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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노인 유튜브에 열광하는 ‘1030’세대 

청춘 팬들이 ‘황혼 세대’를 응원하다 

이태림 월간중앙 인턴기자 rim_ki@naver.com
유튜브 사용 시간 두 번째로 긴 실버 세대, 콘텐트 생산자 주류로 급부상
‘꼰대’라며 노인 혐오하던 젊은 층이 실버 콘텐트 핵심 시청자 역할


▎박막례 할머니는 CJ ENM에서 주최하는 아시아 최대 1인 창작자 축제에 2년 연속 참여해 팬들과 만남을 가졌다./사진:CJ
대학생인 김지원(23)씨는 눈뜨면 유튜브를 켜 어제 올라온 [박막례 할머니] 채널 영상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할머니의 ‘계모임 메이크업’ 영상은 김씨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보라색 아이섀도를 바른 채 계모임에 대해 얘기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어릴 적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가 오버랩된다. 또 박 할머니의 퉁명스럽지만 친근한 말투는 잠시나마 힘든 일상을 잊게하는 안온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김씨는 나아가 최근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큰 인기를 얻는 지병수 할아버지의 [할담비 지병수] 채널도 구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수 손담비의 노래 ‘미쳤어’를 귀여운 율동과 함께 불러 ‘할담비’라는 애칭을 얻었다. 할아버지가 광고를 찍는 모습이 재밌기만 하다. 김씨는 바쁜 스케줄에 무리할까 걱정된다며 건강을 챙기라는 댓글도 남긴다.

김씨가 이처럼 실버 세대가 주인공인 유튜브 영상을 보기 시작한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강아지가 나오는 ‘힐링 콘텐트’류를 즐겨보던 김씨는 친구가 웃기다며 꼭 보라고 공유한 링크를 통해 박막례 할머니 영상을 처음 접했다. 평소에 70대 할머니가 유튜브를 사용한다고 생각지도 못한 김씨에게 영상을 만들고, 거기에 메이크업, ASMR(마음을 편하게 하는 소리나 영상)과 같은 ‘인싸’(인사이더, 인기있는 사람) 콘텐트를 재밌게 소화하는 박 할머니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젊은층이 주도하는 유튜브 세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채널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구독자 수가 10만이 훌쩍 넘는 실버 크리에이터도 속속 등장한다. 1947년생으로 올해 73세인 박막례 할머니의 구독자 수는 무려 85만 명이다. 지병수 할아버지가 전국노래자랑에서 ‘미쳤어’를 추는 영상은 한 달 만에 조회 수 244만을 돌파했다. 65세 농부 안성덕씨가 운영하는 [성호육묘장] 채널의 두더지 영상은 조회수가 422만에 달한다.

눈에 띄는 대목은 실버 크리에이터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청자층의 분포다. 주로 ‘1834세대’(18세에서 34세에 이르는 젊은 시청자)가 주력부대. 실버 크리에이터 대표격인 [박막례 할머니] 채널과 [순이 엄마] 채널 모두 주요 구독층은 1834세대다. [할담비 지병수] 채널의 구독자 역시 60% 이상이 1834세대다. 1834세대는 유튜브에서 실버 채널을 구독해 혼자만 보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거나 재밌는 영상은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팬미팅에 참여하기도 하는 ‘열혈팬’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사회초년생 이수민(27)씨는 82세 김영원 할머니가 운영하는 [영원씨01seeTV] 채널을 즐겨본다. 평소 먹방(먹는 방송)을 즐겨 보던 이씨는 유튜브 추천 영상에 뜬 ‘영원씨’ 영상을 우연히 접하면서 김 할머니의 먹방을 보게 됐다. 가학적이고 자극적인 먹방에 질린 이씨는 할머니의 먹방이 새롭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후로는 퇴근길에 할머니의 음식 ASMR을 보며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이 채널의 가장 큰 매력은 신선함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다양한 콘텐트가 쏟아지는 시대에 ‘노인’이라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1030세대의 문화를 배우고 따라하는 모습이 신선함과 재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80세가 넘는 할머니가 요즘 유행하는 치킨·젤리·킹크랩 등을 먹으며, “맛이 이상하다” “어으~ 맛있다” 등 가끔 내놓는 한 마디에 젊은 시청자들은 까무라친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포도 젤리 먹방 영상은 한 달 만에 조회수 280만을 넘기고, 댓글도 5500개 이상 달렸다. 한 시청자의 “지구에서 제일 귀여운 할머니다”라는 댓글은 무려 3200여 개의 공감을 받았다.

