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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안보 경고등 | 북한의 7차 핵실험이 몰고 올 후폭풍 

문재인의 “핵 없는 한반도” 공염불에 그칠까 

문재인-김정은 비핵화 합의에도 북핵 실전배치 능력 사실상 완성해
양산체제 돌입 후 첫 실험… 한반도에서 핵 경쟁 도미노 이어질 수도


▎2017년 11월 29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 지시를 친필 명령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 발사 장면. / 사진:연합뉴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달될 시기는 북한의 최대 명절인 4월 15일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을 지난 시점일 것이다. 필자가 독자들이 글을 접하게 되는 시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북한 당국이 최대 명절인 태양절 즈음에 핵실험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최근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역시 핵실험 전망을 내놓았다. 만약 글이 출간되기 전에 평양이 핵실험을 한다면 글은 과거를 기준으로 전개될 것이고, 반면 출간 후에 핵실험이 진행되면 글은 미래진행형이 될 것이다.

올해 집권 10년을 맞는 김정은 위원장은 1월 당 중앙위에서 할아버지 김일성 탄생 110주년, 아버지 김정일 탄생 80주년을 맞이해 각종 이벤트와 성대한 경축 행사를 지시했다. 2월 김정일 생일은 중국의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과 겹쳐 조용하게 지나갔다. 올림픽 폐막 이후 미사일 도발이 시작됐고 ICBM 발사까지 이뤄졌다. 이 원고를 집필하는 동안 지난 5년간 방치됐던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 보수공사가 시작됐다. 이미 6차례 핵실험으로 노하우가 축적된 만큼 실험에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다. 풍계리 지하 갱도를 개보수하는 사진이나 동영상 모습을 예고편으로 잔뜩 변죽을 울려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사전 정지 작업이 필수적이다. 요컨대 김정은의 정무적인 판단이 중요할 것이다.

변수는 제재 해제를 위한 대미 압박 타이밍이다. 침공 8주째를 맞이하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종식이나 지속 등은 핵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독립변수다. 미·중 및 미·러 갈등시대에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은 북한은 동유럽까지 전선이 확대된 미국을 압박해 대북제재를 무력화시키려는 최적의 시점을 포착하려고 한다. 남한의 대통령 취임식(5월 10일)은 큰 독립변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대북제재는 미국과의 빅게임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평양 수뇌부의 판단은 4·27 판문점선언, 9·19 군사합의 등을 통해 터득한 교훈이다.

북한의 7차 핵실험은 한반도 안보의 레드라인이 아닌 마지노선이다. 프랑스 육군 장관이었던 앙드레 마지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항구적인 방어수단으로써 마지노 방벽을 구축했다. 이전의 요새보다 매우 발전한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이 방어선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에는 건설되지 않았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벨기에를 침공했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마지노선이 돌파됨으로써 프랑스는 함락됐다.

김일성·김정은 생일 맞아 미사일·핵실험 긴장 고조


▎2017년 9월 3일 오후 서울역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한 속보를 시민들이 보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한의 3축 미사일 방어체계를 우회하는 비대칭적 무기가 될 것이다. 남한 군 당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응해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와 유사시 북한 핵·미사일 시설을 선제 타격하는 ‘킬체인(Kill Chain)’,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 ‘대량응징보복(KMPR)’ 전력을 갖춘다는 계획이지만 핵폭탄의 위력을 고려할 때 반격이 가능할지 미지수다.

북한의 7차 핵실험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열지 말라는 뚜껑을 개봉하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악마들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졌다. 이처럼 한반도 안보의 희망이 사라지고 온갖 재앙이 닥쳐서 궁극적으로 안보의 마지노선이 돌파되는 모양새다. 지정학적으로 ‘낀 국가(pivot state)’인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국제정치에 핵 도미노 게임의 서막을 열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가뜩이나 비상상태 국면인 대만은 물론 중국의 대만 침공이 원려(遠慮, 장기적 근심)가 아닌 근우(近憂, 단기적 근심)라고 고심하는 일본 역시 피폭국가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핵 보유에 대한 담론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를 것이다.

