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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와이드 분석] 미·중 패권전쟁의 시나리오 

“둘 중 하나가 쓰러져야 끝난다” 

美, 중국을 WTO 체제에 편입시킨 것 후회… 中 “숫자는 타협해도 시스템은 협상 불가”
G2 무역협상의 최종적 타결까지 갈 길 멀어,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수출 루트 지켜내야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주석은 ‘뉴 노멀’이라 지칭되는 신냉전시대로 치닫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감소하는 복합 충격은 세계 경제를 급속히 냉각시키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G2인 미국과 중국은 인류 공동의 적인 코로나19 앞에서 협력이 아닌 대립을 선택하고 있다. 2018년부터 무역전쟁이 시작됐다. 2020년 1월 어렵게 이뤄낸 미·중 1단계 합의로 휴전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합의문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코로나19로 미·중 갈등은 한층 더 격화하고 있다. 미국은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들고나오고, 중국은 정면으로 반발하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는 중국과 여기에 반발하는 미국은 충돌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미·중 경제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동안 유지됐던 자유무역 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중국은 자유무역 질서의 혜택만 향유하면서 책임 있는 경제 대국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그 체제의 설계자이자 최대 주주였던 미국이 스스로 파괴자가 되고 있음은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이 그동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역 확대를 통한 중국의 성장이 결국에는 중국의 정치적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는 미국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허용했고,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삼는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될 수 있었다. “체제가 달라도 거래할 수 있다”는 세계화의 무한 질주 속에서 미국은 핵심기술 공급과 최종 소비시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체제가 달라도 거래하다 보면, 결국에는 서구 체제로 수렴할 것이다”라는 미국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신냉전의 시작은 그러한 믿음 자체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미·중 무역 전쟁을 시작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중국의 공세적인 진격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려는 의도를 명확히 하면서 공세적인 행보를 계속해오고 있다. 국제법적으로 ‘공해’인 남중국해의 군사기지화는 미국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미국은 ‘지금 아니면 중국을 길들일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G2로 부상한 중국은 거대해진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투사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제국주의 시대 ‘굴욕의 100년’의 역사를 되돌리려 한다. 미·중 경제전쟁은 21세기 패권경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중국이 G2로 부상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이 주도하는 WTO에 가입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에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으로 통하는 고속도로를 깔아준 격이었다. WTO 가입 이후 중국의 성장세는 용의 승천을 연상케 했다. 다른 국가와 동등한 미국 시장 접근권을 획득한 중국은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2007년 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고,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등극했다.

미국의 오판, 중국의 추격

미국은 지금 와서 중국에 고속도로 진입을 허용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미국으로 통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통행료를 중국은 형편이 나아지면 내겠다고 어음을 발행했다. 과속 운전, 음주 운전, 반칙 운전을 안 하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중국이 발행한 어음(개방과 개혁 약속)은 부도 처리됐고, 과속과 반칙을 적발해도 운전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더 많은 경찰과 순찰차를 투입하는 것으로는 중국의 난폭 주행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미국은 도달했다. 중국을 고속도로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면, 미국이 설계하고 확장하는 데 최대의 지분을 투자한 고속도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생각을 같이하는 국가들에만 진입을 허용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려는 것이 미국의 계획이다. 미국과 연결된 중국의 무역·자본·기술·인력·금융의 핵심 고리들을 차단(디커플링)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부가가치가 낮은 조립공정에 만족하는 ‘세계의 공장’을 뛰어넘어 경제강국, 기술강국이 되려고 한다. 미래를 선도할 핵심 10개 분야를 선정해 중국산 점유율을 2025년에 70%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중국제조 2025’는 기술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의 진격 명령이다. 이 계획이 발표되던 2015년 중국산 점유율은 10% 이하였다. 디지털 혁명시대에 중국은 핵심 기반 기술인 5G, AI(인공지능), 빅데이터에서 강자로 떠올랐다. 어느새 턱밑까지 추격해온 중국의 기세에 미국은 충격과 전율을 느끼고 있다. 2019년 1월, 미국 상원 정보위에 제출된 미국 정보국의 ‘세계 위협 평가 보고서’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자본집약적 고도 기술 분야에서 미·중 간 격차가 급속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중 관계는 1979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 첨단기술 탈취를 이유로 중국산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은 보복관세로 맞대응했다. 관세를 무기로 하는 무역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선은 기술·투자·인재·정보·금융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의 미국 기업 인수에 제동을 걸고, 미국 내 중국 유학생과 방문학자들의 스파이 행위를 공개적으로 색출하고 있다. 중국 유학생에 대한 비자 발급 제한,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을 퇴출시킬 법안들이 속속 입법화되고 있다.

