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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논설위원의 인간혁명(마지막 회)] ‘로마식(式) 기본소득’이 실패한 까닭 

‘빵과 서커스’ 즐기는 새 자산 쏠림은 수수방관 

정복 전쟁 지속할수록 자영농 줄고 귀족에 부(富) 집중
오늘날 기술혁명도 0.001% 최상위층의 자산 독점 예고


▎1999년 10월 당시 독일 동베를린 지역의 한 건물에 ‘We were the people(우리는 인민이었다)’이라는 내용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바츠해방전쟁’을 아시나요? 인류 역사에는 늘 권력을 휘둘러 압제하려는 자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민의 갈등이 반복됐습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전쟁과 평화의 사이클 속에서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 왔습니다.

‘바츠해방전쟁’도 마찬가집니다. ‘바츠’라는 곳에서 일반 평민들이 군주의 폭정에 맞서 지배계층을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혁명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내복(內服) 같은 홑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 ‘내복단’ 혁명으로도 불립니다.

당시 바츠의 지배계층은 ‘드래곤 나이츠(Dragon Knights, DK)’라 불리는 기사 집단이었습니다. 바츠의 군주인 아키러스는 DK 계급을 전면에 내세워 바츠 지역의 물자를 독점하고 세율을 올려 평민들을 압박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했고 반항하는 이들은 처참하게 참수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키러스에 반대하는 50여 명의 기사가 성을 급습해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붉은 혁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율을 0%로 내리고 폭정을 끝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키러스의 반격으로 이들의 집권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이후 아키러스의 폭정은 더욱 심해졌고요.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바츠의 시민들 사이에선 조금씩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키러스의 지배력이 약한 지역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급기야 제대로 된 무기와 갑옷도 없이 혁명에 참여하는 시민들, 이른바 ‘내복단’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여 간의 긴 전쟁 끝에 시민들은 결국 아키러스와 DK 세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츠해방전쟁’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봐왔던 수많은 시민혁명의 사례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기존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실제 세계가 아닌 ‘리니지’라는 게임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란 것이죠. 리니지에선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이 기사·마법사 같은 캐릭터를 부여받아 가상 세계에서 실제와 같이 살아가는데, 각 캐릭터를 사용했던 이들이 현실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 가상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2004~2008년 리니지2 게임의 ‘바츠’ 서버에서 있던 실제 사례입니다. 소위 ‘만렙’ 유저들이 DK라는 혈맹을 조직해 게임 속 자원을 독점하자 레벨이 낮은 유저들이 힘을 모아서 이를 타도한 것이었죠. 이들은 기본 아이템으로 제공되는 내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무기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결된 시민의 힘은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데 충분했습니다.

멸망의 조건 불평등


▎2018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얼터드 카본]은 기술 발전의 결과로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는 미래 사회를 그렸다. / 사진:넷플릭스
게임이든 실제 세계든 어느 사회가 전복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양극화와 불평등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해지고, 둘째는 불평등을 자력으로 바꿀 수 있는 계층 이동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 역사에선 14세기 말의 고려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간악한 도둑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규모는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해 산과 강을 경계로 삼았다. 남의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며 주인을 내쫓는 경우도 많았다. 빼앗은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해 각자 세금을 걷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여기서 ‘간악한 도둑’은 권문세족을 지칭합니다. 당시 고려는 이들이 소유한 땅이 워낙 넓어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나눴습니다. 농민들에게 여러 명의 주인이 각자 세금을 걷어갔고 제때 내지 못하면 돈을 꿔주어 고액의 이자를 갚게 했습니다. 그 빚을 갚지 못한 백성들은 노비로 만들었죠. 백성들이 삶이 너무 곤궁 지면서 ‘송곳 하나 꽂을 땅(立錐之地, 입추지지)’이 없다는 말도 이때 나왔습니다.

1451년 조선 문종 때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는 당시의 시대상을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부를 독차지한 귀족들은 과거가 아닌 ‘음서(蔭敍)’를 통해 벼슬을 대물림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세습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했죠. 결국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고려는 멸망하고 맙니다.

불평등의 심화와 계층 이동성의 부재는 비단 과거만의 일이 아닙니다. 현재도 진행 중에 있고 미래엔 더욱 심각해질 겁니다. 특히 4차 혁명으로 불리는 기술의 발전 시대엔 지금보다 양극화·불평등이 더욱 심해질 거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2016년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미래엔 “자본과 능력, 지식을 가진 엘리트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중·하위 계층은 갈수록 불리해져 중산층 붕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습니다.

