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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28) 일본 보만산 에서 

 

아산 정주영의 뚝심과 연암 박지원의 낭만을 겸비한 친구

인천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불과 1시간 20여분 만에 현해탄을 넘어 일본 홋카이도 공항에 착륙했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5번째로 크고, 150만 명이 사는 대도시라지만 고풍스러운 옛 건물과 아름드리나무들로 울창한 숲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우리나라와 근접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교류가 활발해 백제 유민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고, 임진왜란 때 수많은 백성이 끌려와 정착한 곳이라 그런지 낯설지만도 않았다.

이번 여행에는 나의 막역한 친구의 권유로 몇 명의 지인들과 동행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의 바람은 40대 이전에 경제적 기반을 닦아서 돈과 시간, 마음의 압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여유로운 인생 속에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내 주변엔 그런 사람이 딱 한명 있는데, 그가 이번 여행을 권했다. 그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사업을 일궈내 현재는 ‘회장님’이라 불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현대 창업주 아산 정주영 회장과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장점만을 합쳐놓은 듯한 멋진 친구다.

그 친구는 장성 산골 아랫마을 탱자나무집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교 다닐 때 이쁜 여학생 의자 밑에 몰래 청개구리를 숨겨 놓고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다녀올 때 주전자 뚜껑으로 막걸리를 먹어보고 물을 채워 넣는,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아이였다. 친구가 살던 동네는 부엉이, 오소리 등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해질녘 천수답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무서운 공동묘지 넘어 꼬불꼬불 좁은 논둑길을 걸어가야 하는 산골동네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게를 지던 그 친구는 ‘꼭,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돼 멋있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좋은 환경에서 부모님의 보살핌과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종일 달달달 문제를 외워 시험 보는 도시 아이들과 학교 끝나면 부모님 일손을 돕고, 신나게 친구들과 함께 뛰어노느라 책 한번 제대로 보지 않고 시험 보는 아이가 어떻게 시험 점수가 같을 수 있겠는가. 또 얼마나 공부를 잘할 수 있겠는가! 비록 도시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지만,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란 대부분의 아이는 긴긴 오뉴월 뙤약볕 아래에서 노동의 무게와 인생의 고뇌를 일찍 깨닫고, 기다림과 인내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체험한다.

친구는 말뚝 박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기마전 등 놀이를 통해 인생의 흥과 멋을 체화했고, 품앗이와 울력 등을 체험하며 자연스레 상부상조와 협동, 공동체의 가치와 인간 처세술을 익혔다. 가뭄과 홍수, 폭풍우와 눈보라 등 자연재해를 몸으로 부딪쳐 이겨냈고, 밤낮으로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별빛과 아름다운 무지개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우주와 대자연의 신비를 온몸으로 맛보면서 산골 소년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성이 시나브로 영글어 갔다. 그는 아득히 전설처럼 들려오는 산업화, 세계화의 영웅들, 꺾이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말끝마다 “해봤어”를 외쳤던 현대 정주영,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세계화의 선두주자 대우 김우중 회장을 동경하면서 우물 안 산골에 살면서도 혁신적 반항을 꿈꿨다.


친구가 17세가 된 어느 날, 그는 ‘잘살아 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서울 변두리 신정동에서 창호 샷시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공업사의 보조공으로 그의 직장 일대기는 시작했다. 그는 2평 남짓한 창고 같은 작은 방에서 용접기, 쇠톱, 망치 등 공구들과 함께 잠을 자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골 아이답게 체력과 지구력, 인내력이 단단하고, 부모님을 닮아 부지런함과 성실성이 몸에 배어 있어 일처리가 야무졌다. 눈썰미도 남달라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일취월장하면서 사장님 눈에 쏙 들었다. 그렇게 친구는 20대 초반에 야무진 기술자로 성장해 사장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경영의 노하우를 배우는 행운을 잡는다. 친구가 20대 후반이 되자 사장님은 친구 마음이 너무 넓고 머리가 영특해 자기 밑에서만 두기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큰물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친구에게 새 길을 열어준다. 그 무렵 친구는 조숙하고 현명한 배필과 인연을 맺어 천군만마 같은 지원병을 얻고 단란한 가정도 꾸린다.

