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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특집] 성공한 대통령을 위한 조건 (3)외교력 확대 

대미 관계와 대중 관계는 제로섬 게임 아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미·중 균형외교에서 한·미·일 가치동맹으로 축 이동, 주중 대사 발탁 중요
한·일 관계는 DJ-오부치 선언 정신 복원해야… 국력 걸맞은 ODA(정부개발원조)도 필수


▎2022년 3월 11일 윤석열 당선인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통화하고 있다. 윤 당선인에게는 실리 외교와 가치 외교 사이의 역동적 균형이 요구된다. /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하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외교에서 대격변이 예상된다. 기존 문재인 정부와 확연히 다른 정책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제환경의 변화와 함께 한국이 선진국이 된 뒤 처음 맞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비롯한 수많은 요인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문 정부가 미국·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왔다면, 윤 당선인은 한·미 동맹의 ‘재건’에 무게를 싣고 있다. 특히 한·미 동맹을 군사·안보 분야를 넘어 경제·신기술·공급망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진화시킨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한·미 동맹을 질적으로 더욱 심화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한·미·일 삼각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윤 당선인이 취임하면 대외 분야의 포괄적인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과 일본은 그동안 한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기다려왔지만,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랬던 것이 이번 정권 교체로 변화의 물꼬를 튼 셈이다. 그동안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요약되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나, 셰일 혁명을 배경으로 진행돼온 미국의 고립주의 경향 등 다양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이 능동적으로 대처할 기회를 맞은 셈이다.

대미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2021년 5월 문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성명문이다. 이 성명문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양국 동맹을 확인하고, 전시작전권 전환에 관해 재확인했다. 아울러 2017년 판문점 선언(4·27선언)과 2018년 북·미 정상회담에 기초해 북한에 대한 외교 노선과 인권 개선 및 인도적 지원 협력을 확인했다. 아울러 양국 간 투자를 확대·촉진하고, 차세대 기술을 주도하고 발전시키기로 약속했다. 이와 함께 코로나19와 관련, 백신 생산 능력 확대와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여기에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라는 소득도 있었다. 이는 단순한 현안 협의를 넘어 양국이 궁극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가치 외교의 극대화로 판단할 수 있다. 대북 문제와 대중 문제에서 일부 간극과 타협이 있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미래를 위한 합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문 정부가 윤 당선인에게 남긴 대미 외교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윤 당선인이 “남북관계 대화의 문은 열어놓되 북한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해왔음에 비춰볼 때, 판문점 선언 계승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하지만 다른 유산은 자연스럽게 계승할 수밖에 없다.

바이든과 기시다가 尹 당선에 반색한 이유

대선 직후 미국과 일본 정상이 윤 당선인과 통화하면서 한·미·일 삼각 협력과 조율을 유달리 강조한 점만 봐도 이를 재확인할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월 10일 윤 당선인과 통화에서 “취임 뒤 이른 시일 안에 만나서 한·미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논의를 하기를 기대한다”며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위협인 만큼 한·미·일 3국의 긴밀한 조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도 3월 11일 윤 당선인과 통화에서 “한·미·일 3국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국의 한·미·일 삼각 연대 동참을 얼마나 갈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 당선인은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개국 협의체인 쿼드의 단계적 가입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특히 중국이 거부 반응을 보여온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를 한국이 직접 사들여 한반도에 배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한국의 방어용 무기 구매에 중국이 반발할 경우, 주권침해로 비판할 수 있음을 고려한 발언이다.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사드 추가 배치 금지와 미 미사일방어망 배제, 한·미·일 군사동맹 불참 등 문 정부의 이른바 사드 ‘3불’ 입장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결국 대중 정책의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미국과 갈등 관계에 있는 중국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를 통해 11일 윤 당선인에게 전달한 축전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중국 측은 한국 측과 함께 수교의 초심을 굳게 지키고 우호 협력을 심화해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촉진해 양국과 양국 국민에게 복지를 가져다줄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주목할 단어는 ‘초심(初心)’이다. 당선 축하 메시지에서부터 기존의 대중 정책을 바꿔서 미국에 기울어지지 말라는 경고음을 낸 셈이다. 이는 미·중 경쟁 상황 속에서 중국의 조바심을 보여준 것이자, 대한민국의 중요성을 확인한 사건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에서 한국이 최소한 미국 편을 적극적으로 들지 않고 빠져주기를 바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이 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을 기치로 내건 미국과 손잡고 동맹을 강화하면서 한·미·일 삼각 연대를 강화할 경우, 중국으로선 그야말로 악몽의 순간이다.

