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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어민 북송·해수부 공무원 피살 부른 남북의 갑을 구조 

허망한 北 최고지도자 답방 집착이 가져온 비극 

진보 정권 들어설 때마다 평양 찾아 북한 지도자 ‘답방’ 올인
노골적인 거절·면박에도 자세 낮추다 국민 보호 의무 저버려


▎북측 지도자의 답방을 성사시키려는 남측 정권의 과욕은 때때로 대등 외교의 본질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왼쪽부터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2007년 10월 2일 평양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2018년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회담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2000년 6·15 공동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역대 진보 정부에 족쇄였다. 6·15 공동선언은 5개 항과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答訪) 관련 부가적 문안으로 구성돼 있다. 마지막 부가 문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DJ는 서울로 귀환한 이후 답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임기 말로 들어선 2002년 가을 당시 청와대 고위 당사자는 ‘김 위원장이 2002년 12월 대선 직후부터 내년 2월 사이에 답방할 계획’이라고 거론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남아 있고 차기 대통령 새 당선자가 나온 시점에 답방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는 김 대통령과 한 약속도 지키고 새 당선자와 상견례까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거양득 방안이었다. 특히 대선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와대는 답방을 사전에 못 박으려 고심했다. 하지만 평양 최고지도자의 답방은 서울의 희망대로 진행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현안이었다.

정몽준 의원과 단일화해 노무현 후보가 당선했지만, 김정일의 답방은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2002년 말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불법송금 의혹을 제기했다. 이어진 대북 송금 특검으로 답방은 아예 동력을 상실했다. 2004년 3월 28일 대법원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4명에 대해 “피고인들이 재정경제부·통일부 몰래 북한 측에 4억5000만 달러를 보낸 행위 자체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DJ는 답방이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고 자신이 특사로 방북해서 김정일을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은 권력에서 물러난 DJ를 평양에 초청하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02년 5월 11~14일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답방 이야기를 거론했다. [워싱턴 타임스]는 2002년 5월 15일 자 외신을 인용해 “박 의원이 최근 북한을 방문, 김 위원장과 회동한 자리에서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서울 답방 성사 여부를 묻자 김 위원장은 약속을 존중, 답방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박 의원은 “김 위원장은 답방하겠다는 용의를 분명히 밝혔다”면서 “그는 적절한 시점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여전히 ‘적절한 시기’가 핵심 표현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평양의 최고지도자 답방에 올인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송금 특검에 의해 박지원 전 장관 등이 처벌되면서 김정일 답방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대선 2달 전인 2007년 10·4 정상회담으로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고 주력했으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답방 공작은 끝이 났다.

2007년 10월 평양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 답방을 요청했을 때에도 김정일은 “우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답방하는 방안을 추진하자”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김정일은 답방에 대해 “자신은 분위기가 더 무르익으면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고 노 대통령은 전했다.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으나 분명한 점은 지난 2000년부터 요청했고 합의문에 포함되기도 했던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이로써 지난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 때와는 달리 2007년 2차 공동선언에서는 김 위원장의 답방 부분이 빠지게 됐다. 사실상 북한이 답방이라는 단어조차 거론하기를 기피한 셈이다.

남측 답방 요구마다 ‘적절한 시기’ 반복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역대 대통령들이 서명한 공동선언문에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답방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었지만, 답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종착지도 답방이었다. ‘적절한 시기’를 만들려고 당시 자칭 국정원 지북통(知北通)은 혈안이 됐다. 답방 성사라는 대북 미션이 정보기관의 존재 의의냐는 자조적인 한탄이 세곡동 내부에서 나올 정도였다. 공개적인 논의가 어려우니 정보기관이 물밑에서 끈질기게 평양 통전부 라인을 구애했다.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파서블로 바꾸려는 과정은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평양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무조건 금기였다. 올 마음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오게 하는 과정은 남북관계를 갑을(甲乙) 관계로 전락시켰다. 왜 진보 정부는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며 평양 지도자의 답방을 성사시키려고 했을까?

