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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총력취재] 미·중 신냉전시대와 한국의 생존 전략 

“독수리(美)와 용(中), 반도체에 사활 걸다” 

재선 노리는 트럼프는 화웨이 때리기, 시진핑은 반도체 굴기로 맞서
G2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 산업… 한국 정부의 중재자 외교 시험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두 번째)이 5월 18일 중국 시안의 반도체 공장 현장을 점검했다. 코로나19 이후 중국을 방문한 주요 기업인은 이 부회장이 처음이었다. / 사진:삼성전자
"중국은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해서 미국으로부터 수천억 달러를 갈취하고 있다. 워싱턴에서의 화기애애한 회담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우방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중국을 미국의 적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의 미래를 망치는 사람들을 달리 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파산으로 몰아넣고, 일자리를 훔치고, 기술을 빼내기 위해 스파이 짓을 하고, 우리 화폐를 갉아먹고, 우리 생활방식을 파멸시키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에 대해 달리 어떤 표현을 쓰란 말인가? 나는 이런 작자들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야말로 ‘적’이라고 본다.”

2011년, 도널드 트럼프는 저서 [Time to Get Tough]에서 중국을 ‘적’으로 지칭했다. 이 책의 부제는 ‘Making America #1 Again(미국을 다시 한번 일등으로)’.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16년 11월,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의 대선 구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넘버원’이 ‘그레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를 두고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어게인(again)이 들어갔다는 건 그 이전 미국에 위대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의미”라며 “그게 과연 언제인지가 모호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관해 트럼프의 핵심 선거 참모로 꼽히는 로저 스톤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킹메이커 로저 스톤]에서 실마리를 제공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야말로 트럼프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다.

왜 트럼프는 레이건을 위대하다고 여길까. 레이건의 임기 8년(1981~1988년) 동안, 미국은 두 번의 패권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과의 군사력 경쟁, 일본과의 경제력 경쟁이 그것이다.

레이건이 트럼프의 우상인 이유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레이건은 ‘강한 달러’ 정책을 불사했다. 살(단기적 경제 손실)을 내주고, 뼈(패권전쟁 승리)를 취하는 정책이었다. 막대한 무역적자는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감세 등 경기부양 정책과 기업의 성장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메우려 했다. 미국 내 인플레이션을 억제했고, 전 세계의 달러를 흡수했다. ‘강한 달러’ 정책으로 달러가 귀해지자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등 친(親)소련 국가들의 경제가 붕괴했다. 종속이론을 신봉한 이들 국가는 독일 등 서유럽이나 일본·대만·싱가포르·홍콩·한국 등 동아시아 친미 국가들과 달리 달러를 벌어들일 마땅한 수출 품목이 부재했다. 친소 경제권이 파산하자 본진인 소련의 수요, 공급 체제도 흔들렸다. 미국은 소련 경제의 버팀목인 석유 수출에도 손을 썼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과의 공조를 통해 유가 하락을 유도한 것이다. 국민을 먹여 살리기 어렵게 되자 체제도 온전할 수 없었다. 결국 소련은 1991년 해체됐다.

소련과 달리 일본은 미국의 우방이었다. 2차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들어갔고, 산업 발전에 국력을 집중했다. 도요타, 소니 등 일본의 제조업은 세계를 제패했다.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치솟았다. 그럼에도 수출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약한 엔(円)’ 정책을 고수했다. 달러를 벌어오면 일본 국내에 쟁여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달러가 흔해질수록 달러 가격이 내려갈 것이고, 상대적으로 엔 가격이 올라가면 대미 수출에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끊임없이 미국의 국채를 샀고, 부동산을 샀고, 회사를 사는 데 달러를 썼다. 어느덧 미국이 위협감을 느끼는 선을 넘어버렸다.