친구는 불과 20대 후반에 사장님이 됐지만 낭비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성실하게 기름때 묻은 돈을 따박따박 쌓아갔다. 남들보다 한발 먼저 생각하고, 한 번 더 현장을 방문해서 고객을 감동시키고, 이익의 10% 이상을 거래처에 다시 환원해 한번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삼겠다는 ‘고객 감동’의 신념을 꾸준히 실천했다. 똑 부러지게 말 잘하고, 호남형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까지 탑재한 친구가 궂은일 가리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자 ‘젊은 친구가 깔끔하게 일 잘한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신용을 생명같이 지키자 개인 투자자도 생기고 일감이 몰려들면서 큰 종잣돈을 빠른 시간에 모으게 됐다. 더불어 협력업체와 투자자에게는 반드시 약속된 날짜에 공사비와 이익금을 지급하고, 보통 사람들은 여러 핑계를 대면서 계약된 금액을 깎는데, 친구는 오히려 자기 이익을 줄여서 덤으로 얹어 주고 고마운 분들의 가족까지 초대해 극진히 대접한다. 그렇게 친구는 도저히 사업이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와 여건을 만들어 갔다.

1990년대, 아파트가 우후죽순 올라가며 건설 경기가 활황이던 시대다. 창문 등에 들어가는 알루미늄 샷시(새시)가 최고의 투자처라고 판단한 친구는 과감하게 종합 알루미늄 샷시 대리점을 인수해 또 한 번 인생을 멋지게 업그레이드했다. 정주영 회장처럼 날마다 경제신문 3부를 보면서 경제의 흐름을 예측하는 혜안을 높이고 현장 경험을 통해 실용적인 지혜와 지식을 쌓았다. 그렇게 명실상부 문무를 겸비한 사업가로 변신해 갔다.

모든 일은 심사숙고해 로드맵을 끝까지 그려보고, 손익을 분석해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70%가 되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집중 투자해 돈을 확실하게 벌었다. 50% 이하 때는 어떠한 유혹에도 과감히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친구는 그러한 원칙 투자로 당시 수도권 최고의 노른자위 땅 4천여 평에 투자해 만루 홈런을 날린다. 몇 년이 지난 후 확실한 투자 수익을 얻어 목돈을 쥐게 된 친구는 그 돈 모두를 재투자해 종합건설사 3개를 설립한다. 공업사 보조공으로 시작해 불과 40대 후반에 서울에 고층빌딩과 지식산업센터를 짓고 지금은 6개의 회사를 거느린 명실상부한 회장님으로서, 개천에서 용이 승천하는 신화를 아름답게 써내려 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친구는 지금도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현장을 점검하고, 신문을 보고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고향이나 이웃에 매년 주기적으로 돈을 기부하고 가까운 이웃들을 살뜰히 챙긴다. 매년 협력사나 친구, 직원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고 지역의 훌륭한 단체를 선별해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친구는 이렇게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또 삶의 맛과 멋을 아는 멋진 품성을 지녔다. 친구는 여행, 골프 등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즐기면서 해외 160여국 탐방이라는 긴 여행길에 올라 하루하루 견문과 지혜를 넓혀 가고 있다.


친구는 49세 늦은 나이에 새내기로 사업을 시작한 나를 위해 본사 사무실 한 칸을 선뜻 내주고, 오랜 시간 쌓은 사업의 지혜와 노하우를 내게 아낌없이 전수해줬다. 더불어 여러 훌륭한 지인들을 소개해주고,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줬다. 최근 3년, 친구도 코로나19 사태로 건물 계약해지나 미분양 상가가 여러 채 발생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직원들과 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원가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고, 무상으로 시설투자를 해주면서 이 어려운 시기에 미분양분 전량을 소진하는 등 안정된 사업을 하는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친구가 협력사와 나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4박5일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된 것이다.