스파이 영화가 현실로


▎2001년 11월 중국의 WTO 가입을 자축하는 선전판.
미·중 경제 전쟁의 핵심은 기술 전쟁이다. 중국의 최대 수출시장, 핵심기술 공급처이자 인력 양성과 과학기술 학습 기지였던 미국은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한다. 미 의회는 여야 합의로 미국에서의 중국 자본의 인수합병을 통한 기술 획득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고 제재의 수위를 높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대학은 중국의 세계적 통신기업인 화웨이와의 산학협력을 중단하고 있다. 무역·투자·기술·과학·인력교류 등 곳곳에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중국과 미국을 연결한 글로벌 가치 사슬은 분리되고 와해될 수밖에 없다. 세계 기업들의 중국 탈출도 시작될 전망이다. 세계화의 상징이었던 애플 아이폰의 중국 생산기지는 축소될 운명이다.

2020년 2월 찰스 리버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 정부의 해외 인력 확보 계획인 ‘천인계획’에 포섭돼 중국 우한공대와 자의적으로 연구 협력을 해오면서도 미국 정부에 허위 진술한 혐의로 체포됐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이미 ‘천인계획’을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중국으로 불법 유출하는 통로로 지목해오던 터였다. 크리스토퍼 레이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중국은 국영기업, 민간 기업, 학자, 유학생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미국의 정보, 연구개발, 혁신, 기술 등 지적자산을 훔쳐가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고 2019년 4월 미국 외교협회 공개강연에서 밝힌 바 있다.

중국 학자들의 미국 비자가 취소당하고, 미국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는 중국 본토 출신 학생의 숫자도 확연히 감소하고 있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 텍사스의 앤더슨 암센터가 중국 정부를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과학자가 해고되고, 의학 분야의 막대한 연구자금을 관리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예산 지원을 받는 대학과 연구소를 대상으로 해외 기술유출 혐의가 있는 연구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음은 첩보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미국의 초강경 압박에 중국은 지구전으로 맞서고 있다. 21세기 중반까지 세계 최고 강국을 선언한 ‘중국몽’ 달성을 위해 중국은 물러날 수 없다. 미국이 장벽을 쌓고 차단하면, 중국 스스로 시장이 되고 스스로 혁신역량을 강화해 21세기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구조적 경기하락세가 이미 진행 중인 중국에 미국과의 연결고리 해체는 중국 경제를 더 어려움으로 몰고 갈 전망이다. 미국의 중국 봉쇄가 오히려 중국 기술자립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 전망이 현실로 등장하려면 ‘모방창신(模倣昌新)’으로 혁신을 추구해온 중국이 ‘모방’할 대상에의 접근이 어려워진 상황을 극복해야 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첫해, 미국은 ‘국가전략보고서’에서 중국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패권국으로 규정했다. 이후 미국의 통상 정책, 기술 정책, 인력 정책에서 안보가 최상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점했다. 2020년 5월 미국의 ‘대중국 전략적 접근’ 보고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정식 국가 명칭인 중국 대신 중국 공산당을 사용하면서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79년 중국과 수교 이후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기대했으나, 중국 공산당 지배체제는 자유무역질서를 이용해 정치·경제·군사적 영향력 확대에만 치중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리셋하려고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 편파적인 심판, 무용지물이 된 경기 규칙, 모든 것을 싹 바꾸려고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대로 둘 수 없다면서 국가 주도의 중국 경제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미국과 ‘숫자는 타협 가능하지만 시스템은 협상 불가’라는 중국 사이에 합의는 가능할까?

