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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양비’양정철이 지목한 문재인 정부 핵심실세 20인은 누구? 

당·정·철에 개혁주도 ‘86신주류’ 급부상…한국사회 전 영역에 50대 주도 개혁 드라이브 시동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8일 청와대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식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며 참모들과 함께 차담회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을 말할 때 양정철 전 대통령홍보 기획비서관(일명 ‘양비’)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평소 자신이 문 대통령의 최측근 또는 비선이라 불리는 것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대선 이후 그가 뉴질랜드행을 택한 것도 그런 결벽(潔癖)의 표현이다. 서울 날씨는 여름으로 치닫고 있는데, 뉴질랜드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하고 있다. 정반대의 계절을 가진 나라에서 숨어 지낸다. 신변 정리를 위해 조만간 국내에 들어올 예정이지만, 구체적인 일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 과정에서 ‘양비’의 역할은 지대했다. 지난해 총선 때 김종인 비대위원장 영입 아이디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 다. 이번 대선 승리의 최대 관건이었던 호남 민심 장악 과정에도 그는 깊숙이 관여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낙연 전남도지사, 정순균 전 국정홍보처장과 함께 김정숙 여사를 호남에 거의 상주케 한 것도 그가 기획한 전략 중 하나다. 문재인 후보의 메시지를 받아 핵심인재의 영입에도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양정철의 말은 곧 문재인의 말로 받아들여졌다.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양비가 정권에 진입했다면 제2인자의 자리를 점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양비가 문 대통령에게 2선 후퇴의 뜻을 전한 지난 5월 15일 청와대 만찬에는 양 전 비서관과 김경수 의원, 임 비서실장만 참석했다. 양비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대통령 주재 만찬이었다는 후문이다.

‘양비’가 꼽은 문재인 정부 핵심 20인


▎2007년 참여정부 홍보기획 비서관 시절의 양정철.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큰 공을 세우고도 뉴질랜드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게 됐다.
대선을 8일 앞둔 지난 5월 2일 ‘양비’에게 물었다. 집권에 성공한다면 문재인 정부를 이끌 핵심인사 20인은 누구인가? 그는 실제 인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보안 유지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핵심 20인의 면면을 거론했다.

단체장: 안희정·박원순·이재명

당: 노영민·전병헌·송영길·김부겸·전해철·김진표·김상곤·이용섭

외곽: 조윤제·정의용·김광두·김상조·서훈·조국

참모: 임종석·윤건영·송인배

대선 후 총리로 지명된 이낙연 지사의 이름을 뺀 것은 보안 유지를 위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그 무렵 그가 총리 예정자로 이낙연이 낙점됐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자신의 이름을 뺀 것은 당시로서는 겸양으로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은둔을 암시한 셈이 됐다. 단체장 3인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거의 중용됐다. 당장 기용되지 않은 인사들도 임기 중 특정 시점에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소위 ‘3철’ 중의 한 명인 전해철 의원을 핵심으로 거론한 것, 조국의 중용을 시사한 대목도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전 의원은 법무장관 기용이 유력했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조국의 민정수석 발탁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양비’가 전해철 의원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 흥미롭다.

‘양비’는 임종석, 윤건영, 송인배 등을 핵심참모 3인방으로 거론했다. 예측한 대로 그들은 대통령 비서실장, 국정상황실장, 제1부속실장으로 중용돼 청와대의 안팎살림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노영민은 주중 대사로 가게 됐지만 ‘양비’는 그를 핵심 인사 20인에 포함시켰다. 언젠가는 문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보좌할 최측근 인사로 분류한 것이다. 정권 내부에서 “임종석과 노영민 세력이 언젠간 갈등하고 충돌하게 될 것”이란 전망도 그래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홀연 뉴질랜드로 사라졌지만 ‘양비’가 문재인 정권을 떠난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총선 출마 등 정계 진입 여부는 불투명하다. 지난 3월 <주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정치는 내게 맞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누가 밀어준다 해도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가 2020년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선출직에 나서겠다는데 누구도 그를 말릴 명분은 없다. 집권 후반기 문재인 정부의 레임덕을 관리하는 특단의 임무를 맡게 되리란 관측도 있다. 기획력이 탁월한 그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운영에 조언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집권에 성공한 후 양정철 개인의 거취는 정권 차원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양비의 역할은 이미 임종석 비서실장이 대신하고 있다. 주목할 현상은 임종석 또는 양정철로 대표되는 세대 또는 세력의 부상이다. 19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1960년대 생들이 문재인 정권, 특히 청와대에 대거 포진했다. 소위 86그룹의 등장이다. 50대 초·중반인 이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다. 대학시절 마오쩌둥과 마르크스, 김일성의 저작물을 읽었던 세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래디컬한 이념은 보다 성숙해진 측면도 있지만 여전히 선명한 개혁성향으로 보수진영의 강한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그룹이다.

