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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4)] 조선(朝鮮)의 혈맥 천자(天子)의 제국을 다스리다 

‘조션인(女真族)’ 출신 태조 주원장, 몽골·고려의 핏줄 받은 영락제 한족(漢族)의 제국 명나라 황통(皇統)에 조선민족의 뿌리가 승계돼 17세기 몽골의 석학 룹상단잔의 <황금보강(黃金寶綱)>에서 밝혀 

전원철 미국변호사, 법학박사
지나인(支那人)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한족(漢族) 왕조’라며 한(漢)·당(唐)과 함께 특히 자부심을 갖는 왕조가 있다. 주원장이 세운 명(明)나라다. 명에 관한 이런 믿음은 과연 가당할까? 필자는 뜻밖에도 명을 세운 주원장과 그의 아들이자 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가 조선민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나?

▎1420년 완공된 명청기(明淸期) 황궁인 자금성. 필자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과 그의 아들이자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조선민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중국인’이라고 부르는 지나인(支那人)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특히 자랑하는 3대 왕조가 있다. 한(漢)·당(唐)·명(明)이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왕조 중에서 이들 세 왕조만큼은 자기네 선조인 이른바 ‘한족(漢族)’이 지은 왕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오늘날 중국은 인구의 약 95%를 차지하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 이들 왕조는 특히 ‘중국(中國)’의 판도를 크게 넓혔고, 주변국을 속국으로 거느리며 세계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자랑한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1368~98)은 <토원격문(討元檄文)>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되찾자(驅除胡虜 恢復中華)’고 내세웠다. 이를 근거로 지난 세기 초에 손문(孫文)은 1906년 <민보(民報)> 창간주년 경축대회에서 “명 태조는 몽골을 쫓아내고 중국을 회복해 민족혁명을 이루었다. (…) 이는 민족의 국가이고 (…) 우리 한족 4만 만인 최대의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청 타도를 외친 손문이 선례로 든 주원장은 중국인들로부터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왕조를 세운 정치가’로 존경받는다. 자신들과 같은 ‘한족’ 출신인 주원장이 막북의 “오랑캐가 중국으로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는 것(夷狄入主中國)”을 몰아내고 ‘한족’ 주체의 중원(中原)을 회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한족은 사실 오랜 세월 선비(鮮卑)·오호(五胡)·거란(契丹)·조션(女眞)·몽골·만주(滿洲)족 등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수민족’의 지배다. 때문에 ‘한족’은 늘 이들 소수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길 기도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한족들은 역사적 열등감이 강하다. 이런 민족적 열등감의 발로가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주원장은 ‘한족(漢族)’ 아닌 ‘조션인(女真人)’


▎1.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는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 주원장은 중국인들로부터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왕조를 세운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 2.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조카 건문제가 공격해오자 난을 일으켜 황제가 됐다.
그런데 지나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한족이라고 여기는 주원장은 사실 한족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원장은 오히려 손문 등이 몰아내려 했던 청나라 황가와 같은 뿌리를 가진 조션족(女真族/여진족)이다. 게다가 주원장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명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주제(朱棣)는 사실 주원장의 아들이 아니다. 원(元) 순제(順帝)의 아들이자 ‘고려(高麗) 공비(碩妃)’의 아들로, 한족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영락제 당시 명나라는 조선민족의 뿌리를 가진 황제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조선인 권비와, 조선인 환관들이 궁정을 가득 메운 제2의 조선(朝鮮)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 지나인들은 주원장, 특히 영락제 이후 정례화된 ‘조선 공녀’와 ‘조선 환관’은 조선이 보낸 공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정반대다. 명 황제들이 황가의 혈통을 잇고,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엔 여자가 없었을까? 그럼에도 수천 리 멀리 떨어진 조선에서 여인을 데려다가 황후·비빈으로 삼은 진짜 이유다. 결국 황제는 물론 그들의 황후·비빈과 측근인 환관들까지 조선민족이었다는 점에서 명나라는 조선민족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셈이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 속으로 좀 더 들어가보자. 우선 오늘날의 ‘한족(漢族)’과, 원·명대의 ‘한인(漢人)’의 차이부터 살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원장은 분명 원·명대의 ‘한인’ 출신이 맞다. 문제는 이 ‘한인’이 오늘날 중국인들이 말하는 ‘한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족’이라는 말은 반청 혁명인사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만주’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반면 원나라 말기 주원장이 살던 시대의 ‘한인’은 원말 도종의(陶宗儀)가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에서 말한 ‘한인8종(漢人八種)’의 한인을 이르는 말이다. 도종의는 “한인은 여덟 가지(漢人八種)인데, 거란(契丹)·고려(高麗)·조션(女真)·주인타이(竹因歹)·솔고타이(術裏闊歹, 조선씨)·조콘(竹溫)·주이타이(竹亦歹, 대대로씨)·발해(渤海) 등으로, 발해는 조션(女真)과 같다”면서 이들을 한데 모아 ‘한인8종’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주원장은 바로 이 ‘한인8종’의 한 부류인 ‘조션인’, 즉 여진족(女真族) 출신이다.

