25전쟁 발발 초기 제7보병사단장을 시작으로 제2군단장, 제3군단장 시절 맡은 부대가 모두 전투 중 붕괴돼 퇴각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전쟁 당시 지휘관의 지휘 조치 이면에 실제 어떤 고려사항이 있었는지는 이제 와서 알 수 없지만, 군인은 전쟁 승패로 결과를 말하는 법이다. 그는 특히 6·25전쟁사에서 가장 궤멸적 패퇴를 당했던 ‘현리 전투’에 투입된 제3군단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이 전투 끝에 미 밴플리트 장군이 제3군단을 해체했고, 한국군 작전지휘권도 미군으로 넘어갔다. 사진 속 유 장군의 팔 왼쪽의 부대마크로 보아 2군단장 재직시절로 추정된다. 맨 왼쪽이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다.

최근 이 ‘현리 전투’는 당시 한국군 사단(제3, 5, 7, 9보병사단)의 전투보고서에 기반하여 실체적으로 다시 검토됐다. 그 과정에서 당시 공산군의 압도적 물량공세와 연합군의 방어선 위치 선정 부적절 등으로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작전에 물리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의 지휘관들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잘못을 했다. 장병들의 증언록을 보면 일부 지휘관은 병사보다 먼저 전선을 먼저 이탈했고, 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이 지휘소를 한참 벗어나 후방인 하진부리까지 헬기를 타고 이동하기까지 했다.

10.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박스(사진10)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면 이와 같은 박스에 사진, 문서들이 담겨서 나온다. 이 속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연구자의 역량이지만 운도 크게 작용한다. 시간을 투자해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십 박스를 뒤져도 원하던 자료를 구경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스는 트레이에 담겨 나온다. 담당 사서에게 주문을 하면 대략 7~8개 절차를 거쳐 연구자의 손에 트레이가 인계된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열람실 내부에서는 문서 외의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신청한 박스에는 정보가 적혀있는 ‘슬릿’이라고 부르는 용지가 붙어 있다. 이 용지는 다음 번에 같은 자료를 요청할 때 기준이 되는 문서이기도 하고, 해당 문서나 사진의 도난, 훼손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 글·사진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령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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