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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논설위원의 ‘온 리버티(on liberty)’] ‘문재인 정부는 가짜 진보’라고 하는 이유 

자유에 재갈 물리고 국가주의 역주행 

이스타항공 사태 노동자 대신 사주 엄호, 진보 가면을 쓴 기득권…
이견 용납 않는 친문 독선, 토론·소통 중시한 노무현 정신과 배치


▎한글날이었던 지난 10월 9일 경찰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벽을 설치한 뒤 교통을 통제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무엇이 진보이고 보수인지 정의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내용이 달라지고, 같은 시대라 해도 사람마다 그 기준이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은 진보일까요, 보수일까요. 반대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대표 아이콘인 노무현은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보수 야당이던 한나라당과 별다른 입장 차가 없었죠. 반면 박근혜는 누리과정과 기초연금 등을 도입하며 보편적 복지의 터를 닦았습니다. 복지는 진보의 핵심 의제 중 하나인데 말이죠.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정책만 놓고 보면, 누가 진보이고 보수인지 판가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인물과 특정 정치세력을 무 자르듯 진보다 보수다 판별하긴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대변하는 세력, 즉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따져보면 됩니다. 어떤 계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무슨 집단을 위해 활동하는지 살펴보면 되는 거죠.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정치인이 대변하는 집단과 그 정치인을 따르는 집단을 분리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통적인 백인 노동자, 특히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의 지지율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그들의 목소리를 가장 귀담아듣고, 그들의 주장을 최우선순위로 대변하진 않았죠.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의 집권 여당이 누구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어떤 이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고 있는지 따져보면 이들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아니면 제3의 무엇인지 답이 나올 겁니다. 이번 ‘온 리버티’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하 문재인)을 중심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이 진보가 맞는지, 진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세밀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 진보인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10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앞두고 청와대 경호처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다.
정당정치에서 지금과 같은 진보 대 보수 구도가 형성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입니다. 모든 사회는 핵심 갈등과 균열의 축에 따라 집단이 나뉘고, 그 집단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합니다.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선 정당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죠. 귀족과 부르주아의 갈등에서 자유주의가 발전했고, 왕의 수직적 권력이 부르주아 중심의 수평적 권력으로 이동하면서 영국식 민주주의가 발달했습니다. 이웃 나라인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로 이전하면서 좀 더 급진적인 양상을 띠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초기 영국에서 의회정치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가 국민의 다수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생각을 대변할 정당이 필요했고, 그렇게 태동한 것이 현재의 노동당입니다. 즉,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주요 유럽 국가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존재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 정치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세력은 정책적 대안을 먼저 제시하고 이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아무 대안도 없이 당선돼 뒤늦게 정책을 만들고 통치 이념으로 삼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정당 간 정책적 차이가 없고 기득권만 대표하는 정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서민과 노동 계급의 요구는 대표되지 않고 있다”고 분석합니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선진국가의 의회 정치는 크게 두 개의 축, 부르주아와 노동자 정당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국에선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지적입니다. 한때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대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한국적 진보 정당을 꿈꿨지만, 의석수도 적었고, 명맥이 길게 유지되진 못했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점에선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진보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발전하면서 계급 외에도 다양한 갈등 요소가 생겼습니다. 젠더·세대·문화·환경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대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진 거죠. 이 때문에 유럽에는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는 군소정당이 존재하며, 이들이 연정을 통해 합의점을 찾습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의 의제 역시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그래서 과거처럼 어느 정당과 인물이 진보·보수라며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진보가 대표해야 할 집단, 지켜야 할 가치는 존재하죠. 예를 들어 시장의 문제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냐, 아니면 자율적 조정 기능에 맡길 것이냐와 같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노무현은 한국 사회의 진보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복지와 분배를 제시했습니다.

與 의원들에게 질책받은 노조위원장


▎지난 10월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스타항공 조종사노조가 ‘국토부장관 및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면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는 유작인 [진보의 미래]에서 “진보와 보수는 결국 모두 먹고사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 진보는 복지와 분배를 고민하며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죠. 복지와 분배를 하려면 국가의 개입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큰 정부를 추구하게 됩니다. 국가 재정을 늘려 사각지대를 줄이고, 양극화 해소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죠.

복지와 분배를 통해 궁극적으로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는 시민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사회였습니다. 다만 그 접근법에서 중요한 전제 한 가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구조 안에서 복지와 분배를 추구하는 것이었죠. 즉 전형적인 사회주의 노선, 또는 거기서 비롯된 포퓰리즘과는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아울러 ‘먹고사는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 파트너로서 보수의 존재를 인정했고요. 복지와 분배를 위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면서도, 시장의 자율과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보수의 의견 역시 존중한 것입니다. 다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시절 몇 가지 정책에 대해선 후회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 큰 안타까움을 표현했죠.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경제 문제에 파묻혔다. 사람들의 관심은 경제 문제에 쏠렸고 나의 외람된 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정책이 아니라 감정적 판단으로 선택한다.”([진보의 미래])

그러면서 “나는 분배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분배 정부라고 몰매만 맞았던 불행한 대통령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짜 무너진 것은, 그 핵심은 노동”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때 비정규직 관련 입법이 이뤄졌고, 노동 유연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였고요.