한편 이 시대 가장 미천한 4등급 종족이었던 양자강 이남의 ‘지나인’은 ‘거란의 남쪽 백성’이라는 뜻의 ‘낭기아드’, 한어로는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당시의 호칭에 따르면 고려(高麗)·조션(女真)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한인’이고, 정작 오늘날 지나인들이 말하는 ‘한족’은 ‘남인’들로, 월남-라오스-타이계와 같은 종족인 ‘다수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제 주원장의 종족적 기원을 따져보자. <명사(明史)>에 따르면 주원장의 선조 가문(先世家)은 패(沛)에 있었으나, 구용(句容)을 거쳐 사주(泗州)로 옮겼다. 주원장의 아버지 세진(世珍)은 다시 호주(濠州)의 종리(鐘離)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주원장이 태어났다. 오늘날의 안휘(安徽)성 종리(鐘離)다. 다만 그가 어느 종족인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흥미롭게도 주원장의 출신에 관해 “그의 선조가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삼척(三陟)에서 태어났다(明太祖之先 出於三陟)”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덕무가 장연(長淵) 부사 신경준(申景濬)이 쓴 <동문고(同文考)>에 자기의 말을 덧붙이면서 다소 해학적으로 한 말이므로 그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또 전라도 해남지방에는 주원장의 선조 묘가 있다는 전설이 있고, 소설 <장백전(張白傳)>에는 주원장이 장백저저(張白姐姐)의 오빠라고 하거나 <춘향전(春香傳)>도 주원장이 경상도 웅천(熊川)의 주천의(朱天儀)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들 역시 지어낸 이야기인 만큼 신빙성이 부족하다.

좀 더 학문적으로 들어가 보자. 17세기 중엽 몽골의 석학 국사(國師)로, 칭기즈칸의 선조에서 후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서를 쓴 룹상단잔이 1651~76년에 쓴 <황금보강(黃金寶綱>은 놀랍게도 주원장이 ‘여진인(女真人)’이라고 전해준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황금보강>은 우선 원나라의 붕괴 과정을 짤막하게 소개한다.

진실은 ‘정사(正史)’에 있지 않다


▎1. 명나라의 환관(宦官)이자 무장인 정화(鄭和)의 석상. 영락제는 정화를 서쪽으로 보내 아프리카 대륙까지 원정하게 했다. / 2. <명사(明史)>의 바탕이 된 만사동의 <명사고(明史稿)>. 붉은 글씨는 정치적 수요로 인해 편찬 과정에서 고쳐 쓴 부분이다.
“(…) 그 후 원숭이해에 토곤 테무르 우하안투 카안(원 순제)이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에서 대위에 올랐다. (…) 칭기스카안으로부터 토곤 테무르까지 카안들은 사꺄(Sakiya)파의 라마를 믿었다. 우하안투 카안은 티지 입슈드 루(Tidshi Ibshud Lu) 라마의 말을 듣지 않았고, 또 팍스바(Pagva) 라마의 서약을 깨뜨렸다. 그가 쿠빌라이 세첸 카안(원 세조)이 지은 대도를 잃은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다.”

<황금보강>은 이렇게 우하안투 칸, 곧 원 순제가 나라를 잃게 되는 이야기를 전한 뒤 이 무렵 태어난 주원장의 비밀스러운 출신배경에 대해 기록했다.