첫날을 호텔에서 묵은 우리는 야트막한 보만산을 오르기로 했다. 보만산은 해발 200여 미터로 작고 아담했지만 여러 수종의 아름드리나무들이 풍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목에는 예의 일본 특유의 깃발과 글을 담은 푯말들이 꽂혀 있었다. 산 정상에 오르자 마치 산속 깊은 곳 암자처럼 작은 신사가 나타났다. 왜 일본 사람들은 200만 개가 넘는 신을 믿고, 그 많은 신사를 짓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상념이 스쳐갔다.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지진, 해일, 폭풍 등 자연재해의 공포로부터의 도피처나 안식처일 수 있다. 아니면 지방 영웅호걸들(막부)의 끊임없는 패권전쟁에 따른 슬픈 산물일 수도 있다. 오랜 전쟁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이 사무라이의 칼날에 추풍낙엽이 되는 것을 목격했기에 아직도 습관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본심을 숨기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과하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비극적으로 살다간 수많은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많은 신이 생기고 신사가 세워진 것이 아닐까?


보만산을 내려와서는 후쿠오카 아니 일본 열도에서도 아주 크고 유명하다는 다자이후텐마구(太宰府天滿宮) 신사를 산책했다. 다자이후텐만구는 일본 헤이안 시대 문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그는 조선의 남이 장군 같은 인물로 영웅이자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불과 18살 때 관료시험에 장원급제해 황족과 귀족들이 앞다퉈 그의 문장을 칭송했다고 한다. 우다 천황의 총애를 받아 ‘참의’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고, 그의 딸이 황자(皇子)의 아내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우뚝 섰다. 하지만 부귀영화도 잠시, 901년 그의 정적 후지와라 도키히라의 참소(讒訴)로 좌천된 뒤 903년 큰 한을 품고 허무하게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뒤 그를 모함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비명횡사하자 사람들은 한 맺힌 미치자네의 원혼이 복수한 것이라 믿었고, 이후 그를 천신으로 추앙하고 신격화해 신사를 지었다고 한다.

1591년에 세워졌다는 후텐만구 신사 입구에는 황소의 동상이 있는데 소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이 부적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특히 매년 1월 1일은 ‘오쇼가츠’라고 해서 새해의 운을 점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 200만 명의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후텐마구 신사는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와 가평 남이섬의 남이 장군 역사가 혼합된 듯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우리 일행은 6천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고풍스런 옛날 목재건물과 인공호수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대궐의 풍경을 돌아봤다. 그 꽃대궐 중심부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일본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관련 깊은 건물이라고 했다. 메이지유신은 메이지 천황 때 왕정복고를 이룩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실시한 변혁을 일컫는 말이다. 기존 사회를 온건하게 개혁하자는 막부 세력과, 사무라이를 없애고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급진 반(反)막부 세력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바로 이곳에서 급진 개혁파 반막부 세력의 두 거목이 손을 맞잡고 목숨을 함께 하기로 맹세를 결의한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효험이 있어서인지 결국 반막부 세력이 승리해 수천 년간 내려온 사무라이를 몰아내고 선진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대개혁에 성공한다. 그렇게 일본은 일시에 가장 못 사는 나라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변신했고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가 됐다. 우리나라도 당시 일본처럼, 멋진 내 친구처럼, 세계를 넓게 바라보는 혜안과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또 어떻게 됐을까?

나는 친구와 함께 다자이후텐만구의 상징인 소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소원을 빌었다. 그 친구는 ‘국민 모두가 경제난국을 잘 극복해 나라가 편안해지고, 지금 하는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남의 아픔을 배려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게 해주고, 여기에 함께한 친구들과도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누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아산 정주영의 지혜와 뚝심, 연암 박지원의 낭만과 실사구시를 겸비한 이런 멋진 사람이 내 친구라니…. 나는 다시금 참 복이 많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렇듯 유쾌하게 홋카이도 여행을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현업에 복귀했다. 멋진 친구와 함께했던 보만산 산행은 잊지 못할 여행으로 남았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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