이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를 압박해 1985년 ‘플라자협정’을 끌어냈다. 1달러 당 240엔이던 것을 1달러 당 120엔으로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갑자기 엔화의 가치가 2배로 뛴 것이다. 엔화가 비싸졌다는 건 그만큼 구매력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일본 국민은 흥청망청 소비하고 사들였다. 버블경제의 서막이었다. 수출이 예전보다 어려워지자 일본 정부는 내수로 해결하겠다는 차원에서 버블을 방치했다. 부동산과 주식이 폭등했다. “도쿄 땅을 팔면 미국 전부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1989년 말, 거품이 터졌다. 부동산과 주식이 폭락하자 돈을 빌려준 일본 금융은 부실화했다.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돈을 풀어 대응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하고 국가채무 비율만 올려놨다.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됐고, 일본은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냉전 체제의 전쟁터 된 반도체 시장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왼쪽)이 사업가 시절의 도널드 트럼프와 만났다.
이로써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는 견고해졌다. 1997년 글로벌 외환위기(IMF 체제)를 거치며 미국 방식의 세계화와 자유무역, 주주자본주의는 스탠더드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애플·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 등 플랫폼 기업은 IT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였고, 할리우드와 NBA 등으로 상징되는 소프트컬처는 초강대국 미국의 매력을 과시했다.

미국의 시대는 중국에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시간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뜻으로, 중국을 배고픔에서 구한 지도자 덩샤오핑의 지침이었다. 이 기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은 곧 잠재적 소비시장이었다. 세계는 ‘메이드 인 차이나’를 쓰지 않고는 하루도 못 버틸 정도가 됐다.

중국은 2010년까지 연 10% 이상의 가공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이는 구매력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중국이 경기부양으로 떠받치지 않았다면 글로벌 경제는 온전치 못했을 터였다. 2009년 2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과 중국은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이라고 치켜세우며 중국의 미국 채권 매입을 요청할 지경이었다.

2015년 이후 ‘바오류(保六)’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중국이 연 6% 성장을 못 하면 세계 경제에 치명적’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2019년,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14조1400억 달러다. 미국(21조4390억 달러)의 66% 수준까지 근접했다. 2018년 기준, 중국의 국방 예산은 2076억 달러(미국은 7160억 달러)다. 미국에 비해 숫자는 적지만 중국도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병력(218만 명)은 미국(128만 명)보다 더 많다.

시진핑 체제에서 중국은 도광양회에서 2013년 개시된 ‘일대일로(一帶一路)’로 선회했다. ‘현대판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일대일로는 중국 중심의 무역 생태계를 일컫는다. 전 세계에 분포한 미 해군의 보호를 받는 수출 루트와 겨루겠다는 시스템이다. 이외에도 2025년까지 기술 자립을 목표로 삼은 ‘중국 제조 2025’, 신중국 건국 100년(2049년)까지 군사력에서도 미국을 능가하겠다는 ‘중국몽(中國夢)’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군사력과 이념)과 일본(경제력)을 합친 위협으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셈이다.

미국의 PEW 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미국인의 반감 지수’는 역대 최대다. 2020년 3월 조사에서 66%가 ‘중국이 싫다’고 답했다. ‘좋다’는 응답은 26%에 불과했다. 2011년(좋다 40%, 싫다 40%)을 분기점으로 긍정 비율이 부정을 줄곧 압도했다.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2009~2016년) 이래 미국의 장기 호황이 시작됐다. AI·빅데이터·클라우드 등 기술 혁신, 리쇼어링(제조업의 국내 이전), 석유 에너지를 대체하는 셰일가스 등이 동력이었다. 2017년 출범한 트럼프 정부는 지지층인 블루칼라를 위한 일자리 지키기 정책을 강화했다. 실제의 장벽은 물론 가상의 무역 장벽을 쌓았다. 법인세도 인하했다. 집요하게 금리 인하를 추구해 증시 활황을 유도했다. 자국 내 생산과 소비로도 경제를 돌릴 수 있는 미국만의 강점을 활용했다.

이런 구조에서 중국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존재로 부각됐다. 트럼프로선 만성적인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를 만회해야 했고,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미·중 양국이 무역·기술·외교에 걸쳐 신냉전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국에 간 까닭은

미·중 신냉전 체제의 주전장(主戰場)이 반도체 분야다. 2018년 4월, 미국은 중국의 통신장비업체 ZTE에 ‘7년간 미국 기업과의 거래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해 7월에는 자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기술을 탈취했다는 혐의로 중국 반도체 회사 푸젠진화를 기소했다. 12월에 미국은 중국 5G 통신기술을 주도하는 화웨이를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런정페이 창업주의 딸)을 체포했다.