“우하안투 카안 때 한 여진인 늙은이가 조주(Joju)라는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집에서 무지개가 솟아올랐다.”

바로 이 ‘한 여진인 늙은이’의 아들로 태어난 ‘조주’가 만주어본에는 ‘주거(Juge)’라고 되어있다. ‘주(朱, Jou)’라는 말의 몽골어 형태인데, 바로 대명국(大明國) 태조 주원장이다. 결국 주원장은 ‘여진인’이다.

이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명의 3대 영락제가 된 주제(朱棣)의 뿌리를 살펴볼 차례다. 주제는 주원장 의 장자인 주표( 朱標, 1355~92)의 아들로, 명 2대 황제인 혜종(惠宗) 주윤문(朱允炆, 1377~1402?)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1406년 오늘날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궁전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재 등록물인 북경고궁(紫禁城/자금성)을 지었다. 영락제 이후 명·청의 24황제가 이곳에서 천하를 호령했다. 또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를 서쪽으로 보내 아프리카 대륙까지 원정하게 했다. 심지어 일부 사람은 콜럼버스보다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한 위대한 황제라고 본다.

그러나 영락제는 궁정혁명 과정에서 조카에 이어 수천 명의 신하를 숙청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주체는 위대한 황제라고 칭송받으면서도 가혹한 황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명사(明史)>는 영락제 주제를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기록했다. 하지만 <명사>가 ‘정사’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올바르게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른바 <사(史)>로 불리는 정사들은 전 왕조를 무너뜨린 다음 왕조에서 자신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로는 상당한 역사왜곡을 하기 때문이다.

<명사> 역시 마찬가지다. <명사>의 개편 이력을 밝힌 ‘수사조의(修史條議)’ 61조는 만사동(萬斯同)이 완성한 <명사고(明史稿)> 416권을 웅사리(熊賜履)가 바치자 “강희제가 읽어보고는 기뻐하지 않아 내각에 넘겨 자세히 보게 했다(上覽之不悅, 命交內閣細看)”고 기록했다. <명사고>는 <명사> 편찬의 바탕이 된 책이다. 실제로 현전하는 <명사고>에는 붉은 글씨로 고쳐 쓴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명사>는 이후로도 90여 년에 걸쳐 4단계의 편수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처럼 때로는 정사가 밝히지 못하는 진실을 야사나 개인의 문집 등이 밝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락제의 탄생 비화도<명사>가 아니라 <황금보강>이라는 책에 더욱 신빙성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황금보강>은 영락제가 주원장의 아들이 아니라, 놀랍게도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우하안투 칸)과 그의 한 황후(카탄)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서 원 황제의 아들인 영락제의 자손들이 대명국(大明國) 황제로 국통(國統)을 이어나갔다고 기록했다.

영락제는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의 아들?


▎1. 영락제가 생모 공비(碽妃)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대보은사(大報恩寺). / 2. 청대의 학자 주이존(朱彝尊)의 초상.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주이존이 쓴 <명시종(明詩綜)>의 기록을 인용해 공비가 영락제의 생모임을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황금보강>은 영락제의 생모가 주원장의 한황비인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의 아들이라고도 전한다. 주원장의 ‘공비(碽妃)’가 고려 여인이라는 말이다. 이 기록은 이덕무(李德懋, 1741~93)의 <청장관전서> 60권, ‘앙엽기(盎葉記)’ ‘공비(碽妃)’ 편에 나온다.