2017년 발표된 서울대 유기윤 교수팀의 연구는 이 같은 예측을 더욱 구체적으로 뒷받침합니다. 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90년 미래 사회는 크게 4계급으로 나뉩니다. 페이스북·구글처럼 플랫폼과 최첨단 기술을 소유한 기업인 0.001%가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소셜미디어 등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기 정치인·연예인 같은 스타 0.002%가 두 번째 계급을 형성합니다.

그다음은 사회 전반의 일자리를 대체할 인공지능(AI)이 3계급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 즉 99.997%는 단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죠. 이들은 사회 일자리의 대부분을 AI에 빼앗기고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노동의 종말 시대를 맞이한 인간은 국가가 제공하는 ‘가짜 직업’과 ‘기본 소득’으로 연명할 가능성이 큽니다.

1계급은 전체의 0.001%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사람이 속해 있는 플랫폼을 통제하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극단적 양극화 사회가 올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는 “AI의 등장으로 2030년엔 전 세계에서 20억 명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불평등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대다수의 사람은 실업 상태로 전락하거나 단순 노동자가 될 거란 이야기죠. 이러한 99.997%의 다수를 최근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말로 부릅니다. 플랫폼과 AI가 주축인 사회 구조에 종속돼 단순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계급이란 뜻입니다. ‘불안정하다(Precario)’는 이탈리아어와 노동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로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스탠딩이 처음 쓴 단어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는 ‘므두셀라’


▎지난해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하원의원이 ‘AB5(Assembly Bill 5)’의 지지연설을 하고 있다. AB5는 차량공유 업체 소속 운전기사를 개인사업자가 아닌 근로자로 분류하는 내용의 주(州) 법안이다. / 사진:AP/연합뉴스
가이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새로운 위험한 계급)]에서 “노조를 통해 종신 고용과 사회보험이 보장됐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달리 프레카리아트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큰 ‘위험한 계급’”이라고 말합니다. AI에 밀린 인간 노동자의 가치는 계속 낮아지고 결국에는 빈곤한 절대다수가 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가 더는 불평등을 감내할 수 없게 될 즈음엔 ‘바츠해방전쟁’과 같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불평등한 미래는 다양한 SF 작품으로도 표현됩니다. 2018년 공개된 미국 드라마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은 앞서 말한 1계급, 즉 상위 0.001%의 상류층을 다룹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오래 산 인간(969년)이란 뜻의 ‘므두셀라’로 불립니다. 부와 권력, 명예를 모두 쥐고 있으며 무엇보다 죽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수백 년 후 인간은 ‘스택(stack)’이라는 장치를 신생아의 뇌에 심어 기억과 의식을 저장합니다. 육체가 병들거나 사고로 다쳐도 스택만 이식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므두셀라들은 젊고 건강한 신체를 갈아타며 영생을 누립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갖게 되죠.

반면 프레카리아트에 해당하는 대다수의 그라운더(grounder)는 므두셀라를 신처럼 받들고 동경합니다. 그라운더는 기술문명의 혜택을 얻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죠. 대부분의 일자리는 AI와 로봇으로 자동화돼 변변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불멸하는 므두셀라는 온갖 부패와 범죄를 저질러도 쉽게 처벌을 면합니다. 돈으로 더 좋은 신체를 사주겠다고 꾀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얼터드 카본]은 극단적인 양극화로 ‘초계급사회’가 고착된 미래를 그립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잉여가치가 많아질수록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다’는 장 자크 루소의 지적([인간 불평등 기원론])처럼 기술혁신이 가져온 문명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집중돼 있습니다. 므두셀라는 우리가 상상했던 그 어떤 유토피아보다 멋진 삶을 살지만, 대다수는 문명이 발달하기 전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미래엔 ‘얼터드 카본’처럼 불평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농경 사회엔 누구나 기술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었지만, 산업이 발달할수록 소수의 사람이 기술을 독점했다”며 “발전한 과학 문명의 혜택을 소수만 누리고 다수는 받지 못하는 ‘기술소외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지금도 이미 불평등은 우리가 처한 가장 위험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양극화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상위 1%의 소득은 1980년경 평균소득의 9배에서 2010년 20배로 늘어났습니다. 같은 기간 영국에선 6배→14배, 호주에선 5배→9배, 일본은 7배→9배로 증가했습니다. 부유층일수록 일해서 버는 돈(노동소득)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의 증가율이 훨씬 크기 때문에 불평등이 커진다는 게 피케티의 설명입니다.

