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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8)] '삼국유사'로 본 단군설화의 비밀 

세계 덮친 4200년 전 기후변화, 한반도 지배 세력 바꿔놨다 

4200년 전 가뭄 잦아져, 직격타 맞은 몇몇 제국·도시 역사의 뒤안길로
선진 농업기술 앞세운 환웅 그룹이 호랑이 부족 밀어내고 한반도 지배


▎북한 대외선전 매체 [조선의 소리]에 실린 단군설화 그림. 설화에서 천제의 아들 환웅이 풍백·우사·운사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왔는데, 많은 학자가 농경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 사진:연합뉴스
위서(魏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逹)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요(堯) 임금과 같은 때였다.”

고기(古記):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어서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伯山頂)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부른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여 세상에 있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설화의 일부다. 어디까지를 실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논란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단군설화’라고 익숙하게 불리고는 있지만 정작 단군을 다룬 내용은 얼마 없다. 그보다는 그의 부친인 환웅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래서 최광식 고려대 명예교수는 “‘진짜’ 주인공은 환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준 것도,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은 것도 주체는 환웅이라는 것이다.

기후 따뜻해지자 문명 발달하며 제국 등장해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고려 충렬왕 7년) 편찬한 책으로 한반도의 고대 신화와 역사·종교·생활·문학 등을 포함한 종합서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이 설화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천제의 아들 환웅이 풍백·우사·운사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점이다. 한자에서 나타나듯이 풍백은 바람, 우사는 비, 운사는 구름을 가리키며 이것은 날씨의 핵심 요소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이것은 농경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언제였을까.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부른 것은 요(堯) 임금과 같은 때라고 한다.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2333년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단기(檀期)의 시작점도 이때인데, 올해는 단기 4356년이 된다. 그런데 이 시점은 공교롭게도 기후학적으로도 많은 일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수십억년에 걸쳐 냉탕과 온탕을 거듭하던 지구는 1만300년 전 오랜 빙하기에서 벗어나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추위를 피해 동굴에 들어가 있던 인류는 비로소 밖으로 나왔고, 사냥과 농경을 익히며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이 시기를 홀로세(Holocene Epoch)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도 우리 인류는 이 홀로세에서 사는 것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 홀로세 기간에도 지구의 온도는 몇 차례 롤러코스터를 오갔다. 물론 이전 빙하기처럼 북아메리카나 유럽을 빙하로 뒤덮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인류의 생활 패턴에는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됐다. 이런 단기적 기후 이벤트는 세 차례 있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8.2ka, 4.2ka, 2.4ka라고 명명했다. ‘ka’는 라틴어 ‘killo annum’의 줄임말로 천년을 의미한다. 즉, 4.2ka라고 한다면 4200년 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설화와 시기적으로 맞물리는 4.2ka 이벤트는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켰을까. 세계에서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등 서남아시아 지역이다. 고대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 처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카드인들이다. 이들은 수메르 북쪽 도시 아카드를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인근 도시국가를 차례차례 정복했다. 특히 사르곤 왕 시대에는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하지만 아카드는 대제국 건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하게 쇠퇴하며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카드의 쇠락은 오랜 관심사였다. 그렇게 강력했던 제국이 왜 금세 사라졌을까. 최근에 주목받게 된 것이 바로 4.2ka 이벤트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관개농업 발달을 통해 문명을 번성시켰는데, 4.2ka로 인해 강수량의 감소와 가뭄이 잦아지면서 농업이 쇠퇴했고,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집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거대 피라미드를 세울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시스템을 완성했던 이집트는 고왕국 제6왕조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6왕조의 페피 2세 시대에 이집트는 내부 권력 다툼으로 혼란했는데, 이 무렵 찾아온 4.2ka 이벤트는 가뭄과 함께 나일 강의 수위를 낮아지게 만들었고 농업용수가 부족해지자 농민들은 낫 대신 칼을 들고 저항하며 왕조를 붕괴시켰다. 이후 이집트는 약 100년간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인도의 고대 문명을 자랑하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같은 도시들이 사라진 것도 역시 4.2ka 무렵이다.

