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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특집] 성과 더딘 尹 정부 대일 외교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한·일 정상회담 ‘저자세 논란’ 있지만… 대북 안보협력 고리로 관계 개선해야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
일본, 윤 대통령의 관계 개선 의지 신뢰하며 북한 도발에 정상 간 전화회담 먼저 요청
강제징용 문제, 법리에만 의존하면 해법 어려워… 국내정치·여론·대일외교 3각 맞춰야


▎윤석열 대통령의 강력한 한·일 관계 회복 의지에 따라 33개월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하지만 회담이 이뤄지기까지 진통이 있었고, 그마저도 30분 약식 회담에 그치자 저자세 외교 논란을 낳았다. / 사진:대통령실사진기자단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명언 가운데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는 말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 체제가 형성되던 1947년, 미국 민주당 출신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 진영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통해 공산 진영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외교전략을 주창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경제·군사적으로 구체화한 방안이 마셜 플랜이라 불리는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이다.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던 공화당이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공화당 출신인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트루먼의 집요한 설득 끝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앞에서 인용한 명언은 반덴버그가 1948년 나토 창설의 길을 여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한 말이다. 이때부터 외교 영역에서의 초당적 협력은 미 의회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2022년 10월의 대한민국이 처한 안보 상황이야말로 반덴버그의 협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북한은 핵 선제 공격 가능성을 법제화한 뒤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노골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술핵 사용을 불사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선언은 김정은의 오판을 부추기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신냉전으로 치닫는 미·중 패권경쟁은 국제공조를 통한 대북 압박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칫 대응을 그르치면 영원히 핵을 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여야는 국경 밖의 문제까지 국경 안으로 끌어들여와 정쟁 소재로 삼는 데 여념이 없다. 이럴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한·일 관계 및 대일 외교이자 친일(親日)-반일(反日) 프레임이다.

9월 말 동해 해상에서 펼쳐진 한·미·일 합동훈련을 ‘친일 국방’이라고 비판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9월 21일 뉴욕에서의 한·일 정상회담을 ‘저자세 외교’로 비판해 재미를 봤다는 판단에 따라 다시 한번 친일-반일 프레임에 불을 붙이려 했을 것이다. 이를 반박하느라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은 그 프레임에 기름을 끼얹었다. 대일 외교는 초당적 협력 외교를 해도 성과가 날까 말까 한 분야인데 여야의 현실은 정반대다. 대일 외교 기조는 정권이 바뀌면 180도로 선회한다. 일관성이 결여된 외교가 힘을 가질 리 없다.

정상회담에 대한 양국 간 인식의 차이 인정해야


▎2019년 7월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가 터진 후 그해 11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왼쪽에서 두 번째) 전 일본 총리와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회동을 가졌고 이를 국정운영 홍보에 이용했다. 일본은 외교 관례에 크게 어긋난 일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 사진:청와대
비록 30분 동안의 약식회담에 머물렀던 게 아쉽기는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간의 회담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33개월 만의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문재인 정권 5년간 나빠질 대로 나빠진 양국 관계를 복원시키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건 그 모양새였다. 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연출됨으로써 성과는 묻히고 저자세 논란만 남아 회담의 의미는 빛이 바랬다. 실은 정부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강하다. 정상회담 일정과 형식에 관한 조율이 끝나지도 않은 단계에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흔쾌히 일본이 회담에 응했다”고 섣부른 발표를 하는 바람에 일본 측의 거센 반발을 샀다. “우리가 언제 흔쾌히 응했느냐”, “만나지 말자”는 말까지 꺼낸 일본의 강한 입장에 한국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역관계가 회담 전부터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불필요한 소동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좋은 분위기에서 내실 있는 협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이런 일이 이번에만 벌어진 게 아니다. 201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 때의 일이다. 당시 문 정부는 반일 죽창가를 부르던 때와는 달리 일본에 대해 유화적 태도로 접근하려 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계속 한국에 대해 강경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불쑥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는 소파에 함께 앉자고 권한 뒤 잠시 대화를 나눴다. 사전 약속이 없던 상황이라 한국어-일본어 통역이 주변에 없었고 대화는 한국어-영어-일본어 방식의 이중 통역으로 이뤄졌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휴대전화로 이 장면을 촬영해 배포했고 청와대는 한·일 정상 간의 만남이 이뤄졌다고 홍보했다. 외교 관례에 크게 어긋난 일이라며 일본이 거세게 항의했음은 물론이고 그 후로는 다자회의 리셉션 때마다 한국 대표단을 피해 다녔다는 후문이 외교가에 전해져온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정상회담에 대한 양국 간 인식의 차이에 있다. “정상회담을 해결의 출발점으로 보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해결의 종착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확실한 해결의 가닥을 잡고 난 다음에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란게 한 일본 인사의 분석이다. 치밀한 사전 조율을 거친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사항을 최종 확인하는 것을 중시하는 게 일본이라면, 한국은 정상끼리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느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르다고 할 수 없는 문제다.