이어 2019년 5월에는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했다. 구글은 화웨이에 안드로이드 OS(운영체계) 공급 중단을 발표했다. 2020년 5월, 미 상무부는 화웨이에 추가 제재를 가했다. “미국 기술을 활용해 비메모리 반도체를 화웨이에 공급할 때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뿐 아니라 군사·안보 차원에서도 화웨이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미국의 포석이 깔려 있다.

이 와중에 코로나19까지 겹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14일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나왔든, 박쥐에게서 나왔든 중국에서 막았어야 했다”고 책임을 물었다. 코로나19 탓에 트럼프의 최대 치적이었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11월 재선 승리에 사활을 건 트럼프로선 경제 회복 가능성이 멀어질수록, 중국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할 것이 확실시된다.

미·중 전면전의 무대가 된 반도체는 한국 산업의 기둥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 부회장의 첫 해외 출장이자 중국에 온 최초의 글로벌 경영인이기도 했다. ‘중국은 중요한 시장’이라는 메시지를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한다. 한국 전체 수출의 25%를 중국이 차지하는데, 여기서 39.7%가 반도체다. 아직까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반도체 굴기’를 내세운 중국의 추격이 위협적이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장에 따르면 “중국은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미국이 장악한 비메모리 반도체, 팹리스(반도체 설계) 영역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중국 첨단기술의 상징이라 할 화웨이를 집요하게 저격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5월 20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보고서’를 통해 “중국 정부가 혜택을 부여한 기업(화웨이)을 앞세워 세계 정보통신 업계를 장악하려 한다”고 꼭 집어 언급했다. [뉴스위크 일본판]은 2019년 5월 21일 자에서 화웨이를 ‘인민해방군 출신(런정페이)이 창업한 세계 최강의 5G 통신기업’이라고 지칭했다. 화웨이는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 등 IT 기기 생산 외에도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칩과 팹리스 분야에서도 세계 시장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즉 화웨이는 퀄컴·인텔·애플 등이 아성을 쌓은 미국의 핵심 산업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미국에 의해 화웨이가 봉쇄당할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득과 실이 공존한다. 손실은 단기적 매출이다. 삼성전자의 2020년 1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5대 매출처에서 화웨이가 빠졌다. 미·중 분쟁 여파로 삼성전자의 중국 매출 비중은 30%대에서 24.5%로 하락했다. 2019년 기준, 매출(26조9900억원)의 거의 절반(12조5700억원)을 중국에서 냈던 SK하이닉스도 D램 수요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화웨이는 한국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를 구입하는 데 연 10조원 안팎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SMC의 딜레마 남의 일 아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런정페이 화웨이 최고경영자와 만났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이득일 수 있다. 오철 상명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중국의 칭화유니, 푸젠진화 등이 반도체를 자체 개발하려는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중국 규제 정책과 중국 내수의 더딘 회복은 삼성전자 등 우리 반도체 업체가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생산기지로서 중국의 매력 하락에 따라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며 “공급자로서 중국의 위협 강도가 약해지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이 앞장서서 반도체의 자립을 외치고 있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비메모리로 나뉜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다른 말은 시스템 반도체다. 시스템 반도체는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위탁생산)로 분류된다. 미국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팹리스와 반도체 장비의 최강자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파운드리와 메모리 반도체까지 자국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5월 15일, 대만의 파운드리 회사인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120억 달러를 투자해 5나노미터 첨단 공정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점유율(54.1%) 세계 1위 회사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15.9%)를 압도한다. TSMC는 미국과 중국의 경계를 두지 않고 주문받은 제품을 공급해왔다. 이런 TSMC의 미국 투자 결정에 관해 시장에선 ‘미국에 줄을 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삼성전자의 오스틴 공장 확장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텍사스주 오스틴에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도 기흥, 화성에 이어 5월 21일 평택에 13조원을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인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도 1위에 오르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선언한 바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극일


▎삼성전자는 13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평택에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다. /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일본의 수출 규제를 견뎌내며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2019년 7월, 일본 정부는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며 반도체 핵심 소재(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에 관한 공급에 족쇄를 채웠다. 그러나 1년이 흐른 시점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소재·부품·장비업체들이 더 타격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례로 5월 20일 [니혼게이자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 불화수소 생산업체 스텔라케미파는 순이익이 18% 감소했다. 모리타화학공업도 한국 매출이 30% 감소했다. 그사이 한국 정부는 수입 루트를 일본 바깥으로 넓혔고, 2조1000억원을 투자해 소재·부품·장비 독립에 나섰다.