한국인의 열망이나 거부감에 상관없이 핵무기가 남북관계 전면에 등장할 경우 남북한은 물론 주변국 간의 갈등은 과거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될 것이다. 일부 진보 계층에서는 핵의 실전 배치라는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고 핵실험 전후가 비슷하다며 태연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특히 동포에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김여정의 허언을 들먹이며 별일 아니니 당국에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층에서는 한반도 무력 갈등의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다고 심각한 위협을 느낄 것이다.

7차 핵실험 이후는 기존의 6차례 핵실험과는 다른 실전 양상이 전개될 것이다. 해발 2200m 만탑산 지하 동굴 2번 갱도에서 핵이 과연 폭발할 것인가를 테스트했던 2006년 1차 핵실험은 이미 16년 전 일이다. 이전의 5차례 핵실험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단계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 플루토늄 방식인 데 반해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은 농축 기술이 확보돼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생산시설을 숨기기 편한 우라늄 방식으로 이뤄졌다. 핵무기 양산 체제의 길목에 들어선 것이다. 5차 핵실험까지는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이라면 6차 핵실험은 핵을 가슴에 안고 사는 양상이다.

6차 핵실험 후 북한은 공식 발표를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탑재 가능한 수소폭탄 실험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밝혔다. 스마트폰 기술을 빗대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간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2017년 5월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에 눈을 감았다. 우라늄 방식도 수소폭탄 성공도 모두 불편한 진실로 외면하고 평양과의 대화에 매달렸다. 핵 문제는 아예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지도 못하고 판문점 도보다리를 김정은과 걸으며 의문의 USB를 건넸고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만들어냈다. 이후 9월 19일에는 능라도 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을 대상으로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직접 7분간 연설했다.

“평양 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 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기술적 핵실험 끝낸 북, 본격 무력시위 나설 듯


▎2018년 9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핵 위협 없는 한반도를 만드는 데 김정은 위원장과 확약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무장해제 수준의 9·19 군사합의를 하고 김정은 내외와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월 10일 임기 종료를 3개월 앞두고 연합뉴스 및 세계 7대 통신사와 합동으로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능라도 연설’을 남북관계에서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로 남한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한반도를 핵장춘몽이었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가장 아쉬운 점을 ‘하노이 노딜’로 언급한 만큼 김정은보다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원망이 컸을 것이다.

사실 이제 우라늄 농축이 완벽하게 이뤄짐으로써 북한에게는 기술적 차원의 실험도 불필요하다. 6차례 핵실험으로 폭발 강도와 위력 등도 충분히 검증된 만큼 7차부터는 핵탄두 소형화·경량화에 따른 정치적 함의가 담긴 무력시위 양상을 띠게 됐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단거리 탄도미사일부터 중장거리, 극초음속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해 다탄두 화성-17형의 괴물 ICBM까지 30여 차례 미사일 발사가 이뤄졌다. 핵은 무기고에 있다고 해서 누가 순순히 이자를 지불하거나 보상하지 않는다. 핵을 소형화·경량화해 미사일에 장착시켜 상대방 국가를 공격할 가능성으로 협박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본질이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B-29 폭격기를 동원해 최초로 핵무기 두 발을 일본에 투하했다. 히로시마(廣島)에는 우라늄 방식의 핵폭탄, 나가사키(長崎)에는 플루토늄 방식의 핵폭탄이었다. 당시 핵무기는 20㏏(kiloton)의 위력을 과시했다. 폭발 순간 태양을 1000개 합친 것 같은 강력한 섬광과 함께 자연 폭풍의 100배(초당 3200m)나 되는 강력한 열폭풍이 발생했다. 폭발 지점 부근에는 섭씨 3000~4000도의 고열이 발생했다. 히로시마의 경우, 전체 사망자 33만 명 중에서 사건 5년 후까지 20만 명이 사망했다. 건물은 7만6000호 중 4만8000호가 완파, 2만2000호가 반파됐다. 나가사키에서도 반경 5㎞ 내에서 7만여 명이 직접 사망했다.