윤 당선인은 쿼드는 물론 파이브아이즈(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정보동맹)와 오커스(미국·영국·호주의 안보동맹) 등 미국이 주도하는 소규모 다자 안보 협의체 참여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모두는 인도·태평양 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이 지역에서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하려는 미국의 국가전략과 맞물려 있다. 이는 당연히 한·중 관계에 외교적 ‘콜래트럴 대미지(부수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요인이다. 이미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3월 7일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계기로 연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소그룹을 만들어 중국을 압박해 세계 평화·안정에 충격을 준다”며 기민하게 견제에 나섰다.

윤 당선인은 한·중 관계와 관련해 ‘상호존중의 새로운 한·중시대’를 내걸었다. 중국에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는 문 대통령의 친중 외교에 대한 정치적인 반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방중했던 문 대통령은 12월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으로 치켜세우고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지칭하며 중국이 주변국을 보다 넓게 포용해줄 것을 강조했다. 이는 문 대통령의 방중 당시 혼밥 사건, 한국 기자가 폭행당한 사건 등과 맞물려 한국 일각의 반발을 불러왔다.

한·중 관계 전환이 한국 경제 리스크 될 수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 윤석열 당선인과 가장 먼저 통화했다. 한국을 대중국 포위망에 넣고 싶어 하는 속내가 읽힌다. / 사진:바이든 대통령 트위터
문제는 한·중 관계 전환에 따른 한국 경제 이익의 보호와 리스크 관리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 중국이며,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 한국이라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은 한국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신뢰할 수 있는 중간재를 대거 수입한 뒤, 이를 가공해 미국에 수출하는 경제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대미 흑자를 지나치게 키워 미·중 갈등의 한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미 관계에서 신기술과 공급망을 거론하는 것은 이런 중국에 지식재산권 등을 앞세워 압박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궤를 함께한다. 대미 관계와 대중 관계가 서로 깊숙이 맞물려 있다는 의미다.

윤 당선인의 발언을 보면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도모한다’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일종의 균형과 실리 외교에서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 동맹체의 일원임을 명확히 하는 가치 외교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윤 당선인의 외교·안보·남북 관련 공약을 살펴보면 새로운 변화와 폭과 깊이가 보인다.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이 제대로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윤 당선인은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사를 숨기지 않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윤 당선인은 선이 굵으면서도 양국 관계에 정통하고 유능한 협상가를 주중 대사로 발탁할 필요가 있다. 대중 외교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열 때라는 이야기다.

한·일 관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윤 당선인이 ‘김대중·오부치 선언 2.0 시대’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2021년 11월 목포의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강조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김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 7~10일 일본을 공식 방문해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회담하면서 나온 선언이다. 당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평가하면서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윤 당선인이 후보 시절 이를 거론한 것은 한·일관계 개선을 김대중 대통령의 계승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함으로써 민주당 지지 세력의 반발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당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것은 물론 민주당 곳곳에서 ‘죽창가’나 ‘이순신 장군의 열두 척 배’는 물론 심지어 ‘도쿄올림픽 보이콧’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을 적대시해온 정책을 뒤집겠다는 의사 표시다. 이를 위해선 한·일 간에 걸린 강제징용 판결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한 번에 해결할 수 없는 한국 외교의 또 다른 시험대다.