소득주도성장의 허점


문재인 정부가 강조했던 소득주도성장도 피케티의 이론과 일부 맞닿아 있습니다. 기업의 이윤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경제가 성장한 만큼 노동자의 소득(임금)이 늘지 않아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피케티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피케티는 지난 200여 년 동안 미국과 유럽 등 자본의 흐름과 경제 구조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산은 세대를 걸쳐 세습되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기회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피케티의 해법은 다소 급진적입니다. 누진세를 강화하고 글로벌 자산세를 걷자는 것이죠. 어느 한 국가에서만 이런 조치를 취할 경우엔 다른 국가로 자본이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연대하자는 의미에서 ‘글로벌’ 자산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임금소득의 양극화를 문제 삼습니다. 이를 설계한 장하성 주중대사가 주로 강조하는 것도 소득 양극화고요. 이는 부동산·주식·예금 등 자산에 더 높은 누진세를 매기자고 제안한 피케티의 생각과 다릅니다. 또 세계 모든 나라가 동시에 이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부자들이 세금이 더 낮은 곳으로 자산을 이전시킬 출구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인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출구가 뻥 뚫려 있습니다. 임금을 인상하는 대신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무인 시스템을 바꿔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식당과 편의점에서 시급을 올리지 않고 무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대표적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가뜩이나 ‘무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죠. 노동자의 소득을 높이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고용 없는 미래’를 앞당기는 꼴이라 오히려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죠. 실제로 배달의 민족은 최근 AI 바리스타를 적용한 로봇카페를 오픈했고, 테이블 사이를 ‘자율주행’하는 서빙 로봇도 개발했습니다. 이미 상용화된 AI 의사 왓슨, AI 변호사 로스처럼 인공지능의 일자리 침투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기술혁명으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막을 순 없습니다. “20%만 의미 있는 직업을 갖게 된다”는 일론 머스크의 지적처럼 기술의 발전은 늘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했기 때문이죠. 다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직업증발’을 맞이해야 할 서민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불평등의 큰 축이 소득격차 때문이었다면, 앞으로는 일자리의 유무 자체가 불평등의 원인이 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김중백 교수는 “미래엔 누가 돈을 더 받고 덜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사태가 생긴다”며 “단순히 최저임금만 올릴 게 아니라 자동화로 인한 직업증발을 연착륙시키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고용창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합니다. 미래사회에서 불평등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AI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시장의 효율성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불평등은 시장의 장점인 역동성과 생산성을 마비시켜 사회 전체를 침몰시킨다” ([불평등의 대가])는 것이죠. 적절한 양극화 해소 정책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성장을 견인할 수 있지만 당장 눈앞의 통계치를 올리려는 대증요법은 오히려 ‘직업증발’ 시대를 앞당길 뿐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선 늘 불평등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요. 하지만 출발부터 도착점이 정해진 레이스라면 누구도 그 게임에 참여하려 하지 않겠죠.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인 불평등은 수많은 혼란과 갈등, 심각하게는 체제 전복의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종말이 부른 로마의 멸망


▎2014년 9월 토마 피케티(왼쪽) 파리경제대 교수가 중앙일보 유민라운지에서 송호근 당시 서울대 교수와 대담을 나누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수의 미래학자와 의식이 깨어 있는 사회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신(新)계급사회가 형성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최근 논의되는 ‘로봇세’ 등이 대표적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겐 소득세와 사회보장세처럼 각종 소득이 부과되고 있다”며 “이들과 같은 일을 하는 로봇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과세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동자의 일을 대신한 로봇에게도 그만큼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죠.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로봇세 도입에 긍정적 입장입니다. 저커버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로봇과 AI에 세금을 매기면 AI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본소득을 줄 수 있다고까지 제안합니다. 로봇과 AI의 자동화를 통해 얻는 결실을 어느 한 기업의 수익으로만 독점하도록 하지 않고 온 사회와 함께 나누자는 생각입니다.

