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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특별기고] 진상 규명을 위해 서울시가 앞으로 해야할 일 

市 공무원 성희롱 실태, 전수조사해야 

성추행·성희롱 가능케 한 ‘비서실 문화’ 맥락 파악이 중요
‘무의식적 갑질’이 위력(威力)의 본질… 권력자 스스론 몰라


▎서정협 서울시 행정1부시장이 7월 10일 시장 궐위에 따른 서울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 앞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사진:뉴시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어른 A씨가 전화해왔다. 박 전 시장과 같은 나이에 대학을 다녔던 분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전문경영인으로, 나름 여성인권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필자와 인연을 맺었었다.

A씨는 다짜고짜 격앙된 어조로 고소인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전 시장은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왜 고소인이 (본인이 주장하는) 성추행·성희롱이 발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갑자기 고소하겠다고 나서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물어왔다.

이 분은 고소로 인한 의혹만으로 피고소인을 비난할 수 없다고 한다. 법적 판결을 받기 전에 한쪽은 피해자, 다른 한쪽은 가해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인민재판이라는 것이다.

반면 필자가 만나는 2030세대는,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자의 말을 무시하는 서울특별시장(葬)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아무리 공덕이 크더라도 의혹으로 자살한 가해 지목자를 시민장례로 치르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또 남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흥분했다. 참고로 2030들은 박 전 시장을 잘 모른다. 한국 최초의 성희롱 사건을 변호했던 분이라는 그 의미가 그렇게 크지 않다.

이처럼 성별이나 세대 또는 박 전 시장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현 사안이 제각기 달리 이해되고 있다. 피해자의 진술을 듣기보다 피해자 주변만 색출하며 성희롱 여부를 판단한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자신 있게 판단하는지 묻고 싶다. 필자는 ▷지금 이 순간 청자(聽子)로서 그녀들의 말을 어떻게 들을지, 그리고 ▷행위자로 지목된 자가 가진 힘에 관한 이야기하려 한다.

특히 본 사안을 고소한 실체적인 사람, 피해자가 존재하며 본인이 지목한 행위자가 죽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피해자가 무척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언제나처럼 성희롱 사건은 역시 정치적이며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가해자들의 항변(抗辯) 유형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 관련, 피해자를 지지하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와 메모들이 7월 1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도서관 입구에 부착돼 있다. / 사진:뉴시스
1. 그러한 일이 없다(부정).

2. 잘 기억나지 않는다(기억 부재).

3. 사랑하는, 동의한 관계다(상호관계).

4. 왜 갑자기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음모).

5. 침묵한다(무대응).

6. 사라진다(공소권 없음).

위 문장들은 피해자들의 호소에 대한 행위자들의 반응이다. 가해 행위자들은 피해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피해자보다 더 억울해한다. 그러더니 최근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물귀신 전략도 나왔다.

2019년 ‘미투’ 논란 당시 가해자로 지목받아 더불어민주당 총선 영입 인재 자격을 반납한 A씨는 “진실 여부와는 별개로 함께했던 과거에 대해 이제라도 함께 고통받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에 대해 A씨의 전 연인은 “제가 과거에 겪었던 고통을 자기가 인정을 해야 하는데, 저랑 같이 (고통을) 치르겠다는 말을 과연 가해자로서 할 수 있나 억울했다”며 심경을 밝혔다.