소위 86그룹의 핵심 광흥창팀


▎문재인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전격 기용된 임종석. 86그룹의 좌장 격으로 문 대통령의 국정 개혁과 운영을 포괄적으로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 대통령 비서실의 인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 9비서관, 정책실장 직속 2비서관, 8수석실 산하 30비서관, 특보와 경호실장 등 모두 66곳이 채워져야 인선이 끝난다. 신원조회와 인사 검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공식 발표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6월 21일 현재 현재 50명의 청와대 참모진이 공식 발표되었거나 내정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다. 그 50명 중 32명이 50대 86그룹의 일원이다. 전체의 65%를 약간 밑도는 수치로 역대 어느 정부보다 50대의 전진 배치 경향이 확연하다.

86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비서관급 직제는 청와대에 모여 있는 국정의 주요 의사결정을 틀어쥔 요직이다. 일부 직책은 수석비서관에 맞먹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박근혜 정권 때까지는 정부 부처에 대한 통제 권한도 막강했다. 과거 정부에선 경찰청장이나 국세청장도 나이 어린 민정비서관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과 한 건물을 쓰는 비서실장 산하 부속비서관·연설비서관·국정상황실장 등에 측근을 임명했다. 송인배 제1부속비서관, 신동호 연설비서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 내정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명 ‘광흥창팀’의 멤버들이다. 광흥창팀의 구성도 ‘양비’가 주도했다. 그가 여의도와 마포 사이를 물색해 지하철 광흥창역과 가깝고 임대료가 저렴한 상수동에 사무실을 정했다고 한다.

양비는 먼저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 윤건영 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등 문 대통령 측근 그룹을 모았다. 여기에 임종석 전 의원 등이 가세했다. 양비가 문 전 대표와 별다른 인연이 없던 임 전 의원을 세 번이나 만나 설득했다. 지난해 연말 안희정 충남지사 경선캠프에 합류한 윤 전 대변인을 제외한 14명을 정치권에서는 ‘광흥창팀’, ‘상수동팀’으로 불렸다. 이 중 9명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비서실장 휘하에 있는 비서관급 26자리 중 8자리를 광흥창팀이 차지한 셈이다. 이들은 모두 19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소위 86그룹의 핵심이다.

86그룹 전직 의원들도 대거 청와대에 입성했다. 전병헌 정무수석실 산하 한병도(17대) 전 의원이 정무비서관, 진성준(19대) 전 의원이 정무기획비서관에 내정됐다. 비서관들 중 선임으로 인정받는 민정비서관에는 백원우 전 의원이 발탁됐다. 백 비서관은 17·18대 재선 의원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초대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도 19대 의원이었다. 이들 모두 개혁성향의 86그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86그룹 중엔 정책실장 직속 정태호 정책기획비서관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대변인을 지낸 인사다. 청와대 정무팀 행정관을 시작으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을 두루 지냈다. 민주당 선대위에선 정책상황실장으로 활동했다.

일자리수석실 산하 고용노동비서관에 내정된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86그룹이다. 앞서 노무현 정부에서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비서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1984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황 비서관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홀로 황 위원 등 3남매를 키웠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한 대학의 청소부로 일하며 월 25만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50대 기수를 전체의 절반 넘게 선임해 일하는 정부를 지향하고, 박근혜 정부에서 핍박받던 인사들을 기용해 개혁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이다. 재야 운동권과 시민단체 출신도 입각시켰으며, 참여정부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인재 역시 상당수 기용했다. 흙수저나 비고시 출신 등 인생 스토리가 있는 인재들을 깜짝 선임했다는 인사 특징도 보여주고 있다.

86그룹의 약진은 청와대와 함께 정부 부처 인선에도 이어졌다. 5월 10일 취임한 이후 6월 14일 현재 총 77명의 장차관·비서관 인사를 단행했다. 정부부처 17곳 가운데 15곳 장관 인선이 마무리됐고 차관 23곳 중에서 20곳도 채워졌다. 연령별로 보면 50대 인사가 전체의 58%인 45명으로 가장 많다. 또 한승희 국세청장 후보자, 김용진 기획재정부 2차관 등 정부부처 차관급 인사에서도 50대가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노태강과 조명균의 화려한 복귀

문 대통령은 지난 보수 정권에서 내몰렸던 관료들도 재등용했다. 6월 9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임명된 노태강 차관이 대표적이다. 노 차관은 전 정부 문체부 체육국장이던 당시 승마협회 감사보고서에 최순실 씨의 최측근인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참 나쁜 사람’으로 지목받아 인사 조치를 당하고 결국 공직을 떠나야 했던 인물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지난 정권 때 억울하게 공직을 떠났다가 두 정권이 지난 후에야 복귀에 성공했다. 조명균 후보자는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로 복귀했으나 전 정권 인사로 낙인 찍혀 보직을 받지 못했다. 2008년 명예 퇴직할 때의 나이가 51세에 불과했다. 그는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말 불거진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으로 제기된 정상 회담 회의록 폐기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져 곤욕을 치르기도했다.