북한 도발에 이번엔 기시다 총리가 먼저 통화 요청


▎북한의 연이은 도발에 한·미·일 3국은 안보협력차 대잠전 연합훈련을 진행했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이 임박한 만큼 일본 자위대의 세계 정상급 대잠 능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 사진:연합뉴스
9월 21일 뉴욕 회담 이후 보름 만인 10월 6일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약 25분간 전화 회담을 했다. 이번에는 기시다 총리가 먼저 통화를 요청해왔다. 그보다 이틀 전 발사된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이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기시다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에 이어 윤 대통령과 전화 회담을 희망해온 것이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은 한·일 양자 관계가 아니라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 방안 협력에 집중됐다. 지금 이 시점에 한·일 관계가 개선돼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이 전화 회담만큼 좋은 사례가 없다고 생각된다.

경제 분야와 국제 현안에서의 협력 등 한·일 관계 개선이 시급한 이유가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보협력이다. 북한의 고강도 도발에 대해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대응 수단이 한·미 동맹이다. 한·미 동맹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한·일 간의 협력과 한·미·일 3자 안보협력이 필요하다. 주일미군 기지는 유사시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후방 지원 역할을 하게 되고 일본 자위대는 주일미군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는다. 평상시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월 말 동해상에서 이뤄진 한·미·일 훈련은 대잠수함 훈련이 주축이었다. 왜 그랬을까? 각종 정보를 종합하면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이 임박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 잠수함이 핵탄두를 탑재한 SLBM을 싣고 동해로 빠져나와 한반도 주변 해역을 잠행하면서 불시에 도발할 수 있는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다른 위협이다. 이런 위협을 억제하려면 북한 잠수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추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잠수함 탐지 및 식별 등 대잠(對潛) 능력에서 일본 자위대가 세계 최고 수준임은 군사 분야 지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시된 한·미·일 훈련을 ‘친일 국방’이라 비판한 야당 지도자의 안보 상식은 초보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실제로 10월 11~13일 전국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일본과의 군사협력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49%로 ‘불필요하다’는 의견(44%)을 앞질렀다.

안보협력이 원활하고 긴밀하게 이뤄지려면 한·일 간의 신뢰 회복과 정부 간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안보협력은 한·일 관계 회복의 최대 걸림돌인 강제징용 현안이 해결되기 전이라도 두 나라의 필요에 따라 당장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문 정부 시절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직전까지 갔던 것처럼 양자 관계 갈등이 안보협력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차근차근 안보협력을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쌓인 신뢰가 관계 개선을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제징용 문제다.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 청산이 이미 끝난 문제라고 주장한다. 일본 기업에 배상 의무가 있다고 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한국이 국내 조치나 절차를 통해 협정 위반 상황을 해소하라는 것이 일본의 일관된 요구였다. 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권 분립 때문에 대통령이 나서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도 보태졌다. 이를 보다 못한 민주당 출신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해결책을 담은 법안을 제출했으나 문재인 청와대의 소극적 태도에 막혀 흐지부지됐다.