왜 행위자는 상대방의 호소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일까? 단지 의사소통의 문제일까? 만약 의사소통 부재라면 어떠한 관계에서 이러한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사안별로 행위자들의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행위자는 자신의 언동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잘 모른다. 그냥 사랑해서, 그냥 관심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더 잘하라고 격려한 것뿐인데 왜 이제 와서 이러한 봉변을 당하는지 정말 모르겠단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위력(威力), 힘을 베푸는 위력(爲力)이다. 또 그 위력은 권력자 측근에 의해 강화된다. 권력자와 같은 생각을 해야 측근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력은 정말 매혹적이다. 자신의 언동을 돌아볼 필요, 반성(反省)할 필요가 없다. 특히 그 위치를 지속하면 할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더 당연해진다. 또 갈수록 그 언동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절대로 지적할 수 없다. 그래서 정말 ‘운 좋게’ 봉변을 당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리거나 힘이 없다고 생각한 비서·제자·직원들에게 자신의 마음대로 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성희롱’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 호소를 들을 권력자는 그리 많지 않다. 머리로는 성희롱이 나쁘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권력자들은 자신의 그 언동이 바로 그 성희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 권력자는 성희롱이 제기되면 그 언동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습관·관행 등을 하나씩 반성해야 한다. 성희롱으로 간주할 만한 언동이 있다면 응당 그에 따른 절차가 진행돼야 할 것이다. 단 개인적인 처벌로 그칠 것이 아니라 부정의하고 모욕적인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고통 치유와 변화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책임을 지는 방법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빈발하자, 개인에 대한 신속한 처벌을 강조하는 경우가 다수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인 경우 그 개인이 속한 조직의 부서장이 사과하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때로는 사업주에 따라 성희롱을 강력하게 규제, 처벌하는 기관도 등장한다. 조사도 하지 않고 혐의나 의혹만으로 징계위원회를 요청하는 기관도 봤다. ‘시끄럽기 전에 가해자로 지목받은 자를 그냥 빨리 치워버리겠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조직·기관에서 일방의 힘에 의한 모욕적인 희롱, 폭력 행위는 분명 제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언동의 근본적인 원인에 따른 처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개인적 처벌에서만 끝날 수 있다. 엄벌주의로 인해 누군가의 언동이 제지되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고려하기보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넘어가는 미봉책으로 끝날 수 있다.

피해자는 순진하지 않다


▎국내 첫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의 승소 축하연이 1998년 2월 23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사건 변호인을 맡았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왼쪽 첫째) 모습.
세대·성별 등과 관계없이 사람들은 피해자가 왜 피해를 보고 한참 뒤에야 이야기하는지 궁금해한다. 필자는 반문한다. 당신이라면 상사의 불쾌한 언동에 대해 즉각 대응할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직장 내 성희롱처럼 지속적 관계에서 발생한 사건, 특히 위력 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만나면 피해자는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 또는 현재에도 진행되는 일들을 ‘말할 준비가 됐을 때’ 말한다. 없었던 일을 갑자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말할 기회’가 될 때 말한다. 당사자 개인의 준비뿐 아니라 조력자의 지원 그리고 사회적 준비에 대한 판단으로 말할 시기를 결정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 고통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들의 말을 거짓으로 의심하기보다 왜 그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은, 듣는 자의 몫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언동을 하고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는,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그 행위자들의 권력에 분노해 말하기를 시작한다. 피해자 관점이란, 고통을 말하는 그들의 말을 온전히 들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듣는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누구인지 찾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수사관이 아니다. 물론 피해자들이 항상 순수하거나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말 그 자체가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맥락에서 고통, 피해 가능성, 피해 구조의 변화를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또 고통을 말하는 자들, 피해자들은 법·제도 체계와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미투(공개적 말하기)’를 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억울함은 법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해결될 수도 없다. 피해자는 강력한 형사처분을 통해 가해 행위자를 응징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①즐겁게 능력껏 일할 수 있는 직장 환경 조성과 ②당사자로서 진술 재판의 한계와 불신으로 다른 대안을 찾고자 한다.

만약 고통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사회라면 이번 사건처럼 온 사회가 들썩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을 그 자체로 들을 수 있는 사회라면 그들은 적합한 기관에서 말했을 것이다. 상담하고, 사과받고, 치유받고, 또 법적인 판단을 받고 싶으면 절차대로 행하면 된다. 조직은 조직대로 사건 발생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면 된다.