“원말 명초 ‘조선(朝鮮)의 여인들’을 뽑아다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원 순제의 셋째 비(妃) 기씨(奇氏)도 비가 된 뒤 성(姓)을 솔랑가(肅良哈/숙량합의 옛 몽골어로 ‘고려’를 뜻하는 ‘솔롱고스’를 말한다)로, 이름을 완자홀도(完者忽都)로 고쳤는데, 고려 사람(高麗人) 총부산랑(摠部散郞) 자오(子敖)의 딸이었다. (…) 명 초기에도 이런 풍조가 고쳐지지 않고 인습되어 효릉(孝陵, 주원장)에게는 공비(碽妃)가 있었고, 장릉(長陵, 영락제)에게는 권비(權妃)가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는 이어 “이는 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중국으로 들어간 사적의 대략인데, 공씨(碽氏)의 사적이 더욱 기이하여 다른 나라에서 아는 자가 적기 때문에 지금 표명하려 한다”고 서술하고는 청나라의 학자 주이준(朱彝尊)이 지은 <명시종(明詩綜)>의 기록을 인용해 공비가 영락제의 생모임을 밝혔다. 영락제는 항상 “짐은 고황후(高皇后) 마씨(馬氏)의 넷째 아들”이라고 자칭했으나 사실은 공씨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명시종>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심현화(沈玄華)의 ‘삼가 남경 봉선전에서 제사를 올리다’라는 시가 있는데 ‘(…) 고황후는 고황제를 짝하여 황제의 장막의 신(神)이 깃드는 [남향]으로 모시고 여러 비빈은 동쪽 줄에 모셨는데, 공비만은 서쪽에 모셨으니 성조(成祖)가 그 생모(生母)를 중히 여겨 공비의 덕 높이 드러냈네. 한 번 보는 것이 천 번 듣는 것보다 다르니 실록인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시로 그 전고를 서술해 둠은 후세사람들의 의혹을 없애려 함이라’ 하였다.”(기록에 등장하는 심현화는 가흥(嘉興) 출신으로 벼슬이 대리소경(大理少卿)에 이른 사람이다.)

이덕무는 특히 <명시종>의 기록에 대해 “주이준도 사관(史官)으로 있었으니, 그가 근거를 살펴본 것(考據) 역시 정확하여 믿을 수 있으므로, 고황후가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는 말은 반드시 그만한 소견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태상시(太常寺)의 기록이 있고 또 심현화의 시까지 명백하여 의심이 없음에랴”라 하여 공비가 영락제의 생모라는 사실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덕무는 ‘공비(碽妃)’를 조선 여인으로 추정하면서도 왜 그러한 성씨가 조선에 없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만성통보(萬姓統譜)>와 우리나라의 씨족에 관한 책들을 널리 상고해보면, 본래 ‘공(碽)’ 자 성이 없다”며 곧 ‘고려 공비’라는 여인이 과연 고려 여인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공비의 이름이 <태상지(太常志)>에 ‘원(元)나라의 원비(元妃)’라고 적혀 있다”는 몽골인 박명이라는 사람의 말을 빌려 “경신군(庚申君)이 기씨(奇氏)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갔으니, [고려(高麗) 공비(碽妃)가] 원나라가 망한 뒤 태조의 비(妃)가 되었다. 명 사신(史臣)이 이 사실을 밝히기를 삼가하여 피한(諱: 휘) 것인지, 아니면 본래 ‘공(貢)’ 자 성을 ‘석(石)’ 자 옆에 붙인 것인지 모를 일”이라며 결국 그녀를 ‘고려 여인’이라고 추정한다.

이덕무보다 25년쯤 후의 인물인 한치윤(韓致奫, 1765∼1814)도 자신의 <해동역사>에서 ‘영락황제(永樂皇帝)의 생모(生母)인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에 관해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장릉(영락제)이 매번 스스로 칭하기를, ‘짐은 고황후(高皇后)의 넷째 아들’이라 하였다. <남경태상시지>에 이르기를, ‘효릉(주원장)의 비(妃)는 다음과 같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고황후(高皇后) 마씨(馬氏), 왼쪽 1위(位) 이숙비(李淑妃), (…) 오른쪽 1위 공비(碽妃), 공비는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를 낳았다’ 하였다.”

“<명시종>에 들어있는 심현화의 시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 이르기를, ‘고후께서 태조황제 짝해 있으니, (…) 여러 후비 동쪽 행랑 자리했는데, 한 비만이 홀로 서쪽 자리하였네. 성조께서 소생모를 중히 여기사, 다른 비빈 덕 나란히 못하게 했네. 한번 보매 듣던 것과 전혀 다르니, 실록인들 그 어찌 다 믿을 것인가. 시를 지어 옛날 사실 서술하여서, 뒷사람들 미혹되지 않게 하누나’ 하였다. …( ) 그렇다면 실록은 사신(史臣)의 곡필(曲筆)에서 나온 것이니, 따를 것이 못 된다.”