첫째, 대북 불신 해소의 도깨비방망이로 간주했다. 북한 지도자가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서울 답방만 한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민족 공조라는 키워드를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평양에 대한 긍정 여론몰이를 하는 데 답방은 최적의 소재였다. 순서상으로도 서울에서 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홈그라운드인 평양에 가서 연속 정상회담을 하니 오해도 많이 받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불리한 일들만 벌어지고 있다는 보수 진영의 비판을 불식시킬 수도 있었다.

둘째, 6·15 공동선언 제2항은 묘한 말장난이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알 듯 말 듯한 조항을 발전시키려면 답방이 필수적이었다. 공허한 통일 논의를 촉발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1961년 남북 학생회담 요구 집회에서 나왔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처럼 감성적인 통일론을 확산시키기에 필수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비무장지대의 대북 방어 태세를 이완시키는 전략이다. DMZ를 무력화시키는 최고지도자의 초법적 행태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망상이었다. 9·19 군사합의로 경계 태세가 흐지부지된 상태에서 김정은의 답방이 이뤄지면 종전선언으로 유엔사를 해체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유엔사의 해체는 주한미군 철수로 연결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성립한다.

하지만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남한 답방에 무관심했다. 현금 4억5000만 달러를 들고 와서 겨우 성사된 6·15 정상회담이었지만, 김정일은 남한 방문에 뜻이 없었다. 상호 호혜적으로 공동선언에 답방 단어를 넣었지만, 애당초 서울에 가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서울에 가본들 추가로 돈을 더 수령할 것도 아니었고, 환영 일색도 아닌 상태에서 최고지도자의 신비성과 위상만 저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평양의 지도자는 “통일대통령이 되어 경의선을 타고 남으로 갈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해왔다. 평양 입장에서 서울은 적화통일의 목표이지 화해 협력의 대상이 아니다.

남측 답방이 북한 체제 유지에는 실익 없어

평양은 항상 경호 및 신변 안전도 서울 답방에 부정적인 이유라고 비공개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최고의 안전 보장을 약속한다고 해도 답방이 남측과 통일전선 전술을 형성하는 것은 득이지만, 실질적인 이득은 없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또 북한을 폐쇄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3대 세습 유지에 유리한데 서울에 가서 남측의 잘사는 모습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면 통치에 부정적이다. 1945년 분단 이후 서울과 평양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될 무렵인 1948년 김구 등 민족주의자들은 평양을 방문했지만, 북측에서는 고위 인사가 내려오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이 정통성이 있고 통일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면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야지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의전상 맞지 않다는 속내를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것이다.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다시 평양에 올인했다. 과거 물밑에서 공작을 담당했던 선수들이 다시 나섰다. 1단계로 판문점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2단계로 김정은이 답방하는 그랜드 로드맵을 수립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출발은 복안대로 진행됐다. 4·27 판문점 공동선언으로 도보다리 밀담이 이뤄졌고 2018년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으로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해 9월에는 남측의 대통령이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고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이로써 남측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북측 최고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결과적으로 관례화했다. 9·19공동선언 마지막 6항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했다. ‘적절한 시기’에서 ‘가까운 시일 내’로 용어가 바뀌었다. 답방에 대한 문 정부의 강력한 요청이 반영된 셈이다. 문 전 대통령은 평양 5·1 경기장에서 북한 인민을 대상으로 대중 연설을 했다. 부부 동반으로 등정한 백두산 천지에서 김정은을 초청하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을 것이다. 남북 군사합의까지 이뤄져 비무장지대의 무장 해제는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1단계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최종 목표는 퍼즐을 완성하는 김정은의 답방이었다.

하노이에서 개최된 2차 미·북 정상회담은 김정은 답방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서울은 긍정적인 회담 결과를 기대했다. 일부 외신에는 트럼프·김정은 합의문의 구체적인 초안까지 유포됐다. 아마 서울에서 유포한 것으로 추정된다. 회담 타결 분위기를 최대한 고조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하노이 현장 분위기는 서울의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변 비핵화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11건 중에서 민생 관련 5건의 해제를 교환하자는 김정은의 제안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신은 회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You are not ready for the deal!)”며 노딜을 선언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점심 및 기자회견 일정도 취소됐다. 당초 평양은 자신들의 제안이 미국에 의해 수용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66시간 동안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을 거쳐 하노이에 왔다. 하지만 영변 핵이 북한 전체 핵의 50%에 불과한 상황에서 대북제재 5건의 해제는 결과적으로 모든 제재의 무력화로 이어지기에 빅딜은 요원했다.