‘강제징용 해법’ 정부안, 日·국내 여론 동의 얻을까


▎강제징용 문제는 한·일 관계의 마지막 걸림돌이다.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강제징용 해법이 국내정치·여론, 그리고 대일 외교 관계에서 공감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을 외교정책의 우선순위에 올려두고 노력해 왔다. 그동안 문 정부에 대해서는 싸늘했던 일본 정부가 뉴욕 회담 등 탐색전을 몇 차례 거친 끝에 윤 정부의 관계 개선 의지는 신뢰할 만하다는 평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윤 정부가 마련한 강제징용 해법이 일본에 통할지, 또 국내적으로는 피해자의 동의, 나아가 국민 여론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받을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밝혔다. 그 방안이 최근 외교부와 민간인 전문가들의 한시적 모임이었던 민관협의체 회의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중첩적 채무인수’ 방안이다.

이는 제3자(인수인)가 기존 채무자의 채무를 인수해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소송을 낸 원고, 즉 징용피해자가 채권자이고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이 채무자다. 현재 정부의 복안은 행정안전부 산하의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으로 하여금 일본 기업의 채무를 인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재원은 포스코 등 1965년 청구권 자금을 받았던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하는 돈으로 삼는다. 이 안의 논의 과정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중첩적 채무인수는 민법에 명문 조항은 없지만 판례로 확립돼 있다”며 “대법원 판결과 모순되지 않고 채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일본의 입장도 살리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방안에도 문제는 있다. 기존 채무자(미쓰비시)와 제3의 인수자(재단) 사이에 채무인수 약정이 필요한데 판결 내용, 즉 채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기업이 ‘채무자’ 지위를 인정할 리 없다는 것이다. 또 재단이 채무를 인수하면 구상권(求償權)이 발생하지만, 이 역시 일본이 인정할 가능성이 낮다. 그것이 첫째 난관이다. 둘째, 재단 측이 채무를 인수해 배상금을 대신 내는 데 채권자(징용 피해자)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법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 피해자들이 “우리는 일본의 돈을 받으려 한 것이지 한국 재단의 돈을 받지 않겠다”며 수령을 거부할 경우의 문제다. 법리적으로는 인수자(재단) 측이 법원에 배상금을 공탁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채무인수 및 공탁의 효력을 놓고 또 다른 법정 투쟁을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기업의 사과 또는 사죄 입장 표명 문제가 남아 있다. 이는 판결 내용에 직접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사항이다. “일본 기업이 배상금을 못 내겠다면 한국 재단이나 정부 돈을 받아도 되지만, 대신 일본 기업에게 사과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 국민 중에도 일본 기업이 사과의 뜻을 표명해야 문제가 종결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만일 일본 측이 사과를 할 수 없다고 하거나, 그 사과의 수위가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한·일 당국 간에 어느 정도 논의 중인지는 아직 외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외교적 해결보다 국내적 해결이 더 난제

이런 복잡한 사정들을 종합하면 강제징용 문제는 법 논리에만 의존해서는 완전한 해결에 이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설령 법 절차로는 채무를 소멸한다고 해도 피해자와 여론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강제징용 문제는 청산되지 않고 계속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법적 해결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정치적인 해결을, 일본과는 외교적 해결을 동시에 추구해야 풀린다. 굳이 따지자면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국내적 해결, 즉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내고 여론의 지지를 받아내는 일에 있을지 모른다. 난제 중의 난제다.

국내적 해결, 정치적 해결은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그것은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위안부 합의의 전철이라 함은 박근혜 정부에서 문 정부로 정권 교체된 뒤 합의의 핵심 내용이 사실상 백지화된 전례를 말한다. 다시 말해 강제징용 해법은 설령 정권이 바뀌더라도 쉽게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야당을 포함해서 광범위하게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초대 대통령을 지낸 레오폴드 피글은 “최선의 외교정책은 국민적 합의”라고 했다. 서두에 소개한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는 반덴버그의 말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는 외교 금언이다. 사실 반덴버그와 피글의 말은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일 뿐이다.

-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 yyjune@joongang.co.kr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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