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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27) 포천 산정호수와 가평 남이섬에서 

 

고독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법

아직 죽어보지 못해서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은 인생 최후의 순간에 여러 후회를 한다고 한다. 그 중 공통적인 후회는 ‘몸 쌩쌩할 때 좀 더 좋은 걸 자주 보고 즐기고 살걸’, ‘여유로움에 인생을 음미하고, 평소에 좋은 음식 먹고 운동해서 건강 챙기고, 남에게 좀 더 베풀며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걸’이라며 후회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또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등 여러 핑계를 대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다 흘려보내고는 죽을 때가 돼서야 후회한다. 그런데 사실은 스스로 의지가 없고,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느라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하는 일의 특성상 이따금 전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는데, 평상시에 가 보고 싶거나 처음 가보는 곳일 때는 그날 일과시간이 끝나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다 집에 오곤 했다. 그러면 일이 여행이 되고, 여행이 일이 돼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피곤하지도 않다. 시간과 돈도 아끼고, 평화와 행복이 마음에 스며들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하루를 뿌듯하게 보내고 나면, 훗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조금은 후회하지 않고 원 없이 살았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해지곤 했다. 얼마 전에도 나의 젊은 시절 추억이 있는 경기도 포천을 방문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포천 시내에서 일찍 일을 마치고 산정호수로 달려갔다.


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룻밤의 풋사랑 로맨스가 있을 것이다. 약 30여년 전 지금과 같은 어느 봄날, 나에게도 산정호수에서 그런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새봄의 그 어느 날 시골 깨복쟁이 친구들은 봉고차를 타고 산정호수로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풋사랑의 주인공 그녀는 빵집에서 오후 타임에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의 그녀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고,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미니스커트 정장을 입고 배웅을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여러 친구의 권유도 있었겠다, 마음속에 어떤 낭만이 꿈틀댔는지 전화로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우리 여행에 합류했다. 친구들은 낭만과 즐거움이 자르르 흐르는 산정호수에 도착해 제일 먼저 디스코팡팡을 함께 탔다. 하지만 아담하고 이쁜 그녀는 얄궂게도 단박에 놀이기구 운전사의 표적이 돼버렸다. 운전사는 하이에나같이 그녀를 집중 공격해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게 해서 민망하게 만들더니, 짧은 치마를 두손으로 부여잡고 어찌할 줄 몰라하게 만들었다. 그 광경은 마치 괴상한 춤사위로 보이기도 했다. 주위를 지나가던 관광객들과 친구들이 그녀의 몸사래에 박장대소로 화답했고, 산정호수가 자리한 명성산 산신령도 좋아서 죽겠다는 듯 웃어대며 아름다운 그곳을 온통 핑크빛 동화 나라로 물들여버렸다.

나도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와 친했던 여자친구가 나를 보더니 얼른 외투를 벗어 그녀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의기양양하게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그 놀이기구 운전사는 나 같은 얼치기 보디가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미녀와 야수’를 하늘에 높이 띄우더니 그녀를 안고 무자비하게 떨어뜨린 후 멍석말이를 하듯 굴려댔다. 그 순간 미녀와 야수는 자기 의사와는 반하게 여러 번 몸을 부딪치게 되었고, 그때 둘 사이에 어떤 미묘한 감정이 살포시 가슴속에 쌓였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먹고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미녀와 야수는 무리를 이탈해 흐드러지게 별빛이 쏟아지는 호숫가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미녀와 야수는 허브 향기가 흐르는 아늑한 벤치에 앉았다. 그때부터 새벽안개가 넘실넘실 피어 올라올 때까지….


내 운명 (윤동주의 서시를 변주하며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너를 만나기를 기원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내 옆에 있는 내 님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 품에 안긴 님이여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를 변주하며)

우리의 만남을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우리의 사랑을 꽃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내 품에 안긴 예쁜 내 님이여!
너와 나 피할수 없는 운명을 만들려고
간 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님이시여 님이시여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변주하며)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님이시여, 님이시여…


그날 밤, 미녀와 야수는 문학소년과 문학소녀가 돼 아름다운 시들을 합창하고 마음 가는 대로 패러디했다. 서로에게 헌사하고 또 낭송했다. 그리고 옛 추억을 노래하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무심히 흘렀다. 이제 흰머리가 내려앉은 반늙은이는 고요하게 물결치는 산정호수 그 벤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아름답고 황홀했던 밤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아! 내 인생에 가련한 풋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한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폭군 궁예가 왕건의 군사들에게 쫓겨 마르지 않은 눈물이 호수가 된 듯, 산정호수는 왠지 모르게 애닳고 가슴 시리다. 그날 우리의 풋사랑처럼…


옛사랑을 추억하면서 멋스러운 둘레길을 걷고 충분히 감상했는데도, 태양이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아 있었다. 무슨 여운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배용준과 최지우가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던 인근 가평군 남이섬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확하게 높이가 몇 미터인지는 모르지만 아득하게 솟아있는 타워에 올랐다. 번지점프, 지금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줄 도르래에 의지해 멋들어진 북한강 푸른 강물을 가로질러 남이섬에 미끄러졌다. 아주 잠깐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금세 신이 났다. 그 아름다운 수변공원 경치가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도전한 자만의 특권이자 선물 같았다.

남이 장군은 불과 17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25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남이가 지은 시의 한 문장을 왜곡해서는 반란을 꿈꿨다고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버렸다. 아! 남이 장군은 그 젊은 나이에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돼 쓸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애절함과 안타까움은 조선을 넘어 현재 대한민국 민초들의 가슴에까지 절절히 이어졌다. 그가 잠들어 있는 남이섬은 세계적 관광지가 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남이섬은 정말 이국적이고 색다른 동화 나라였다. 이에 더해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최지우의 예쁜 사랑이 익어간 곳이니 무슨 설명이 따로 필요할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관광객의 8할이 젊은 외국인 남녀들이니 참으로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졌다.


오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곳이자 전 세계인들이 찾는 산정호수와 남이섬 숲속을 걸어서일까? 100년 묵은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듯 기쁘고 상쾌했다. 숲속은 언제나 우리에게 힐링과 건강을 선사하는 행복의 보물창고 같다. 나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좋은 풍경으로 씻어내면 스트레스가 적은 삶을 살 수 있다.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사는 삶, 여한 없이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삶이 진정 행복이고 잘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하며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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