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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K클래식의 젊은 피, 피아니스트 박재홍 

“나를 끊임없이 비우고 그 자리에 경험과 감상을 채워 넣는다” 

최소라 월간중앙 인턴기자
2021 부소니 국제 콩쿠르 우승하며 호평… 세계무대서 인정받은 무한한 가능성
시와 소설, 미술 등 예술작품에서 얻은 다양한 느낌을 연주에 활용하는 노력파


▎박재홍은 ‘올라운더’를 꿈꾼다. 베토벤을 칠 때는 베토벤을, 슈만을 칠 때는 슈만을 가장 사랑하고 잘 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 사진:마스트 엔터테인먼트
"문화는 강요가 아니라 매혹이다.” ‘소프트 파워’ 이론을 제시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한 말이다. 소프트 파워를 가진 국가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더라도 문화, 예술, 과학 등 비물리적 요소로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은 이제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적으로 소프트 파워 강국 대접을 받고 있다. 거기에는 글로벌 시장을 달구고 있는 K팝과 K콘텐트 역할이 컸다. 이에 못지 않은 분야가 ‘K클래식’이다. 국제 콩쿠르와 국제 무대에서 한국 클래식 음악가들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열풍은 무서울 정도다. 이미 2020년에 해외에서 한국 연주자들의 국제 콩쿠르 우승과 해외 진출 비결을 다룬 다큐멘터리 ‘K클래식 제너레이션’(티에리 로로 연출)이 등장하기도 했다. 2022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박재홍,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첼리스트 최하영 등 K클래식의 역사를 쓸 음악가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다. 그중 특유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로 세계 관객을 만족시키며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끌 인재로 꼽히는 피아니스트 박재홍을 만났다. 그는 2021년 참가한 세계적 권위의 ‘국제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인터뷰 취재는 유럽에 체류 중인 박재홍의 해외 일정을 감안해 화상 대화로 진행했다.

박재홍은 피아노 앞에서만 피아노를 어떻게 쳐야 할지 고민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직접 부딪히며 배운다. 유럽 투어를 돌고 있는 현재도 미술관과 예술가들의 묘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악가와 역사, 인간과 감정을 오감으로 느끼며 자신만의 팔레트를 넓혀가고 있다. 얼마 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은 것도 평소 관심 있던 역사의 현장을 느끼고 싶어서다.

“제가 요즘 공(空)에 훨씬 더 가까워지고자 마음먹었어요. 쓸데없는 잡념, 욕심, 유혹을 버리고 그냥 제가 연주하는 그 곡이 나타내는 것, 작곡가가 원하는 것만으로 연주를 채우려고 노력해요. 그 과정에서 당연히 저 자신이 드러날 수밖에 없더라고요. 결국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것은 저 자신이기 때문이죠.”

‘세계를 사로잡은 자신만의 개성이 무엇이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박재홍은 ‘비움’이라고 답했다. 끝없이 비워낸 자리에 경험과 감상을 채워 넣는다는 것이다. ‘국제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점점 더 커지는 부담감과 바쁜 스케줄에도 그는 오히려 비워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 그르니에 [섬] 읽고 있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는 데 ‘팔레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떤 의미인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색깔, 크기, 밀도, 압력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트에서는 어떤 색깔을 골라 칠할지 고민하기도 하지만, 또 얼마만큼의 물감을 묻혀서 작품을 만들어나갈지를 고민하기도 하지 않나. 구간의 길이, 깊이, 색감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렇다. 음악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적 스펙트럼과 공감각적 부분을 담아낸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소 음악 외에도 다양한 작품 감상을 즐기는가?

“그렇다. 음악 외에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뽐내거나 이론적인 요소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개인적인 감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작품과 관련된 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냥 개인이 어떤 작품에 접속해서 그 작품으로부터 특별한 감정 하나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은 소중한 작품이 되는 거라고 본다. 그런 일련의 경험들이 제 표현의 팔레트를 넓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재홍은 소설 속 인물의 감정과 모습을 상상하며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한다. 요즘은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고 있다. / 사진:민음사
그렇게 넓어진 팔레트를 어떻게 음악에 활용하나?

“예술작품 감상에서 얻은 다양한 느낌을 연주에 활용한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 제29번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할 때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느낀 여러 감정을 활용했다. ‘아~ 지금이 장면에서 뫼르소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희열이었을까, 당황스러움이었을까, 아니면 황량함이었을까? 소설 속 검사는 어떤 느낌의 사람이었을까’ 등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느꼈다. 한마디로 저 스스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거다(웃음).”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고 있다. 작가의 직관적인 묘사와 표현을 보면서 작가가 보는 이 세계의 팔레트는 얼마나 무궁무진했을까를 생각했다. 특히 두 번째 파트 ‘고양이 물루’에 ‘짐승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구절을 읽고 경탄을 했다. 고양이를 묘사해놓은 방식이라든지 고양이가 하는 행동 서술이 놀랍더라.”