실제 유럽의회도 2016년 5월부터 로봇세 도입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로봇세를 바로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결국에는 로봇에게 ‘특수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전자인간’이라며 법적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로봇에게 인격권을 주고 언젠가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둔 거죠. 과세하기 위해선 일반 사람과 같은 ‘시민격’, 기업과 같은 ‘법인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래 사회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세계의 많은 전문가가 예측하는 것처럼 지금 이대로 우리 사회를 놔둔다면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겁니다. 최근 미국의 젊은 층 사이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불평등은 정치체제에 대한 변화의 목소리도 키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봇세’를 신설하자는 빌 게이츠의 주장이나, 그 돈을 AI로 일자리를 뺏긴 인간에게 ‘기본소득’으로 돌려주자는 마크 저커버그의 제안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미국에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앤드류 양의 ‘보편적 기본소득(UBI)’ 공약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기본소득이 실현된 뒤에도 중요한 의문이 한 가지 남습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의 상당 부분을 일에서 찾습니다. 어린아이와 청소년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다수가 특정 직업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의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이죠. 기본소득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노동의 종말에 대한 본질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반면교사가 로마제국입니다.

과거 로마제국은 직업군인 제도가 생기기 전에 대부분의 시민이 생업과 전쟁을 병행했습니다. 농경시대였기 때문에 농번기를 제외한 기간에 주로 전쟁을 벌였죠. 그런데 로마제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전쟁 기간도 길어졌습니다. 몇 달이 몇 년이 되기 일쑤였죠. 그러면서 가정에 남은 여성과 아이들만으로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당시 로마에선 세넥스(sĕnex)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노인을 뜻하는 말인데 이들은 나이가 많아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여성들의 땅을 매입하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죠. 이런 일이 수십 년이 반복되자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갔습니다. 나라를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집에 돌아오니 빚쟁이가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로마 시민층 내부에서 불평등 문제가 촉발합니다.

제국의 팽창이 가져온 로마 사회의 큰 변화 중 하나는 값싼 노예 노동력의 증가입니다. 그러나 늘어난 노예 역시 돈이 많은 세넥스의 몫이었습니다. 웬만한 일은 노예들의 몫이었고, 그 탓에 보통의 시민들은 일자리를 갖는 것조차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빵과 서커스’ 정책입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물자로 국부를 증대했습니다. 그 덕분에 국가는 생활이 어려운 시민들에게 매달 30㎏의 밀을 주고 공공 서비스를 무상 제공했습니다.

노동이 사라진 로마 시민들은 나라에서 주는 먹을거리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결국에는 할 일이 없어져 국가가 제공하는 즐길 거리, 즉 검투사와 목욕탕 문화 등을 통해 향락을 즐기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런 세태가 심화되면서 제국의 몰락을 앞당기기 시작했죠. 그렇게 천 년의 로마도 저물어 갔습니다.

기술혁명의 가치와 불평등

이처럼 불평등은 사회 전체를 종말로 몰고 가는 본질적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마르크스가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외친 것도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이 원인이었죠. 그는 극소수의 부르주아가 다수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는 억압된 사회구조를 깨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산수단(공장, 부동산 등)을 소유한 자본가가 경제 활동으로 생겨난 잉여가치의 최소한만을 노동자의 몫으로 남기고 대부분을 이윤의 형태로 가져간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노동을 하지 않고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죠.

그런데 미래엔 마르크스의 이론도 유효하지 않습니다. 노동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직업이 증발하고 가짜 직업이 생겨나는 시대입니다. 과거 세넥스처럼 소수의 부유층에게 부가 크게 집중될 가능성도 큽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기 전에 AI와 같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결실을 공정하게 나눌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술은 인간의 평균적 삶의 수준을 증진시켰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수천 년 전의 조상들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발전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최첨단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상당수는 여전히 궁핍한 삶을 연명합니다. 한 편에선 AI가 바꿀 가까운 미래의 일상을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세계 인구의 40%는 디지털 문맹입니다. 굶어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며, 수인성 전염병에 마을 전체가 감염되는 곳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 문명의 발전을 산업과 과학, 기술의 관점에서만 논의하면 안 됩니다. 이와 함께 제도와 문화, 가치와 윤리의 관점에서도 깊고 폭넓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성찰과 고민의 시간이 부족하다면 각종 SF에서 그려졌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우리를 엄습할 것입니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목적지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은 언제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치킨게임’과 같습니다. 기술에 가치와 영혼의 옷을 입히는 것은 인간입니다. 맹목적 발전은 지난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할 뿐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4차 산업혁명을 ‘인간혁명’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 ‘윤석만 논설위원의 인간혁명’을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새 연재물인 ‘윤석만의 온리버티(on liberty)’로 찾아뵙겠습니다.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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