최악의 시나리오와 연착륙 시나리오


▎팀 쿡 애플 CEO(왼쪽)가 2014년 10월 중국 정저우의 아이폰 생산시설(폭스콘)을 방문했다. / 사진:팀 쿡 트위터
미·중 1단계 합의가 폐기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무역 합의에 흥미를 잃었다’는 트위터를 날렸다. 코로나19 책임론 공방에서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전술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가 위기에 몰린다면 초강수를 들고나올 수도 있다. 1단계 합의가 폐기된다면 모든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물릴 것이다. 무역전쟁이 쏘아 올린 높은 관세의 예외지대에 있었던 가전제품, 소비제품에도 관세 폭탄이 투하되는 것이다. 애플이 중국에서 생산하는 노트북이 지금까지 내지 않았던 높은 관세를 지불해야 하는 세상이 된다. 미국에도 악재이지만, 코로나19 약재 속에 휘청거리고 있는 중국 경제에도 악재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에 대해 중국에 손해배상을 법적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킨 뒤, 그 법안에 근거해 코로나19 유가족 또는 확진자들이 소송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엔 미국 내 중국의 자산을 동결하는 방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 경우, 중국의 극단적인 반응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존감에 상처를 받은 중국은 초강경 대응으로 나올 것이다.

2020년 1월 미국과 중국이 1단계 합의에 도달했을 때, 미국 기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조금, 국영기업, 사이버 보안 등 중국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관세 전쟁이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2단계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면 미·중 경제 전쟁은 연착륙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산업보조금을 폐지하고 국영기업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미국은 중국과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진민퇴(國進民退)’의 기치를 내걸고 ‘중국제조 2025’라는 기술굴기를 시도해온 중국의 목표가 이런 약속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에 이런 합의는 굴욕을 의미한다. 합의가 아닌 중국 정부의 독자적인 개혁개방 조치로 채택돼 추진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너무나 깊어서 미국이 이런 방식을 수용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미·중 경제 전쟁은 경제·통상·기술 분야를 넘어 패권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이 WTO라는 국제기구가 아닌 미국의 일방적인 힘에 의존하여 중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과 행동은 WTO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에는 미국과 중국 간의 양자 대결 구도로 몰고 갔지만, 이제는 중국 대 세계의 구도를 만들어 중국을 봉쇄하고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압박은 전방위적으로 지속해서 이루어질 전망이다.

트럼프 집권 초기 ‘인도 태평양 전략’이란 안보 분야 중국 봉쇄 카드를 꺼낸 미국은 최근 ‘경제번영네트워크(EPN)’란 경제 분야 반(反) 중국동맹 결성 카드를 흔들기 시작했다. 화웨이에 반도체 공급을 금지하라고,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제3국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그런 구상의 시작이다. 중국은 자국 소비시장 키우기, 기술자립으로 맞서고 있다. 동시에 주변국들이 미국 쪽에 줄서기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

미·중 경제 전쟁의 핵심 갈등은 협상으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 경제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합의가 나오더라도 잠시 갈등을 봉합하는 것일 뿐, 얼마 후에는 서로의 다른 경제체제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무역충돌에 기존 합의는 무색해지고 무력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중국 체제를 그대로 용인할 리 만무하다.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는 시대


▎2019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업인과의 대화를 열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이유로 미·중 신냉전은 장기화할 것이다. 미·중 경제전쟁의 향방은 절대적인 힘, 전략, 지속 가능성, 체제의 탄력성, 고통 감내 능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미·중 신냉전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임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우위가 최후의 승자로 연결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은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 기술력에서는 중국이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고, 디지털 혁신기술의 특정 분야에서는 우위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략의 지속 가능성, 고통 감내 능력에서 중국은 강점을 보이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보 경쟁 역시 중요한 변수이다. 미국은 열린 사회인 반면, 중국은 통제사회다. 열린 사회의 사이버 공간을 상대 국가가 장기적, 전략적 의도로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신냉전이 진행된다는 것의 의미와 파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미·중 경제 전쟁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패러다임에 안주해온 한국의 생존 방식을 흔들고 있다. 이제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제대로 된 전략 설정을 위해서는 미·중 갈등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스쳐 지나가는 광풍이 아닌 계속 불어닥칠 태풍임을 먼저 읽어야 한다. 현재 고조되고 있는 미국의 대(對) 중국 초강경 분위기는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 카드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백악관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민주당 역시 ‘중국 때리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미국의 반중 정서는 2020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넘어서는 미래진행형이다.