이제 따져봐야 할 질문은 ‘문재인은 진보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지난 10월 20일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인 김진숙 씨가 문재인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김씨는 편지에서 “19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때도 우린 함께 있었고, 1991년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투쟁의 대오에도 우린 함께였다”며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은 열사라는 낯선 이름을 묘비에 새긴 채 무덤 속에, 또 한 사람은 35년을 해고노동자로, 또 한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극과 극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 했죠. 특히 “노동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데, 죽어서야 존재가 드러나는 노동자들”이라고 언급하며 “최대한 어릴 때 죽어야, 최대한 처참하게 죽어야, 최대한 많이 죽어야 뉴스가 되고 뉴스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누군가 또 죽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씨의 편지글 중에서 가장 뜨끔할 만한 대목은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면 가장 많은 피를 뿌린 건 노동자들인데, 그 나무의 열매는 누가 따 먹고 그 나무의 그늘에선 누가 쉬고 있는 걸까?” 김씨는 그러면서 “우린 언제까지나 약자가 약자를 응원하고, 슬픔이 슬픔을 위로해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편지의 핵심은 한때 노동·인권 변호사로 함께했던 문재인이 지금은 왜 노동자의 편에 서 있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재인은 변호사 시절 노동 문제에 앞장섰습니다. 1990년 농성 중인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82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까지 올라갔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주변에서 모두 만류했지만, 당시 그는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며 크레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문재인은 김씨의 지적처럼 이제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직원들은 2017년 문재인 방문 시기를 전후로 정규직화의 기준이 다르고, 나라를 위해 일하던 40대 가장이 북한에 피살돼 그 아들이 울부짖어도 피해자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택배 일을 하던 20대 노동자가 카톡을 남긴 채 과로사할 만큼 노동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다.

친문 이상직 의원이 창업주인 이스타항공 노조에 대해선 집권세력이 오히려 홀대하고, 야당이 감싸 안아주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이삼 이스타항공 노조위원장이 1년 가까이 300억원이 넘는 임금이 체불되고 직원 600여 명이 해고된 상황을 호소하자 민주당 의원들은 “짧게 하라!” “적당히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박 위원장이 “이게 정상적인 나라냐”고 반문했을 때는 임종성 의원이 “연설하러 온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느 정도 해야지”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윤준병 의원은 “일방적으로 하는 얘기다, 오버했다고 인정하라”고 닦달했죠. 반면 국민의힘 김웅 의원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이러겠나”며 박 위원장을 두둔했습니다. 노조를 대하는 모습에서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편견과 정반대인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권력과 이권 매개로 한 조폭처럼 행동”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보 정권이 노동자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비리 의혹이 큰 사주를 엄호하며 감싸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현 정부가 ‘가짜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국내 대표적인 진보 인사로,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경률 경제민주주의21 공동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문재인과 여당은 진보인가?

“진보라고 부를 수 없다. 그저 권력과 이권을 매개로 한 조폭처럼 행동한다. 조국 전 장관 공소장에도 많이 나오는 내용이다. 다른 정치세력과 이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정체성도 없다. 심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뒷골목 깡패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자기들은 진보라 주장하는데.

“진보를 참칭(僭稱)하는 것이다. 진보라면 재벌개혁과 환경문제, 노동정책 등 꼭 필요한 분야에서 뚜렷한 관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이제 ‘가짜 진보’의 멸망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조국 사태 후 진보가 분열되는 느낌이다.

“진보의 분열이 아니라 ‘가짜 진보’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조 전 장관을 옹호하던 세력을 보면 위선이란 말뿐이 안 떠오른다. 현 정부에서 그나마 한 거라곤 최저임금 인상인데, 지난 대선 때 홍준표 등 다른 후보도 모두 공약했던 것이다. 보수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일단 건강한 조직이라야 진보든 보수든 논할 수 있다. 현재로선 두 정당 모두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진보, 보수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두 정당 모두 한국 사회의 양대 기득권일 뿐이다.”

집권세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하는 진보 인사는 김경률 대표만이 아닙니다. 김 대표와 함께 ‘조국흑서’를 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권경애 변호사 등은 차분한 논리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정권의 실체를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앞서 진보 진영의 원로인 홍세화 선생 역시 “더불어민주당엔 민주주의자가 없다”는 말로 집권여당의 문제점을 지적했죠. 학계에서도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진보 지식인의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소수의견 보호하는 것이 자유주의


▎문재인 대통령이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설립했던 노동법률상담소 홍보전단.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박희제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와 같은 진보의 분열을 자유주의의 분리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박 교수는 “하나의 세트로 생각했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분리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조국흑서’의 저자들처럼 여권에 등 돌리는 지식인이 많아지는 것은 집권세력의 반자유주의적 행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민주주의라는 말은 ‘자유주의+민주주의’입니다. 두 개의 가치가 결합돼 있는 것을 일상에서 민주주의라고 줄여 쓸 뿐이죠. 근대의 민주주의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평등한 가치관을 내세우며 시작됐습니다. 이어 귀족의 권력에 대항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로 발전했죠. 그 과정에선 점진적인 권리 확대(선거권 등)가 이뤄졌고요.