관례화한 평양 방문에 대등한 관계 무너져

청와대가 애초 양측이 거부하는 합의안을 마치 수용할 것처럼 잘못된 중재를 한 것인지 북한 스스로 판단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세기의 2차 미·북 정상회담은 싱겁게 끝났다. 평양으로 귀환하는 특별 열차에서 회담을 총괄 준비한 김영철 중앙정무국부위원장이 무릎 꿇고 김정은에게 사죄했다는 뉴스마저 나왔다.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회담이 ‘노딜(no deal)’로 끝나자 문 정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 직후인 3월 초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통일 축제를 기획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통일부 등 각 부처는 예산 수십억원을 투입해 각종 통일 이벤트를 기획했다. 김정은 답방을 위한 ‘적절한 시기’ 조성 작전은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후 문 정부의 답방 공작은 정상궤도를 이탈했고 기이한 향북(向北) 정책의 연속이었다. 임기 중반을 넘어섰으나 김정은의 답방 가능성은 미지수였고 초조함에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문 정부는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평양 답방과 연결 짓는 전략을 수립했다. 2019년 11월 27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을 초청하기 위해 청와대는 평양에 수차례 친서를 보내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11월 5일에는 북측에 어민 강제 북송을 통보하고 2시간 간격으로 김정은을 부산에 초대하는 친서도 보냈다. ‘김정은 초청장’에 ‘어민 북송문’을 동봉한 격이다. 비밀 초청 공작은 2주 뒤인 11월 21일 북한이 남북 간 물밑 접촉 과정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며 드러났다. 당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1월 5일 남조선의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이번 특별수뇌자회의에 참석해주실 것을 간절히 초청하는 친서를 정중히 보내왔다”고 보도했다.

文 정부, 북한 어민 넘겨주고 ‘남한 답방’ 요청


▎2019년 11월 문재인 정부는 월남한 북한 어민들을 강제로 북측에 인계했다. 당시 문 정부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의 참석을 성사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문 정부가 김정은의 부산 초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역설적으로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확인해주었다. 통신은 “(남조선이) 몇 차례나 (김정은이 못 온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왔다”며 “남측이 (김정은의) 부산 방문과 관련한 경호와 의전 등 모든 영접 준비를 최상의 수준에서 갖춰놓고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도대체 북과 남이 만나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런 만남이 과연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라고 초청을 공개 거부했다. 북한의 보도가 없었다면 답방과 어민 북송 사건의 연계성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 정부는 합동심문조사도 하기 전에 어민까지 북송하며 답방을 간청했으나 북한은 냉담했다.

범법자라도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지역에 들어온 이상 정상적인 조사를 마쳐야 하고 처벌은 실정법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정상적인 조사는 3단계 합동심문으로 이루어진다. 심문에 최소 4주가 소요되는 것은 탈북민들의 발언이나 행태를 검증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3일 만에 합동심문조사를 마쳤다는 것은 청와대 안보실의 지시로 사실상 조사에 착수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자유가 없는 북한으로 탈북민을 송환할 경우 기다리는 것은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는 요덕수용소행 등 극단적인 처벌뿐이다. 북측은 스토킹에 가까운 남측의 구애를 보고 혀를 찼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친서까지 공개했을까! 임기 말 뜬금없는 종전선언 카드를 들고 워싱턴이고 파리를 쏘다니는 남한 당국자들의 행태에 평양조차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 비책’으로 2020년 7월 아침마다 방송과 트위터에서 자신을 비판하던 박지원 전 의원을 전격적으로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여권의 권력 구조를 안다는 사람조차 고개를 갸우뚱하던 인사였다. 박지원이 대통령을 연일 비판하는 바람에 ‘문모닝’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북한을 움직일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과거 물밑에서 대북 송금을 추진했던 노하우를 살려 김정은의 답방을 성사시키는 미션이 임명의 핵심 이유였다. 하지만 대북 송금으로 곤욕을 치렀던 그에겐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 거래를 할 필요도 없고 할 여건도 되지 않았다. 서훈 국정원장이 직접 청와대 안보실장을 맡아 진두지휘하게 됐다. 안보실장을 3년 맡았던 정의용은 이제 홀가분하게 본래 희망요직이었던 친정인 외교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답방 등 골치 아픈 문제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됐고 최종건 차관 등이 미국과 북한을 설득해 종전선언을 성사시키는 데 주력했다.