한·일 관계, 역사와 현재 구분하자


▎2022년 3월 11일 윤석열(오른쪽) 당선인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로부터 ‘초심’을 강조한 시진핑 국가주석의 축전을 받았다. / 사진:연합뉴스
이럴 때는 1972년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중·일 국교협상을 할 당시의 지혜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저우 총리는 “일본 인민과 중국 인민은 모두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라고 강조해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 국민을 구분함으로써 미래지향적 태도를 보였다. 중국이 아무리 항일운동을 찬양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을 비난해도 양국 사이의 외교 문제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의미다. 역사와 현재를 분리한 지혜를 배울 때다. 이를 위해 윤 당선인은 한·미와 한·일 간 지속적인 대면 정상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 영토를 비롯한 어려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룬다는 대국적인 조치도 양국의 화해에 기여했다. 한국에 대미 관계와 대중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중 외교를 희생해서 대미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이 윤 당선인의 취임 뒤 한국 외교가 할 일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드러난 힘의 논리를 앞세운 국제정세의 변화,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난 국가 이기주의 등 새로운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고려해 한국의 발언권과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인 러시아가 주변의 우크라이나를 무도하게 침공했는데도 교민의 안전이나 경제적 피해만 따지는 것은 경제성장과 군사력 확보, 그리고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한국이 할 일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한국 외교의 최대 과제인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의 외교로는 한국이 국제사회에 제대로 설 수가 없다.

한국은 2021년 국제통화기금(IMF) 명목 금액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다. 구매력 기준(PPP)으로 1인당 GDP 4만7027달러로 4만4585달러인 일본보다 많고, 영국의 4만7089달러와 프랑스의 4만9492달러보다 조금 적다. 윤 당선인이 취임하면 한국이 일본보다 PPP로 1인당 GDP가 일본을 넘어선 뒤 들어선 첫 지도자가 된다.

전 세계가 한국을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백신 나눔이나 정부개발원조(ODA)의 양적·질적 확대를 비롯한 국제사회 기여에 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외교가 북한과 미국·중국·일본만 바라보던 시대를 넘어 세계 속에서 역할을 본격적으로 확대할 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강대국 외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견국 외교에 나서야 한다. 국제사회의 평화가 한국의 안전과 번영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시대다. 국제사회의 각종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한국 외교의 길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 난민이나 기아, 기후변화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과 해당 국가에 대한 ODA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특히 기후변화 문제에서는 무리하게 목표치를 높여 체면치레하는 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한국의 다양한 소프트파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전략도 필요하다.

대한민국 위상에 걸맞은 프로젝트 나올 때


▎2018년 4월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회동했다. 그러나 윤석열 당선인이 ‘판문점 선언’을 계승할지는 미지수다. / 사진:연합뉴스
이를 위해 국제수준의 글로벌 인도주의 단체와 ODA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네덜란드·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은 국가가 곧 인도주의와 ODA 브랜드가 되고 있다. 전 세계에 농업·교육·문화와 관련한 활동을 하는 국가 주도 또는 민간과 결합해 시너지를 올리는 글로벌 인도주의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서도 우크라이나나 난민들이 몰려드는 주변 국가에 직간접적으로 인도주의 지원 시스템을 가동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코로나19와 관련해 한국의 백신 공급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국제인도주의 네트워크와 협력해 다양한 국제적 지원에 힘쓸 필요가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한국이 글로벌 백신 불평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세계적인 백신 공여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앞으로 코로나 백신이 충분해지면 백신 접종률이 낮은 아프리카 국가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백신 확대 프로그램을 한국 주도로 가동할 필요가 있다. 백신 불평등 해소 노력은 새로운 변이의 출현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기술력과 바이오 생산력, 그리고 자금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더 나아가 생전에 글로벌 백신 확대 프로그램을 가동했던 이종욱(1945~2006)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나 남수단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이태석(1962~2010) 신부를 기리는 제3세계 보건의료농업 협력 프로그램을 정부 주도로 가동하는 방법도 있다. 구체적으로 아프리카나 중동 등에 이종욱 백신 연구소나 이태석 의과대학·약학대학·간호대학·보건대학원을 설립하는 방안도 있다.