문 대통령이 검찰 내 핵심 요직인 서울중앙지검장에 전격 발탁한 윤석열 지검장도 비슷한 케이스다. 지난 정권 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겨누다 좌천당했으나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검에 발탁돼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윤 지검장은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의 수사팀장을 맡았을 때 항명사건으로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이후 그는 대구고검으로 좌천됐다가 새 정부 들어 검찰 내 최고 요직을 받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더불어민주당 내에도 86그룹 중심의 진용 개편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5월 15일 당직 개편으로 더불어민주당은 김태년 정책위의장, 김민석 민주연구원장 등이 전면 배치됐다. 특히 원내 사령탑의 경우, 전임 우상호 원내대표에 이어 ‘운동권 그룹’의 맏형 격인 우원식 원내대표가 바통을 이어 받으면서 개혁 소장파 의원들에게 힘이 확 쏠리는 모습이다.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홍근 의원이 원내수석부대표에 발탁되고, 건국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강훈식 의원은 원내대변인을 맡으며 운동권 뒷 세대의 몫을 차지했다. 앞서 우상호 원내대표 시절엔 수석부대표와 대변인을 지냈던 박완주·기동민 의원 역시 각각 성균관대 부총학생회장, 총학생회장의 운동권 출신이었다.

86그룹이 국회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다. 우상호·이인영·정청래·최재성 의원 등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은 12명이 대거 당선됐다. “길 가다가 국회의원 배지를 주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이른바 ‘탄돌이’란 이름의 정치인 그룹이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는 “전대협의 힘이 과시됐다”고 자신했다. 국회 개원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이 마련한 청와대 만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것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자만과 독선’은 이후 86그룹에 내내 따라붙은 꼬리표다. 당시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별 어려움 없이 금배지를 달았던 때여서 소년급제의 호승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5월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가인권위 위상 제고 관련 문재인 대통령 지시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계몽주의’ 멘탈에 빠졌다는 비판에 직면

386에서 486, 586으로 연륜은 쌓였지만 86그룹의 행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의 정치를 보여주길 바랐던 시대적 요구와 달리 여러 당대표나 유력 대권주자들 밑에서 주요 당직을 도맡아, 당내에선 ‘하청정치’, ‘숙주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역사적 사명론’에 침윤돼 상대를 항상 가르치려 하는 ‘계몽주의 멘탈’에 빠져 있다는 뼈 아픈 비판에도 직면했다.

86그룹의 ‘후배’ 격인 민주당의 한 의원은 “86세대가 야권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면 재야 운동·학생운동에서 익힌 강점을 드러냈을 텐데 여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집권세력의 보호막 구실을 하느라 독자적 정체성을 드러내긴 어려웠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하청정치 종식’과 ‘386 독자정치화’를 내걸고 이인영·백원우·최재성 후보 등이 뛰어들었던 2010년 당 전당대회에선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기성 정치인들과 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5년 전당대회에서도 당대표 후보로 나선 이인영 의원은 문재인-박지원 양자 구도를 전혀 허물지 못했다.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 86그룹이 한국사회의 핵심으로 등장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연령적으로 50대 초·중반은 연부역강한 세대로 어떤 분야에서나 핵심 의제를 입안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문재인 정부를 둘러싼 86그룹은 이념적으로 강한 진보성을 지닌 채, 지난 정권의 ‘적폐청산’을 외치는 개혁 모드에 들어섰다. 개혁의 전면에는 86그룹보다 한 세대 위인 전문가 그룹이 포진한 형국이나, 진보적 노선으로 담보되는 정책 집행과 실천은 50대 86그룹의 어깨에 달렸다.

이들은 안경환 법무장관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아연 위기감에 빠져 있다. “우회하면 후회한다”고 발언하며 개혁 전선이 흔들리고 있는 것에 강한 우려와 경각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개혁 전선이 무너지면 나머지 개혁 작업도 수렁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험대가 이토록 빨리 찾아올지 그들도 아마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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