‘고려 공비’는 ‘콩그라트 씨 황후’


▎1. 원나라 4대 황제 인종의 콩그라트 씨 출신 라드나시리 황후. 콩그라트 씨는 대대로 원 황제의 제1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다. / 2.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 주윤문(朱允炆). 부친 의문태자 (懿文太子)가 병사해 황태손에 책봉됐다. 태조가 죽자 16세 나이에 즉위했고, 후일 영락제로 등극하는 연왕 (燕王)의 변란으로 제위를 빼앗겼다.
이덕무와 한치윤은 영락제의 어머니는 ‘공비(碽妃)’이고, 이 여인은 ‘조선녀(朝鮮女)’라고 명기했다. 영락제의 어머니가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라는 사실을 명나라 사람들이나 이덕무 등 조선시대 실학자들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많은 사료에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명사> ‘후비(后妃)전’은 오직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손귀비(孫貴妃)·이숙비(李淑妃)·곽녕비(郭寧妃) 등 네 여인만 기록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십수 년 전 지나의 한 언론에서도 ‘고려(高麗) 공비(碽妃)’에 대해 보도하자 명나라 황가의 기원이 조선인가 하는 문제로 지나 인민들의 뜨거운 토론이 벌어진 적도 있다. 결국 그들은 논쟁 끝에 ‘원나라 순제의 후비 중 고려 공녀 출신 후비가 주원장의 여러 아내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가 영락제의 어머니가 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중국의 몇몇 사서와 저술, 그리고 조선의 이덕무와 한치윤, 오늘날의 중국학자들까지 모두 ‘고려(高麗) 공비(碽妃)’를 ‘고려의 공녀’ 출신, 즉 고려 여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한자로는 ‘고려(高麗) 공비(碽妃)’라고 쓰기지만, 사실은 몽골어로 ‘콩그라트카탄’이라고 불리는 몽골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답 또한 룹상단잔의 <황금보강>에 있다. <황금보강>은 영락제에 대해 “콩그라트 카탄의 아들 영락제”라고 하여, 그의 생모가 원 순제인 우하안투 칸의 ‘콩그라트 황비(카탄)’라고 분명하게 적었다. 바로 이 콩그라트 카탄이 <남경태상시지>에서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를 낳았다”고 기록한 ‘공비(碽妃)’다.

콩그라트 씨는 칭기즈칸의 부인이었던 부르테 부인을 비롯하여 대대로 원 황제의 제1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다. 한자로 된 <원사(元史)>에는 ‘홍길랄(弘吉剌)’로 나타난다. 이 씨족 출신의 황후라는 뜻의 ‘콩그라트 카탄’은 뜻밖에 우리말에서 비롯한 말이다. 즉 ‘큰고려씨(高句麗氏) 비(妃)’라는 뜻인데, ‘큰(高)’을 비슷한 소리의 한자로 쓰면 ‘콩(碽)’이 된다. 그러므로 ‘콩그라트’는 ‘콩(碽=高)-그라(句麗)-트(氏) 카탄(妃/비)’이다. 이를 줄여 부르면 바로 ‘고려(高麗) 공비(碽妃)’가 된다.

결국 ‘고려 공비’는 ‘기황후’와 같은 시기에 원나라로 간 ‘고려 공녀’가 아니라 몽골의 콩그라트 씨족 출신 황비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고려(高麗) 공비(碽妃)’라고 불렀다. 그녀의 씨족은 자신들이 조선민족인 ‘발해고려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출신 기황후와 함께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우하안투 칸)의 황비였던 ‘콩그라트 카탄’은 어찌하여 명 태조 주원장의 황비가 되었음에도 <실록>이나 <명사(明史)>에 오르지 못했을까? 역시 <황금보강>이 알려준다. 군사를 일으킨 주원장이 원의 수도인 ‘대도’로 쳐들어오자 우하안투 칸과 기황후 등은 성의 북문으로 몸을 빼 북으로 도망갔다. 바로 이때의 일이다.

“정권을 빼앗길 때 우하안투 칸의 콩그라드 카탄은 세 달째 아이를 밴 상태였다. 카탄은 (주원장의 군사를 피해) 큰 물통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 카탄을 사로잡은 주원장은 칸의 자리에 올랐다. 콩그라트 카탄이 생각하기를 ‘일곱 달이 지나 아이를 보게 되면 적의 아들이라 하여 죽일 것이고, 열 달이 지나 태어나면 자기 아들이라고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 ‘굽어 살피사 석 달을 더 보태어 열세 달이 되도록해 주소서’ 하고 하늘에 기도했다. 마침내 하늘이 굽어 살펴 열세 달이 되어 새파란 아이가 태어났다.”