핵무기는 다른 무기와는 비교 불가한 파괴력을 지녔다. 핵무기 1㏏은 TNT 폭약 1000t의 폭발력과 동급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15㏏ 수준이었다. 핵무기가 주는 소멸의 위력은 적에게 심리적 공포를 심어준다. 재래식 무기 수천 개가 핵무기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는 극단적인 현상을 핵무기의 ‘비대칭성(asymmetry)’이라고 한다. 강대국과 독재국가 지도자들이 핵 보유를 고집하는 이유다.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했던 일본은 핵무기 피폭을 자초했다. 역설적으로 절대 항복하지 않을 일본과의 전쟁을 신속하게 종료시키기 위해 미국은 가공할 핵무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가난한 신생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핵실험에 소극적이었으나 군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핵무기 개발을 승인했다. 1964년 마침내 핵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어차피 써먹지 못하는 물건이다. 미·소가 중공이 핵 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고 언급했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핵무기 경쟁, 한반도도 예외 아냐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가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프랑스 상고방사와 ‘재처리연구시설 공급 및 기술용역시설 도입계약’을 체결하는 장면. 미국의 감시를 피해 서울시청 옆 옛 원자력병원 회의실에서 비밀리에 계약했다.
이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인도는 재래식 무기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10년 만인 197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의 핵무장은 수천㎞ 국경선을 사이에 둔 파키스탄의 핵무장으로 이어졌다. 1947년 종교 문제로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은 15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유럽에 다국적 우라늄 농축회사인 유렌코사에 근무했던 압둘 칸(1936~2021) 등 유럽에서 공부하던 자국 출신 핵물리학자들을 소환해 핵 개발에 매진했다. 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은 1998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북한 등에 핵 개발 노하우를 전파하는 ‘핵 상인’으로 악명이 높아서 2021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 등 서방세계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중국과 인도, 인도와 파키스탄 등 핵무장 국가들은 ‘공포의 균형(Balance of Horror)’을 이뤘다. 핵무기 경쟁은 제3세계 국가들로 퍼졌다. 이스라엘은 프랑스 유대인들이 핵 개발을 주도했고 미국이 묵인했다. 이후 이란의 핵무장이 추진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이스라엘과 이란 간 막후 첩보 공작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일단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7월 이란 핵 협상(JCPOA)이 타결됐으나 트럼프 행정부 들어 협상 파기와 지속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치열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란 핵 협상은 복원을 둘러싸고 제재 해제와 비핵 조건 등이 진통을 겪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위협은 남한에 대한 겁박 수준을 넘어섰다. 김여정 부부장은 4월 들어 “핵 보유국에 대한 선제타격? 가당치 않다. 망상이다. 진짜 그야말로 미친놈의 객기다”라며 거친 언사를 동원했다. 또한 “남조선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득이 우리의 핵 전투 무력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까지 간다면 무서운 공격이 가해질 것이며 남조선군은 괴멸, 전멸에 가까운 참담한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위협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핵 과녁이 되고 싶어 몸살인가’라는 제목의 4월 5일 북한 매체 [조선의 오늘] 기사는 “목숨을 놓고 도박하는 미친놈이 남조선에 있으니 그자는 다름 아닌 국방장관이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북한은 다음 날에는 대외 선전매체를 총동원해 서욱 국방부 장관의 사전 원점 정밀타격 발언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북한은 이날 우리민족끼리, 메아리, 통일의 메아리, [통일신보], 조선의 소리 등 5개 선전매체에서 장관 비난 기사 10여 개를 집중적으로 게재했다. 특히 매체들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최근 두 차례 담화에서 핵 보유국을 자청하고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 대목을 확대 재생산했다.

북한의 핵 위협 이후 한국의 안보 불안은 외국에서도 주요 관심사가 됐다. 소련 해체 후 1990년대 초 스스로 핵을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핵 보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4월 6일 보도했다. [NYT]는 전날 북한이 남한과의 군사대결 상황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경고한 사실을 덧붙이며 1970년대 미국의 핵우산 안보 보장을 대가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핵 프로그램을 중단한 한국이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며 핵 보유 포기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우려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핵 자극받은 한국, 국민 4명 중 3명 ‘핵 보유 찬성’