아이돌 노래 부르고, 법률 지식 나누고…


▎[영원씨tv] 채널의 시청자들은 할머니의 화려한 네일과 장신구, 후드티와 같은 젊은 모습에 환호한다/사진:유튜브 캡쳐
지난 3월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손담비의 ‘미쳤어’ 무대로 폭발적 관심을 모은 지병수(77) 할아버지의 영상에도 귀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지 할아버지는 [할담비 지병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아이돌 가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영상을 주로 올리고 있다. 한 대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지 할아버지 관련 게시물에는 “너무 귀여우시다” “웃겨서 오늘 하루 스트레스 다 풀리네” 등의 댓글이 달렸다.

김찬호 교수는 젊은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 나는 노인에게 “귀엽다”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는 현상에 대해 “자신들의 문화를 배우고 따라하려 노력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일종의 ‘기특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버 콘텐트 애청자인 이씨도 “노인 문화를 고집하지 않고 우리의 문화를 배우려는 모습이 젊은 세대에 대한 존중으로 느껴져 더 호감이 간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문화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인기를 끄는 채널이 있는가 하면, 축적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채널도 있다.

박일환 전 대법관(68·사법연수원 5기)은 지난해 12월 자신의 호를 딴 [차산선생 법률상식]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는 “법률·판결 등에 대해 부정확한 보도들이 있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고 시작 계기를 밝힌 바 있다. ‘농담으로 한 회사 그만 둘래 발언 후 퇴직 발령?’ 영상은 한 달 만에 조회수 2만을 넘겼고, 20대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유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관련 게시물에는 “공부에 도움될 듯 바로 구독해야지” “담담한 말투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등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일생을 농부로 살았다는 안성덕씨가 농장 이름을 따 만든[성호육묘장] 채널도 1년도 안 돼 구독자가 12만을 넘었다. 안씨 채널의 ‘성호육묘장 동물 소개’ 영상은 ‘유튜브계의 동물 농장’으로 불리며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 교수는 “원자화된 사회에서 각박함과 불안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노인 세대의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통찰력과 여유로움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실버 크리에이터는 이제 글로벌 명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조 격이자 최고 스타인 ‘박막례 할머니’의 인기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유튜브 CEO(최고경영자) 수잔 워치스키가 한국에 방문해 직접 박 할머니를 찾았고, 5월에는 구글 미국 본사에 가서 구글 CEO 선다 피차이를 만났다. 그 외에도 권상우·최수종·설리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할머니의 채널에 출연해 할머니의 팬이라고 고백한다.

구글 CEO가 한국 찾아와서 만난 할머니


▎안성덕 할아버지의 느긋한 말투와 귀여운 동물이 함께 나오는 영상은 젊은 구독자들에게 ‘힐링 콘텐트’로 통한다./사진:유튜브 캡쳐
할머니를 만나러 관련 페스티벌에도 다녀왔다는 유윤정(26)씨는 “[박막례 할머니] 채널은 종합선물세트”라고 자랑했다. 이어 “할머니의 영상을 보며 음식 레시피를 배우고, 퉁명스러우면서 재치있는 말과 행동에 웃기도 한다. 특히 연륜에서 나오는 조언에 위로를 얻는다”고 활짝 웃었다. 또 다른 실버 콘텐트 애청자 최아라(29)씨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툭 던지는 한 마디에 깊이 공감할 때가 많다”며 ‘정서적 공감’을 시청 이유로 들었다. 최씨는 “‘꼰대’같은 어른도 적지 않은 이 시대에 좋은 조언을 해주는 노인 크리에이터들이 인생의 멘토로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충동구매가 심해도 내 돈 내가 쓰는데 뭐.” “즐검개 살아, 그개 최고야.”