이처럼 영락제(永樂帝)는 아버지의 나라를 빼앗은 조션인(女眞人) 주원장의 아들로 자라면서 평생 생모도 아닌 마황후의 아들 행세를 해야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주원장의 친손자인 족보상의 조카 공민제(恭閔帝) 주윤문(允炆)을 엎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친아들과 의붓아들의 싸움


▎명대(明代)의 자금성.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건설한 황궁이다. 명청(明淸) 시대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명사>는 영락제의 궁정혁명의 이유에 대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 의문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도 역시 <황금보강>이다. 영락제의 궁정혁명의 이면에는 그의 태생의 문제가 얽혀 있다.

“조주(Joju) 홍화 칸(洪武) 황제, 곧 주원장의 ‘키타드 카탄(한인 황후)’에게서 한 새파란 아이가 태어났다. 홍무제는 꿈에서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것을 보았다. 왼쪽(동쪽)의 용이 바른쪽(서쪽)의 용을 물리쳤다. 홍무제는 점쟁이를 불러 꿈의 길흉을 물었다.

‘그 두 마리의 용은 폐하의 두 아들이오. 바른쪽 용은 키타드 카탄의 아들이고, 왼쪽 용은 몽골 부인의 아들이오. 폐하의 칸 자리에 [이 아이가] 오를 운명이오.’

점쟁이의 말을 듣고 홍무제는 ‘다 같이 내 씨앗이기는 하나, 그 어머니가 적의 카탄이었다.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내 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하고 황궁에서 내쫓아 장성 밖에 푸른 성을 짓고 살게 했다.

홍무제는 대좌에 앉은 지 31년이 지나 죽었다. 그의 아들(사실은 ‘아들의 아들’) 공민제 윤문이 칸 자리에 올라 4년이 지난 뒤 콩그라트 카탄의 아들 영락 칸이 자신의 적은 친위병, 요람의 3000의 몽골 백성, 물의 3만 주르치드(여진) 백성, 카라코룸 백성으로 구성된 군대를 데리고 와서는 홍무제의 아들을 잡아 목에 은도장을 눌러 찍고는 내던져버렸다.”

영락제는 홍무 3년 연왕(燕王)에 봉해져 홍무 13년 북평(北平)의 번(籓)으로 나갔다. “칸의 궁전에서 내쫓아 장성 밖에 푸른 성을 짓고 거기서 살게 했다”는 기록은 영락제가 연왕에 책봉돼 북경을 중심으로 한 봉토로 간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비밀스런 태생을 지진 영락제 이후 그의 아들, 손자와 후손들이 자그마치 257년간 중원을 통치했다. 이에 대해 <황금보강>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바로 그 우하안투 칸(원 순제)의 아들 영락 칸이 통치하며 살았다. 키타드 울루스(명나라 한인 백성)는 지당한 우리 칸(곧 원 순제)의 씨앗이 칸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영락대명(영원히 행복할 대명나라)’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궁정혁명에] 힘을 보탠 요람의 3000 우지예드(물길/몽골) 백성에게 300대도, 주르치드(조션=여진) 백성에게는 600대도의 상을 하사했다. 영락 칸은 22년이 지나 하늘로 돌아갔다. 영락 칸의 후손이 11대 이어나간 것은 홍시 칸(洪熙帝)… [8명의 황제 생략], 틴순(타이 순) 칸…이고, 다이민 초틴 틴치 칸은 한 해를 황제 자리에 앉았다. 홍화 칸에서 틴치 칸까지 257년 황제 자리에 앉았다.”

비밀스러운 출생의 비밀을 가진 위대한 황제 영락은 조선공녀(朝鮮貢女)로 후궁(掖庭)을 채웠다. 수 천 리 떨어진 조선에서 12명의 시녀와 12명의 요리사(廚師)를 데리고 온 5명의 여인, 곧 조선(朝鮮) 인우부 좌사윤(仁宇府 左司尹) 임천년(任添年)의 딸 임씨(任氏),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 이문명(李文命)의 딸 이씨(李氏), 호군(護軍) 여귀진(呂貴真)의 딸 여씨(呂氏), 중군 부사정(中軍 副司正) 최득비(崔得霏) 딸 최씨(崔氏)와 명에서 광록경(光祿卿)이라는 재상급 벼슬을 제수받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영균(權永均)의 딸로 공헌현비(恭獻賢妃)가 된 권씨(權氏)가 그녀들이다.