미·중 신냉전의 돌입은 ‘안보 따로, 경제 따로’ 시대에서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안보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없는 통상 정책, 기술 정책은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지금처럼 ‘외교부 따로, 산업통상자원부 따로’의 분절화된 정책 대응 체제로는 미·중 신냉전시대의 파고를 헤쳐가기 어렵다. 외교·안보와 산업통상을 연결하는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컨트롤 타워는 장기 국가전략을 모색하고 스마트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통상 분야의 갈등이 안보의 국익과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있다. 당장의 이익을 외면할 수 없는 기업의 단기적 편향성을 국가전략의 중장기 비전이 조정해야 한다.

대한민국 앞에 닥친 과제는 안보·기술 연계가 민감한 산업에서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다. 미·중 신냉전시대 한국의 전략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로 단순화하는 프레임에서 탈피해야 한다. 미국을 선택하는 경우, 중국이 반사적으로 경제 보복을 할 것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안보와 경제를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지고 완충 지역이 사라지면서, 한국이 어떤 전략을 구사하든지 미·중 갈등의 진행 과정에서 충격은 불가피하다. 다가올 충격에 대한 내성을 높여야 한다. 흔들리는 것을 각오하되, 쓰러지지 않을 탄력성을 확보하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한국 정부의 리스크 관리 전략은?

중국이 기술굴기를 본격화하면서 한국의 주력 제조업은 중국과 세계 시장에서 피할 수 없는 경쟁 구도에 돌입했다. 중국과 무역을 더 늘리고 투자를 더 늘린다는 것의 전략적 의미를 한국 기업인들과 정책당국은 냉정하게 파악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의 투명성 부족은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치명적 위험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차이나 리스크 분산은 기업들의 숙제인 동시에, 미·중 신냉전시대 국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방치한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코로나19 사태에 ‘사회적 거리두기’만 믿고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적 효율성 논리가 압도하던 미·중 협력시대에 구축됐던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변화 방향을 미리 내다보고 기민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쾌도난마식 해법은 없다. 분야별 맞춤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적인 산업의 경우, 중국 탈출이 어렵다면 중국 이외 다른 국가에도 생산기지를 확보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유사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여유분을 이들 국가에 구축하는 것이 첩경이다. 한국으로의 귀환(리쇼어링)도 선택지의 하나이지만, 현재의 규제 구도 속에서는 쉽지 않다면 전면적 리쇼어링에 집착하지 말고 실현 가능한 리스크 분산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예정된 미래였던 디지털 경제로의 진전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속화하고 있다. 디지털 무역 관련 국가 간 갈등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특히 사이버 보안은 경제 문제를 넘어 안보까지 연계되는 것이기에 더 많은 정책 자원과 우선순위가 투입되어야 한다. 동시에 외국의 공격적인 국내 시장 침탈과 기술 유출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외국인 투자가 일자리를 만든다는 단순 논리만으로 국내 기업의 인수를 허용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외국은 한국의 지방자치단체 간 경쟁의 고리를 치고 들어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할 계산이다. 기술 생태계, 국가안보 등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하는 일은 중앙정부만이 가능하다. 중앙과 지방 간의 정책 조율 역시 미·중 신냉전시대의 시급한 과제다.

동맹국인 미국과 경제 의존도가 높은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운신 폭이 좁다. 분명한 것은 자립과 자족만으로는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지정학적 새로운 단층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세계 각국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내몰고 있지만, 한국은 운명적으로 세계와의 무역과 투자를 외면할 수 없다.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법치주의라는 기본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질 때, 국익과 일치하고 충격에도 회복성이 강할 것이다. 무너져 내리는 다자체제의 복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더 많은 연대를 추진하는 전략적 지혜가 요구된다.

※ 최병일 -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WTO 기본통신협상 한국 수석대표를 역임하고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2006~2010년), 국민경제자문회의 의원(2011~2013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2011~2014년)을 거쳤다. 2019년부터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97년부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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