이를 위해 한국이 국제사회에 직접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글로벌 미디어를 만들 필요성이 대두한다. 현재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1922년 설립된 영국의 BBC나 1980년 개국한 미국의 CNN을 비롯한 영어권 글로벌 뉴스 방송의 아성에 프랑스·러시아·중국·카타르의 국제뉴스 채널이 맹렬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87년 자크 시라크 당시 총리가 상원 연설에서 “국제뉴스 영향력을 독점하는 영어권 뉴스매체와 동등한 프랑스 시각의 뉴스 방송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프랑스권 대안 글로벌 뉴스 채널 구상이 시작됐다. 특히 2003년 2월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가 유엔 총회에서 미국 주도의 아프가니스탄전·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기립박수까지 받았음에도 CNN·폭스뉴스·MSNBC 등 미국 매체가 이를 보도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고 프랑스만의 글로벌 미디어 탄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6년 12월 프랑스어와 영어로 각각 방송하는 24시간 글로벌 뉴스 채널인 ‘프랑스 24’가 개국했으며, 2007년 4월엔 아랍어, 2017년 9월 스페인어 채널을 각각 개국하며 전 세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도 2005년 12월 24시간 글로벌 영어뉴스 채널인 RT를 모스크바에 개국했다. 서방 언론의 부정적 모스크바 당국 묘사에 대응하는 것이 주요 설립 목적이다. 2007년 5월 아랍어 채널인 러시아 알야움, 2009년 12월 스페인어 채널인 RT 악투알리다드를 추가했다. 2010년 RT 아메리카를 워싱턴에, 2014년 영국·아일랜드 대상의 RT UK를 런던에 각각 세웠다. 2014년 베를린에 독일어 채널을 개설해 웹사이트로 송출하고 있다. 2017년엔 파리에 프랑스어 채널을 설립했다. RT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의 자회사를 앞세워 서구를 상대로 여론전을 전개해왔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는 역선전에 이용됐다는 비판도 많다.

외교는 국력이자 브랜드다

중국도 뛰어들었다. 1992년 설립된 CCTV-4에서 1996년부터 매일 3시간 30분간 영어뉴스를 내보낸 것이 중국 국제뉴스의 시작이다. 2000년 9월에는 아예 24시간 글로벌 영어 뉴스 채널인 CCTV-9를 별도 개국하고 CCTV-4는 중국어 전용 국제채널로 전환했다. CCTV-9는 2016년 CGTN(중국 글로벌 텔레비전 네트워크)으로 개칭했다. CGTN은 현재 70여 개국에 지국을 운영하며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아랍어·러시아어·일본어·엔터테인먼트·다큐멘터리 등 10개 국제채널을 운영한다.

인구 260만인 중동 산유국 카타르의 알자지라 방송은 갈수록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1996년 11월 범아랍권 아랍어 방송으로 개국했으며, 1999년 1월 24시간 뉴스 방송을 시작했다. 2006년 11월 카타르의 수도 도하와 영국 런던에 각각 보도본부를 운영하는 중동 최초의 24시간 영어 뉴스 채널을 개국했다. 알자지라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 2003년 이라크전을 각각 카불과 바그다드에서 현장 보도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보도하면서 자유 언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평가다. 부패와 부정, 독재와 인권유린이 만연한 중동에서 성역 없는 보도로 명성을 높였다. 2017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국이 카타르와 단교하고 경제적으로 봉쇄한 외교 사태에서 비교적 카타르에 호의적인 국제 여론이 형성되는데 알자지라의 존재가 한몫했다는 관측도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영어 채널이라곤 아리랑 채널과 KBS 국제방송 등에 국한돼 있다. 한류 소식과 한국 뉴스를 전달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젠 한국의 눈으로 글로벌 뉴스를 전달하는 수준으로 도약할 때다. 한국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은 역할을 하려면 이런 글로벌 다국어 미디어가 필수적이다.

이제 한국 외교는 총체적인 국력을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극대화해야 할 때를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 시대는 한국 외교력의 확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력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활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명예가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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