진상조사단에 필요한 체크 리스트


▎시민들이 7월 13일 서울광장에 차려진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대부분의 성희롱 사건에서 ‘소’는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소’는 피해자, 행위자라는 특정 사람이라기보다 그 언동, 해(害)로 인한 사회구성원 모두다. 지금 우리는 아프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많다.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힘든 사람은 고통을 호소하는 자, 피해자다. 그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로 인해 이 사회는 변화할 것이다. 비록 사후처방이라 안타깝지만 아픈 만큼 이 사회는 더 성숙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 너 우리의 이기적 열망,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 그리고 성애화(性愛化)된 모욕·혐오 문화를 어떻게 변경할 것인가? 조직 내 성 관련 피해나 고통을 인지했을 때 고려해야 하는 대응지침을 근거로 서울시가 시급히 해야 할 일 5가지를 제안한다.

1. 성희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조직에 속해 있는 사회·문화의 문제다. 따라서 개인의 억울함이나 분노 해소를 위해 행위자 징계 등의 처벌에 목숨 걸지 말자. 처벌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피고소인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안심하지 말라.

2. 직장 내 성희롱은 조직 구성원 누구나 제기할 수 있다. 이때 피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말고 해당 언동이 조직(문화)과 피해자에게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 서울시는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라. 단 서울시가 원하는 위원이 아니라 젠더 관점이 있는 전문가, 그리고 피해자 측이 원하는 조사위원을 포함시켜 조사를 진행하고 공표하라.

3. 성희롱은 조직 구성원의 노동권 침해이자 인격권 침해다. 조직 내에는 성희롱뿐 아니라 일방적인 괴롭힘이나 인격 비하 등의 모욕감 등을 주는 언동도 수없이 많다. 성희롱 만을 단독으로 별건 처리하지 말고 같이 연관된 괴롭힘 등도 통합적으로 처리한다. 즉각 서울시 전체 공무원의 성희롱(직장 내 괴롭힘 포함) 실태 및 인식 조사를 실시하라.

4. 성희롱 입증은 쉽지 않다. 그 상황에 대한 성차별, 인권 침해 여부의 검토 이후, 피해자가 왜 그 상황을 성희롱으로 인지했는지, 그 행위로 인한 피해가 무엇인지를 듣고 참고인 진술을 참작한다. 사전에 성희롱을 인지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조처를 했는지, 서울시 자체 성희롱 방지지침을 검토하면서 직장 내 차별,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등의 실태를 드러내야 한다.

5. 행위자 징계는 조직의 취업 규칙에 따른다. 단 취업 규칙은 성희롱 방지 전문가(근로 당사자, 학자, 여성시민사회, 법을 포함한 공공의 처리지침 등)의 의견을 참조하여 매년 노조나 노사협의회와 토의·의결·공표한다. 행위자는 공소권 없음으로 징계처리는 불가하지만, 조직 내 성희롱 방지교육과 남은 직원 치유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해 직장 내 안정적 복귀를 지원한다.

한국 사회가 처음 성희롱이라는 단어와 마주한 지 27년이 지났다.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조교 우모씨가 담당 교수인 신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첫 시작이었다. 우모씨는 소송에서 신모씨가 “교육을 빙자해 팔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는 등 성희롱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소송은 2년 뒤인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에서 성희롱이 처음 규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성희롱 개념을 다지고 교육을 해나갔지만 또 다시 ‘소’를 잃었다. 올 들어 유력 정치인에 의한 사건만 해도 지난 5월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어 두 번째다. 소가 원하는 외양간을 만들어야 소를 잃지 않듯, 피해자들의 분노·억울함·모욕감 등에 귀를 기울여야 이 사회의 모순에 직면할 수 있다.

이제는 정말 잘 지어진 외양간에서 살고 싶다. 멋진 사회에서 살기 위해 이제는 함께할 때다.

- 변혜정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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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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