농사에 필요한 기술을 알았던 환웅 무리


▎2021년 개천절 당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4353주년 개천대제 봉행’ 모습.
여기서 잠시 홀로세의 환경을 다시 살펴보자. 따뜻한 기후는 식량을 구하기 풍족한 환경을 만들어줬고 이는 정착 생활로 이어졌다. 이런 조건은 인구 증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강이 흐르고 나무 열매나 사냥하기 손쉬운 동물들이 많아 100명 정도 거주하던 곳에 다른 사람들도 몰려오고 자식도 낳으면서 인구가 400~500명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면 식량 압박을 받아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농경이다. 농경은 제한된 면적에서 식량 생산을 안정적으로 극대화하면서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튀르키예에서 발굴된 차탈회위크 유적은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5000~1만명가량이 거주한 이곳 주민들이 처음에 수렵채집이나 목축업으로 식량을 해결했고, 시간이 흐른 뒤 초기 형태의 농사로 이를 보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전에는 ‘농업 시작→정착 생활’이라는 순서로 발달했다고 배웠지만, 차탈회위크의 발견 이후 고고학자들은 이전과 정반대로 ‘정착 생활→농업 시작’이라는 순서로 인류의 역사가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모여 살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수렵과 채집으로 식량을 조달했으며, 조나 기장 같은 작물을 소규모로 재배했다. 하지만 차탈회위크처럼 식량을 마련하는 주요 수단은 채집과 사냥이었다. 그런데 4.2ka 이벤트가 동아시아를 강타하자 한반도의 수렵채집 사회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 낙엽송 참나무의 도토리 생산량이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한반도에서 참나무 수가 급격히 줄었는데, 이는 도토리와 야생동물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고대 한반도인들이 더는 수렵채집만으로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 중의 하나가 움집터다. 6000년 전부터 증가하던 움집터가 이 시기에 급격하게 줄어든다. 즉 환경 변화에 따른 식량 부족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환웅으로 대표되는 무리가 곰과 호랑이 부족이 살던 땅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들이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렸다는 것은 농사에 필요한 기술을 알았다는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먹거리를 해결해주는 지도자가 최고의 정치가다. 선진 농업기술을 갖춘 환웅 그룹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지를 얻었을 것이고, 곧 지도자 그룹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환웅이 곡식·운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풍경을 보여준다. 환웅의 주도 아래 고조선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형태로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렇지만 수백 년 이상 익숙한 생활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호랑이와 곰이 있어서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웅(神雄)에게 기도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때 신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20매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농업을 둘러싼 환웅과 호랑이의 갈등


▎고고학자들은 20세기 후반 튀르키예에서 발굴된 차탈회위크 유적을 통해 5000~1만명가량의 거주민이 처음에 수렵채집이나 목축업으로 식량을 해결했고, 시간이 흐른 뒤 초기 형태의 농사로 이를 보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사진:바다출판사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문명화를 의미한다. ‘문명’(civilization)이 농사를 짓는다는 동사 ‘cultivate’에서 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수렵이나 채집은 하루 이틀이면 결과물이 나온다. 그러나 농업은 긴 시간 동안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수렵채집민이 농업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호랑이’로 상징되는 그룹이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이런 과정은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4.2ka 이후 동아시아를 강타한 것은 2.8ka 이벤트다. 즉 2800년 전의 가뭄과 기후변화다. 이때는 벼농사를 짓던 중국 요동의 거주민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한반도로 밀려 들어왔다. 한반도 역시 벼농사가 보급된 때였다. 이미 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에 갈등 상황은 더 심각했다. 낯선 이주민과의 갈등, 환경 훼손, 식량 부족 등은 가뜩이나 기후 변화로 어려움을 겪던 한반도에 큰 충격을 줬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설화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단군왕검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이나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 즉위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일단 시기를 따져보자면 4.2ka와 2.8ka의 시간적 간격은 1400여년이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의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 또 중국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보내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자로 대표되는 중국계 이주민과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 원주민 세력 사이에 큰 갈등과 충돌이 벌어졌으며 결국 단군 그룹이 패배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 단군은 돌아오긴 했으나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권력으로 복귀하지는 못한 셈이다. 환웅 그룹이 선진적 농경 기술을 들고 오자 기존의 호랑이 부족이 물러났던 역사가 기자 그룹과 단군 그룹 사이에서 다시 재현된 셈이다. 고대 사회의 기후변화 충격은 이렇게 단군설화에 각인됐다.

※이 원고는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쓴 [기후의 힘]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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