그러나 미·중 패권전쟁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기술력으로 돌파하는 차원을 넘는다. G2의 헤게모니 경쟁 안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외줄 타기가 불가피하다. 우리 정부가 활로를 열어줘야 하겠지만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입지가 협소하다.

독수리(미국)와 용(중국)의 대결을 두고, 대다수 전문가나 학자들은 미국의 승리를 점친다. 중국은 빨리 무릎을 꿇느냐(연착륙), 버티다 굴복하느냐(경착륙)의 선택지가 남았을 뿐이란 예상이다. 미국이 관세를 올릴수록 중국은 수출길이 막힌다. 중국은 ‘포치(破七)’, 즉 위안화 환율을 1달러당 7위 안대로 올리는 전략으로 대응을 시도했다. 무역전쟁이 환율전쟁으로 전이된 상황이다. 노르웨이 국방부 연구원인 마르테 셰르 갈퉁과 스티브 스텔슬리는 공저 [중국의 미래]에서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즉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 중국은 달러를 벌어들여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이 구조를 아는 트럼프는 돈줄을 옭아매어서 중국을 ‘살 수 없으나 죽지 않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림자 금융’으로 축약되듯 수출 감소를 내수 활성화로 커버하려다 부채 폭탄을 품고 있는 중국에 버블이 계속 쌓이고 있다.

文정부는 EPN에 들어갈까?

미국의 압박에도 중국은 항전하고 있다. 5월 28일, 전국인민 대표대회에서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건 미국을 향한 도발이었다. 그래도 11월 재선을 앞둔 트럼프가 2020년 1월 체결한 미·중 1차 무역합의를 엎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작용했고, 실제 그렇게 됐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서는 “중국과 북한이 트럼프 낙선에 베팅하는 듯하다”는 견해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을 향한 북한의 거센 말 폭탄도 ‘북·미 관계의 재구성이 불가피하다’는 맥락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트럼프는 성공한 사업가 이미지로 각인됐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엔 파산한 경영자’였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거품 만들기’였다. 트럼프는 이 방식을 국가 경영 방식에도 차용했다. 끊임없이 거품을 만들어 실제 가치 이상으로 자산 가치를 폭등시켰다. 미국 주가 상승 등 경제 호황은 트럼프의 최대 치적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전염병 탓에 이 업적이 날아가게 생겼다.

다우와 나스닥의 하락 폭이 커지고 경제의 V자 반등이 요원할수록 중국을 향한 트럼프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그렇다고 판을 깨지는 못한다. 그랬다간 중국도 치명상을 입겠지만 미국 경제도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면전 대신 트럼프는 중국 고립에 치중하고 있다. 미국이나 우방국의 자본과 생산시설이 중국에서 빠져나갈 시간을 벌고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5월 22일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의 EPN(경제번영네트워크) 참여를 독려하는 시국이었다. EPN은 중국을 소외시키고 산업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미국의 구상을 담고 있는 반(反)중국 경제블록이다.

트럼프는 6월 1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2020년 가을 미국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해달라고 초청했다. 한국 외에도 인도와 호주, 러시아 그리고 브라질까지 거론했다. G7이 아니라 G11 혹은 G12(브라질까지 포함)까지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발상이다. 문 대통령은 “국격 상승과 국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수락했다. 그러나 신냉전 체제에서 미국이 “중국을 ‘왕따’시키는 데 동참하겠느냐”는 의도로 한국을 시험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도체·석유화학·자동차·조선 등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한국의 전체 수출 중 중국은 25.1%, 미국은 13.5%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은 적을 공유하는 동맹관계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명운을 건 한국의 균형 잡기가 본격화됐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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