중세 동양3국을 지배한 조선민족(朝鮮民族)의 혈통


▎조선공녀 출신 선묘현비(宣廟賢妃) 오씨(吳氏)의 아들인 명나라 7대 황제 경태제(景泰帝).
나아가 영락제는 주원장과 주윤문 시대의 지나계 환관 3000명을 모두 쫓아내고 조선에서 데려온 환관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영락제의 궁궐은 대문 문지기부터 침실, 황후 비빈이 거처하는 후궁, 궁정 주방 등 곳곳이 시끌벅적한 조선말로 가득했다. 영락제는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 바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이다.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洪熙帝)를 거쳐 손자인 선종(宣宗)은 조선인(朝鮮人) 공녀 출신인 오황후(吳皇后)로부터 명 7대 황제 경제(景帝)를 낳았다. 그 후 명나라 황제 11명은 모두 조선의 피를 받은 경제(景帝)의 후손이었고, 그들 중 여러 황제 또한 ‘조선공녀’를 후비로 삼았다. 조선공녀의 피를 받은 경제부터는 고구려-발해-말갈(몽골)의 부계와 조선여인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황제들이 마지막까지 옥좌를 지킨 것이다.

한편 주원장에게 쫓겨난 원 순제와 기황후는 여전히 몽골을 통치했다. 참고로 원 순제는 고구려-발해 왕가 대야발의 19대손으로 발해의 피를 이은 칭기즈칸의 7대 후손이자, 쿠빌라이 칸의 5대손이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었다.

그 뒤 이 두 사람의 장남인 원 소종(昭宗) 보르지긴 아유시리다르(1338~78, 재위 1370~78)가 북원(北元)의 2대 칸이 되었다. 원의 12대 황제이자 몽골제국의 17대 대칸이다. 소종 역시 고려인 권겸(權謙)의 딸 권씨(權氏)와 김윤장(金允藏)의 딸 김씨(金氏)를 황후로 삼았다. 그 후 북원은 칭기즈칸 가문의 후손이 통치를 지속하다 여진족인 누르하치의 후금에 흡수되었다.

‘말갈(靺鞨, 발해)’의 후손 조션인(女眞人) 주원장은 칭기즈칸의 7대손인 원 순제와 고려 출신 기황후가 다스리던 중원의 원을 북으로 내쫓았다. ‘명(明)’이라는 국명은 그가 ‘발갈(‘말갈=밝을’의 투르크식 발음)’족 출신임을 증명하는 나라 이름이다. 그런데 북으로 쫓겨난 원 순제와 북경에 남은 그의 ‘콩그라트 카탄’, 곧 ‘고려(高麗) 공비(碽妃)’의 아들 영락제가 다시 명나라 황제가 되고, 그 뒤 그의 후손이 257년간 중원을 통치했다.

명나라 황가의 실질적 창시자인 영락제는 결국 몽골과 고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영락제는 또 여러 황비 가운데 자신과 뿌리가 같은 조선 여인 현비(賢妃) 권씨(權氏)를 가장 총애했다. 또 그의 아들과 후손들은 조선 공녀, 실질적으로는 ‘조선에서 뽑아 들인 뛰어난 여인’들을 황비로 삼았다. 영락제의 증손인 경태제 이래 황제들은 조선 여인의 피를 받아 황가를 이었다. 그러다 역시 고구려-발해-금으로 이어지는 조선민족 왕가의 후손인 포고리옹순(고구려 영웅)의 6세손인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명의 ‘니칸’(만주어로 ‘한인’) 정권을 엎고 다시금 중원의 주인이 되어 그 권좌를 지켰다.

결국 당시의 조선·명·북원 등 동양3국의 토지와 인민은 모두 조선민족(朝鮮民族)의 뿌리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통치한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은 명 이후 청나라 때에도 계속된다.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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