하지만 민주주의엔 늘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란 위험성이 도사립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표현처럼 “‘민주’를 다수에 의한 통치로만 인식하고 소수를 억압하는 행태”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죠. 민주주의는 인민(people)의 평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다수결을 핵심 의사결정 도구로 받아들이는데, 그 결과 소수의견이 묵살될 수 있습니다.

이때 소수의견을 보호하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다수결 만능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침탈하고 소수를 억압할 때 자유주의가 견제 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현대 국가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한 세트입니다. 만일 자유주의가 없다면 인민의 독재를 추구하는 전체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처럼 말이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진보의 분열 현상도 정확히 이 지점에 있습니다.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주의가 떨어져 나갔고, 이를 주도하는 세력이 현재의 집권여당입니다. 과거에 진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자유주의자들이 제일 먼저 이탈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조국흑서’ 저자들이 현 정권을 비판한다고 해서 국민의힘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도긴개긴이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리버럴리즘(liberalism·자유주의)’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지만, 미국에선 보통 민주당 성향을 가리키는 말로 ‘liberal’을 씁니다. 즉, 우리말의 ‘진보’에 해당하는 단어가 ‘liberal’이란 이야기죠. 다수의 진보 정당이 그렇듯 미국의 진보 역시 복지를 중시하고, 이를 위해 증세를 택하며,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정책의 밑바탕엔 자유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어떤 진보 정권도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 하거나 다수의 폭정을 용납하지 않죠. 특히 오늘날 ‘민주당=리버럴’ 공식을 만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61년 남북전쟁 후 70년간 ‘만년 야당’이던 민주당을 집권당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자유방임주의와 차별화된 뉴딜정책을 내놓으며 새로운 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었죠. 노변정담으로 대표되는 친밀한 스킨십의 대명사,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 맞선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 결과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으로 남았죠.

권력 남용 경계한 노무현의 리버럴리즘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은 자신의 정치적 롤모델로 루스벨트를 꼽았습니다(2012년 8월 MBC [100분 토론]).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는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한국판 뉴딜’을 내세웠죠. 하지만 대통령의 철학과 리더십이란 관점에서 볼 때 야당과의 소통에 능하고, 자유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던 루스벨트와는 접점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오히려 루스벨트의 정치적 지향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노무현입니다. ‘토론의 달인’이라는 별명처럼 노무현은 표현의 자유를 중시했고, ‘깨어 있는 시민’을 강조하며 공론장을 통한 숙의민주주의를 강조했습니다. 무엇보다 진보의 핵심 의제로 복지와 분배를 내세운 것이 루스벨트의 뉴딜 정신에 제일 가깝습니다.

여기서 노무현과 문재인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노무현은 국가의 역할이 복지와 분배 영역에서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정치·사회 영역에선 엄격한 삼권분립과 시민사회의 견제가 필수라고 생각했죠. 큰 정부를 지향하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때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지, 사상을 검증하고 상대를 적폐로 몰아 무너뜨리는 데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루스벨트 이후 ‘리버럴’이 추구해온 진보의 핵심 가치입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어떤가요. 임미리·진중권과 같은 학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코로나19를 내세우며 과도하게 집회·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개천절 시위 때 광화문광장에 버스 300여 대로 차벽을 세우고 서울 진입로 90곳에 검문소를 설치했죠. 정작 시위대는 드라이브 스루 형태로 퍼레이드를 벌여 전염 우려가 낮았던 반면, 서울랜드 등 놀이동산에는 별다른 조치 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 감염 위험이 컸는데도 말입니다.

시민의 일상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당연시하며, 최근에는 ‘5·18 역사왜곡 특별법’까지 만든다고 합니다. 졸속 부동산 입법으로 개인의 사적 소유까지 국가가 손을 대더니,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까지 조종하려 듭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국가주의의 괴물을 문재인 정부가 되살리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문재인 정권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친문 의원이 법원을 행정부 소속이라 부르며, 법무부 장관과 여당 의원들이 떼를 지어 불과 1년 전 자신들이 칭송해 마지않던 검찰총장을 내쫓으려 합니다. 국회의원 170여 명은 마치 한 사람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듯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목소리를 냅니다. 말과 행동으로 리버럴을 몸소 실천한 노무현이 그리던,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수많은 노동자가 꿈꿨던 ‘진짜 진보’의 가치는 어디로 간 걸까요. 죽은 노무현이 살아 있는 문재인에게 묻습니다.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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