2020년 9월 해수부 공무원 피격 사건 역시 북한의 심기를 고려해 월북 조작으로 사건을 전격 종결시켰다. 판단력을 상실해 조금이라도 북한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초래한 비극적 행태다. 임기 말로 갈수록 문 정부는 평양에 의존하는 행태가 심화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평양 무지개를 잡으려고 문 정부는 국민의 자긍심을 훼손하고 국격을 추락시켰다.

공무원 피살당했는데 대통령은 ‘종전선언’ 제안


▎2020년 9월 22일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군에 피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날 새벽 공개된 유엔총회 연설에서 사건에 대한 언급 없이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왜 남한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답방을 두루미처럼 목을 빼고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가? OECD 가입국 대한민국이 식량 문제 하나 해결 못하면서 핵 개발에만 목을 매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답방을 애걸복걸할 필요는 없다. 일부 지북통의 이상한 집착과 망상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공무원이 피격당하고 우리 영토에 들어온 북한 주민을 강제 송환한 사태는 답방에 올인했던 비극의 종착지였다.

2020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다시 제안했다. 서해상에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군에게 피격당한 사실을 정부가 인지한 시점은 2020년 9월 22일이다. 그다음 날인 23일 새벽 1시 30분 유엔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을 담은 영상이 공개됐는데,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 피격된 상황에서 남북 평화를 강조하는 문 대통령 연설이 적절했는지를 두고 당시에도 공방이 오갔다.

이후 유엔 주재 북한 김성 대사는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평화 유지를 구실로 유엔의 이름을 악용해 유엔사를 불법으로 설립했고, 유엔사를 유지해 미군 점령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2019년에도 유엔사를 ‘유령’이라고 부르며 해체를 요구한 적이 있다. 이후 문 정부 임기 말까지 정부여당 핵심 인사들은 ‘남북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엔사, 족보 없는 유엔사’ 등으로 노골적으로 북한을 두둔했다. 김정은 답방과 종전선언은 정전협정을 휴짓조각으로 만들고, 북한은 유엔사 해체 및 주한 미군 철수 공세를 펼치는 것이 지북통의 구상이었다.

유엔사는 1950년 6·25전쟁 발발을 계기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설치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 사령부다. 유엔사는 전쟁 당시엔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에 대해 작전통제권을 행사했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땐 북한·중국과 함께 당사자로서 서명했다. 유엔사는 이후 1978년 창설한 한미연합사령부에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한 뒤 현재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파견·운영 ▷북한과의 장성급 회담 등 정전협정 관련 임무만 맡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을 겸하는 등 유엔사가 사실상 미국의 관할 아래 있다는 이유로 유엔사 해체를 지속해서 요구해왔다.

요컨대 김정은 답방→종전선언→유엔사 해체→주한미군 철수의 단계적 논리가 성립된다.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어민의 강제 송환과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은 어쩌면 유엔사 해체와 김정은 답방을 위해 물밑 작업을 벌여온 지북파들이 자초한 비극은 아니었을까.

※ 남성욱 -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원연구위원으로 근무한 뒤 2002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장을 지냈다.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뒤 후학 양성과 북한 문제 연구에 전념해오고 있다. [김정은의 핵과 경제](2022, 박영사), [북한 여성과 코스메틱](2017, 한울아카데미), [한반도 상생 프로젝트](2009, 나남) 등 북한 문제에 관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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