한예종에서 ‘기술’보다 ‘태도’ 중시하는 교육 받아

연주에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겠다. 영화 [위플래쉬]를 보면 독특한 지도자를 만난 뒤 엄청난 연습을 통해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저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주인공 앤드류의 재능도 물론 뛰어났지만, 그 재능이 발현되는 데는 지도자의 역할도 컸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너무 안타깝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제 주위의 많은 음악 하는 학생들도 그렇게 연습한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에게도 좋은 지도자가 계셨던 것으로 안다. 한예종 출신인데, 김대진 총장에게 무엇을 사사했나?

“선생님께선 ‘피아노 잘 치는 법’이 아니라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되는 법’을 알려주셨다. 천방지축이던 야생마를 이렇게 만들어주신 것이다.(웃음) 교정이 필요한 그 순간만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해주셨다. 지금도, 언제나 감사드린다.”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 꼽힌다.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나?

“지금까지 저 스스로를 국내파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미국 줄리어드에서 석·박사를 전공한 선생님께 12년을 배웠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음악 철학을 지니고 계신 선생님을 통해 국제적인 시각으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선생님께 배우며 어릴 때부터 유럽에 나갈 기회가 굉장히 많아 굳이 유학을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은 거의 1년의 절반 정도는 유럽에 머문다. 그래서 저는 늘 스스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당연히 있지만 해외에 오래 머물다 보니 외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늘 이방인 같다는 느낌도 든다.(웃음)”

이방인이라는 그 느낌이 박재홍에게 어떻게 작용했을까?

“당연히, 긍정적으로 작용했다.(웃음) 행복한 일이지 않나. 언제나 새로운 시각에 열려 있을 수 있고, 또 선택을 할 때도 (두 개의 정체성에 따라)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

클래식의 대중화보다 대중의 클래식화를 더 원해


▎2021 페루초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박재홍의 모습. 박재홍은 부조니 콩쿠르에서 4개의 특별상과 우승을 손에 넣었다. 2023년에는 우승 특전으로 받은 하이든 오케스트라와의 연주 투어가 예정돼 있다. / 사진:마스트 엔터테인먼트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나 소설 [꿀벌과 천둥] 등 최근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콘텐트들이 나오고 있다. 클래식이 대중 문화의 영역에서 소구되는 것이 고무적인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도 종종 그런 작품들을 접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내 분야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 내가 익숙한 장르를 발견하면 좋고 행복하다. 이 질문을 클래식의 대중화와 연결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K팝이 대중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듯, 대중화된 K클래식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저는 클래식의 대중화보다 대중의 클래식화가 더 맞다고 본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더 다가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클래식 음악 본연의 매력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 사실 클래식은 굉장히 어렵고 불친절한 음악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클래식의 매력이기도 해서 오히려 더 많은 분이 클래식의 화성이나 형식 등의 이론에 대해 조금씩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클래식의 대중화를 통해 소곡 등 기존의 것들에 어떤 큰 변형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이론 강좌를 만들어서 함께 그 클래식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클래식만의 매력을 설명한다면?

“열려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음악은 어떠한 형태도, 향기도 없지 않나!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상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장르가 클래식 음악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늘 있다.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위대하고 매력적인 것도 있는 것 아닌가!”

월간중앙 독자에게 2023년을 여는 클래식 음악을 추천한다면?

“먼저 베토벤 교향곡 4번을 추천한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중에서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지니는 곡으로 희망찬 새해를 시작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슈만에 따르면 베토벤의 짝수 교향곡들은 그리스 로마의 여신들을 나타내는데, 그중 4번이 가장 아름다운 신이라고 표현하더라. 그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다음으로는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을 추천하고 싶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할 때 듣기 좋은 곡이니까. 지난해에는 어땠는지, 새해의 목표나 마음가짐은 어떠한지 고요한 선율 속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슈베르트의 ‘미사 E 플랫 장조 D. 950’을 추천한다. 제가 많이 아끼는 곡이다. 제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준 곡이기 때문이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슈베르트를 생각하며 새해에 큰 용기 받아가시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은가?

“저는 언제나 올라운더가 되는 것이 꿈이다. 제가 가진 가장 큰 재능 중 하나가 지금 연주하는 작곡가의 곡을 가장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팽을 칠 때는 쇼팽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가, 베토벤을 칠 때는 베토벤이 가장 좋으면서도 편안하고… 이런 마음으로 계속 음악을 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곡을 쳐도 다 잘 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것에 국한되기보다 계속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 최소라 월간중앙 인턴기자 sslysr@naver.com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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