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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29) 파사산과 영릉, 신륵사 봄나들이 

 

여주로 한바탕 봄 소풍을 다녀왔다

숨소리가 새악시의 사각사각 색동치마보다 더 고왔다. 남한강 이포보(梨浦洑) 모래 위 오케스트라 홀에서 백발의 하얀 백로(?)의 지휘 아래 검은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까마귀 단원들의 연주에 맞춰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프라노 백로 아가씨가 목청껏 부르는 “무르익어가는 새봄의 찬가”라는 아름다운 선율이 강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물결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노래에 따라 남한강변을 1㎞쯤 걷다보니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이포보 전망대가 나왔다. 여주의 상징 백로의 날개 위에 둥근 알을 올려놓은 듯 한 이국적인 풍경이 평온하고 행복한 연푸른 핑크빛 동화나라 같았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 동쪽 산을 바라보니 해발 230m 파사산(婆娑山)이 앙증맞게 그 푸름을 더해 갔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산을 오르며 한바탕 깔딱숨을 쉬고 나니 어른 한 아름 크기의 바위들이 정상까지 반듯하게 쌓여져 있다. 파사산성이었다.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산성인데, 신라 제5대 임금 파사왕 때 처음 쌓았고 임진왜란 때 승군들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남한강 상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성벽의 높이는 4~5m, 둘레는 1,800m 정도라고 한다. 살펴보니 서쪽 출입구 쪽 일부는 세월의 풍파에 무너져 있었지만, 최근에 보수를 한 듯 나머지 성벽은 깔끔하고 정연하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작고 낮은 산성이지만, 30리 먼 거리의 적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지대다. 2000여 년 전에는 이 파사산성이 삼국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뺏고 빼앗기기를 수차례 반복했던 전초기지였을 것이다. 그 동안의 말 못할 아픔을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산 정상은 나무 한그루 없는 반들반들한 민둥산이었다. 단지, 몇 그루의 꽃나무만이 말없이 쓰러져간 초병들을 위로하듯 다시 찾아 온 봄을 바라보며 처연히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대 자연을 앞에 두고, 그 무엇이 더 필요해서 전쟁을 하고, 그 많은 피를 흘렸을까... 그 많은 초병들은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한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새삼, 세월의 덧없음과 함께 지금 나의 행복에 감사함과 함께 머리가 숙연해졌다.

우리 일행은 그렇게 1시간 여를 파사산에서 봄을 만끽한 후 남한강변 한적한 갈대밭으로 내려왔다. 가지고 온 도시락을 모아 갖은 야채를 넣고,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을 듬뿍 뿌려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었다. 거기에 갓 썰은 싱싱한 송어에 막걸리 한사발...여기에 비견할 행복이 있을쏘냐!


넉넉한 배부름을 안고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英陵)에 10여 분만에 도착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과학과 지식을 장려한 최고 군주의 안식처답게 영릉은 엄숙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멋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화유산해설사의 말을 들으니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게 배치되었다고 한다. 영릉에 들어서자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당시의 최첨단 발명품인 해시계, 물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측우기 등이 우리를 반겼다. 당시 우리나라 해시계는 다른 나라 해시계와 달리 시간과 분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밤에도 시간을 알수 있었다고 하니 새삼 당시의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으로, 국조오례의에 따라 무덤을 배치했는데, 이후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1469년(예종1) 경기도 여주로 천장(遷葬)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광주의 대모산(大母山, 지금의 서울 서초구)에 있던 영릉이 여주로 이장하게 된 배경도 듣고 보니 흥미로웠다. 세종은 18남 4녀를 두고 다복하였지만 그의 아들 문종이 단명하고, 손자 단종도 삼촌에 의해 비명횡사하는 등 후손들이 불운했다. 결국 당시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왕릉을 옮기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여주로 이전한 후에는 그와 같은 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오늘이 세종대왕의 서거일로 1년에 딱 3일간만 개방한다는, 영릉 내 진달래 꽃밭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진달래는 화려하다기 보다는 왠지 모르게 가냘프면서도 애처롭고 우수에 젖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큰 소나무 아래 군락을 이룬 핑크빛 진달래가 세종대왕이 꿈꾸는 사회가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였음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마지막 여정으로 여주 봉미산(鳳尾山) 끝자락, 1500여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고찰 신륵사(神勒寺)를 찾았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선사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웅선사가 잠시 머물다가 병사하여 다비식을 치렀다는 기록이 아직도 비석에 똑똑히 남아 있다. 한때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인근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미륵(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넛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경내에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신륵사에는 조사당, 다층석탑, 보제존자석종 등 총 8개 보물이 있는 명찰이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보니 신륵사와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옛스럽고, 포근하고 다정다감해 꼭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다.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 깊은 산속이 아닌 강변에 있는 거의 유일한 절로 꼽힌다. 일행들과 떨어져 1500여년 고찰인 신륵사 옆을 흐르는 남한강을 한동안 무심히 바라봤다. 도도히 흐르는 저 남한강 푸른 물결은 꼬리에 꼬리를 이으며 한줌의 거품도 없이 묵묵히 흐르고만 있었다. 저 물결처럼 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오늘처럼 인생을 소풍처럼 즐기며 순리대로 살다가 그저 편안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우리 일행은 그날, 대한민국 최고 쌀이라는 여주 쌀로 지은 밥과 누룽지를 맛있게 먹고 한바탕 신나게 봄 소풍을 마쳤다. 2023년 봄도 이렇게 위대하게 잘 무르익고 있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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