젊은층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박막례 할머니 명언’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인기다. 맞춤법도 틀리고 거창한 메시지도 아니지만, 오히려 무겁지 않아 할머니의 말에 젊은 세대는 감동한다. 심영섭 교수는 “젊은 세대는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을 느끼고, 힘든 현실에 지쳐있다”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낸 노인들의 삶은 젊은 세대가 처한 어려움이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희망적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젊은 세대가 실버 콘텐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힐링’에 있다는 것. 원용진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는 “각박한 삶에서 더 이상 부담을 원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의도’도 없는 노인 콘텐트는 인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튜브의 주류 카테고리의 하나인 당파성 강한 정치 방송이나 빠른 템포의 게임 방송 등과 같이 자극적 콘텐트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일부의 젊은 시청자들이 비교적 느린 템포의 노인 콘텐트로 넘어오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박막례 할머니, 영원씨, 순이 엄마 등 젊은 세대가 주 구독층인 채널에서 자극적인 영상은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이 일상·먹방·춤 등의 잔잔한 영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9년 한국 콘텐츠 전망 중 하나로 ‘실버 프로슈머(prosumer)의 활약’을 꼽았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 IT 기기를 능숙하게 조작할 줄 아는 장년층을 뜻하는 일명 ‘실버 서퍼’가 새로운 콘텐트 소비자이자 생산자로 급부상했다는 분석이다.

50대 이상의 실버 세대가 콘텐트 생산자로서 부상하게 된 배경은 ‘유튜브 사용 시간 증가’에 있는지도 모른다. 앱분석 업체 와이즈앱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기반 스마트폰 사용자의 세대별 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이용자들이 가장 오래 사용한 애플리케이션(앱)은 유튜브였다. 세대별 이용 현황에서 50대 이상의 유튜브 이용 시간은 한 달 79억 분으로 86억 분을 사용한 10대를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50대 이상 이용 시간의 증가 속도이다. 2017년 11월 기준 10대 유튜브 이용 시간 증가폭이 11%에 그쳤다면, 50대 이상의 유튜브 이용 시간은 1년 사이에 2배 늘었다.

실버 콘텐트 계속 증가, 지속적 인기는 글쎄


▎‘할담비’ 지병수 할아버지는 [전국노래자랑] 출연 이후 예능과 광고계를 종횡무진하고 있다./사진:유튜브 캡쳐
이수영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는 “공부와 일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시간이 많은 노인은 다른 세대에 비해 유튜브를 이용할 시간도 많다”고 설명했다. 동영상 애플리케이션인 유튜브는 한번 접속하면 이용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장시간 이용 형태가 많다.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는 다른 세대에 비해 50대 이상이 비교적 장시간 유튜브를 사용할 여건이 되기 때문에 적극적인 소비자이자 생산자로 활동할 기회도 많아졌다. 이 교수는 “노인 세대의 유튜브 이용 시간 증가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IT 기기에 더 능숙한 40대가 실버 세대가 되면 콘텐트 생산자로서 노인 세대의 활동은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버 콘텐트의 인기는 일시적 현상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김찬기 샌드박스 그룹장은 “유튜브 시청자의 특징은 빨리 싫증을 느낀다는 것”이라며 “노인 콘텐트의 인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신중론을 폈다. 쉽게 싫증을 느끼는 유튜브 시청자들에게 ‘노인’이라는 등장인물은 다름과 신선함을 제공해 인기를 끌었다. 최근 인기 있는 실버 콘텐트를 그대로 따라한 ‘짝퉁’ 채널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시청자가 노인을 더 이상 신선하고 새로운 등장인물로 여기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김찬기 그룹장은 “결국 노인이라는 세대적 정체성보다 크리에이터의 실력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단순한 먹방에 편중되는 등 천편일률적이었던 실버 콘텐트는 각 채널만의 특징을 지닌 플롯으로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등장인물의 매력, 트렌디한 소재, 탄탄한 구성은 인기 유튜브 채널의 구성 요소다. 노인이라는 등장인물 자체의 매력도 중요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파악하고, IT 기기를 능숙하게 다뤄 편집으로 탄탄한 플롯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젊은 세대가 주 시청자인 실버 콘텐트의 대부분 영상 편집과 촬영은 거의 손녀·손자와 같은 젊은 세대가 맡는다. [박막례 할머니] 채널은 손녀인 김유라씨가 촬영과 편집을 하며 PD 역할을 한다. [영원씨] [심방골 주부] [할담비 지병수] 채널도 마찬가지다.

원용진 교수는 “촬영과 편집을 젊은 세대가 하다 보니 콘텐트의 소재나 방향도 자연스레 젊은 세대와 코드가 일치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소재를 콘텐트로 만들기 때문에 노인 세대 본연의 모습이나 문화를 접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세대 갈등이 심화되고, 공론장이 부족한 요즘 실버콘텐트의 인기는 세대 간 접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유튜브가 세대 간 괴리를 좁혀줄 접점으로 기능할지 주목된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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