▎2004년 10월 20일 ‘남핵 파동’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한국 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추출실험에 대한 조사를 위해 시료 채취 장비를 차량에 싣고 있다.
[NYT]가 지적한 대로 한국인의 안보 불안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중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가 김여정의 표현대로 핵 보유국과 재래식 보유국의 구도로 고착화하는 상황은 한국의 북핵 억지를 위한 핵 개발 의지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미국 시카고 국제문제협의회(CCGA)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21년 12월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한국 성인 71%가 핵무장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이고 김여정의 핵 보유국 발언 이전에 국민 4명 중 3명이 찬성한 셈이다. 올 4월 기준으로 조사한다면 찬성 여론이 적어도 80% 수준을 상회할 것이다. 특히 자체 핵무기 개발과 미국 핵무기의 한국 배치 중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67%가 ‘자체 개발’을 택했다. ‘미국 핵무기 배치’는 9%였다. ‘한국에 핵무기가 없어야 한다’고 한 응답자는 24%였다.

미국 다트머스대 국제학부의 제니퍼 린드, 대릴 프레스 두 교수는 2021년 10월 7일 [워싱턴포스트]에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어야 할까?”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부부 교수인 두 전문가는 ‘자국의 지상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비상사태 시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할 수 있다’는 NPT 10조를 근거로 한국의 핵 보유가 합법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봤다. 북한의 불법적 핵무기 개발과 이에 따른 위협이 ‘비상사태’로 간주될 수 있으며,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북한의 행동에 대한 비례적 대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중국의 부상과 북핵 고도화로 한·미 동맹이 약화하고 있으며, 한국의 핵무장만이 이를 해결할 방책일 수 있다는 논리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식 핵 공유에 미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는 선택지는 한국의 자체 핵무기(핵무장) 획득이라고 이들은 판단했다. 이들은 2021년 9월 국방연구원이 발행하는 영문 학술지에 “위기에 처한 동맹을 위한 다섯 가지 미래(Five Futures for a Troubled Alliance)” 제하의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미국 학자가 한국의 핵무장을 미국이 지지해야 한다는 최초의 학술논문으로 평가된다.

“북핵이 한국의 핵보유 명분 될 수도”

하지만 한국의 핵 개발은 간단치 않다. 한국은 핵 개발 트라우마가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 개발 의욕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무력화시킨 과거는 미·소 냉전시대의 스토리이니 과감하게 생략한다. 미국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재미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 박사가 등장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식의 소설만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미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아시아에서의 미군 역할 축소)’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과 기술 공급 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 때문에 1976년 ‘핵 개발 포기’ 의사를 통보했다. 미국 CIA 등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10·26 사태로 숨을 거둘 때까지도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 실험실에서 진행한 연구 차원의 우라늄 분리 실험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심각한 단속 대상이었다. 원자력연구원은 당시 분리실험을 통해 우라늄 0.2g을 추출했다. 2004년 하반기 세계 외교가를 강타한 이른바 ‘남핵(南核)’ 파동의 실마리가 된 이 사건은 한국에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과학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이 빚어낸 해프닝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심지어 혈맹(血盟)인 미국과 전통 우방국들이 안보리 회부를 주도하고 나서면서 한국을 막다른 코너로 밀어 넣었다.

외신들은 “한국이 핵 개발에 나섰다”며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각국 언론은 “양은 미미하지만 무기급에 매우 근접”, “과학자들은 정부운영 연구소 소속” 등 한국 정부의 개입 가능성을 거론하며 각종 의구심을 쏟아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부 장관도 각종 정상회담이나 외교장관 회담이 있을 때마다 실험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또 국제사회의 의혹 확대 차단을 위해 ‘평화적 핵 이용 4원칙’을 천명하기도 했다. 수개월간 세계 외교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남핵 파동은 IAEA 이사회가 ‘이 사건과 관련된 핵물질이 유의미한 양이 아니며 현재까지 실험이 없었고 한국의 시정조치와 사찰 협조를 환영한다’는 의장 결론(Chairman’s Conclusion)을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정부는 대전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이라는 기관까지 만들어 자체 통제에 나섰다.

다만 당시는 북핵 실험 이전이었고 핵 개발이 금기시되는 국제정세가 주류였지만 2022년 북한의 핵 보유가 실전 배치 수준이고 한국의 안보 불안이 간단치 않기 때문에 상황은 달라졌다. 2015년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제목만큼 상황 변화에 필요한 정교한 로드맵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나설 수는 없고 언론과 학계의 담론 전개부터 시작돼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다. 다만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이를 앞당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2205호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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