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

Home>월간중앙>스페셜리스트

김희범의 등산미학(33)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대장봉에서 

 

인생은 선문답, 친구야! 네가 있어 행복하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특히 건설업종은 최고의 불황이어서 날마다 쓰러지는 기업의 비명소리가 진동 한다는데… 내 인생 최고의 멋진 친구가 어려울수록 힘을 내고 단합을 해야 한다며, 본인의 회사 단합대회 겸 야유회에 나와 몇몇 지인을 초대해줬다. 직원들을 사랑하는 배려심과 이해심이 참으로 높은 친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인연으로 군산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대장봉을 찾아가게 됐다.

오전 10시 32분, 서울을 출발한 리무진 버스가 군산 선유도 어느 바닷가 마을에 멈춰 섰다. 오늘의 목적지 대장봉이 저 멀리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유럽의 요새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하얀 옷을 입고 하늘하늘 고운 자태를 뽐내는 듯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그렇게 황홀했건만, 막상 오르려고 보니 야트막한 높이의 산도 만만치 않았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낭떠러지, 고바위… 한여름 등산은 땀이 온몸을 적시고 한바탕 깔딱 숨을 쉬고 난 뒤에야 해발 142m 대장봉으로 가는 정상의 문이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관이었다. 토실토실 뭉개구름양과 파란여름하늘군의 찐한 연애의 한마당이랄까!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청아한 옥구슬 웃음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쓰담쓰담한 작은 섬들, 한가롭고 여유로운 고깃배와 나룻배,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든 녹색 아기 등대, 선녀들이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놓은 것 같은 선유도의 하얀 백사장, 목이 빠지게 선남선녀를 기다리고 있는 공작새 날개 모양의 선유도 다리, 코발트를 뿌려놓은 듯 새파란 바닷물이 미풍에 살랑대며 메말랐던 내 가슴에 파도를 쳤다. 아! 이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에 있구나! 그 순간, 내가 지나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상념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되돌아봤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나는 그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고 규정해놓은 의무와 책임, 도덕과 규율과 신념에 갇혀서 그저 세상이 원하는 명예와 부를 이루기 위해 휘청거리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지고지순한 진리라고 여기고, 그 길을 향해 부지런하게 살아야만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만나고 부자가 된다고 찰떡같이 콩떡같이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많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인내하고 사느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고, 때로는 정의와 우정을 짓밟기도 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앞만 보며 살아왔던가? 내일이면 잡힐 듯 잡힐 듯했던 성공과 행복은 막상 그날이 되면 언제나 또다시 내일로 미뤄지기만 했다. 내 나이 지천명도 넘어서 만물의 숨소리를 들을 줄 안다는 이순(60)이 바로 내일이다. 나는 언제쯤 나만의 순수한 것들을 추구하고 살 수 있을까?

가슴 속에 후회가 밀려왔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말씀처럼 내 인생에 어떤 고통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는 나다”고 할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함이 있어야 하는데, 내 인생에는 그것이 없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성공과 행복의 가치에 갇히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자신감으로 인생을 나답게, 자신 있게, 즐겁게 살았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었다. 겨우 100세도 못 살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이 아니던가!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나의 고유함을 가지고 무쏘의 뿔처럼 나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내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내 마음속에 행복이, 천국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니 오늘을, 지금 주어진 시간을 더 소중히 살아야 한다.....


최근 영국의 신문 ‘더 선’이 인간의 평균 수명을 80세로 봤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을 얼마나 소비하며 사는지에 대한 연구 조사 자료를 발표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인생 80년은 총 2만9200일, 70만800시간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일하며 보내는 시간(26년, 22만7760시간) ▷잠자는 시간(25년, 23만9000시간) ▷TV보며 보내는 시간(10년, 8만7600시간)이 많았다. 그 다음이 ▷먹는 시간(6년, 5만2560시간 ▷전화 받는 시간(4년, 3만5040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3년, 2만6280시간)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남자는 1년 3개월, 1만800시간/ 여자는 2년 5개월, 2만1840시간)이었다.

나머지 자투리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2년, 1만7520시간) ▷화내는 시간(2년, 1만7520시간) ▷이성을 생각하는 시간(남자는 1년, 8760시간/ 여자는 0.5년, 4320시간) ▷몸단장 하는 시간(남자는 46일, 1104시간/ 여자는 136일, 3276시간) ▷웃는 시간(88일, 2112시간)으로 나타났다.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이긴 하지만 정말 허망하고 별 것 없는 인생이다. 대부분이 생존을 위한 시간이고, 진정 나를 위한 행복한 시간이나 웃는 시간은 겨우 88일(2112시간). 80년 인생의 0.003%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기회만 있으면 웃고 살아야 한다. “현재라는 시간만이 내 자신이 소유한 유일한 시간이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내일은 아직 내 앞에 오지 않았기에 내 시간이 아니다. 오늘만이 내 시간이다. 오늘을 소중하고 새롭게 선용하는 사람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상념에서 깨어나 눈앞의 선유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대자연을 바라보면 비록 정답이 없는 선문답 같은 상념이지만 뭔가를 느끼게 된다. 이런 맛에 등산과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선유도(仙遊島)를 설명하는 글에 눈길이 갔다. 선유도는 섬 안에 솟아있는 봉우리 모양이 꼭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것 같아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한다. 선유도는 전북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의 가운데에 자리한다. 2017년 8.77㎞의 무녀도와 장자도, 대장도를 다리로 연결했으니 한 몸이나 진배없다. 고군산군도는 군산과 변산반도 사이 서해에 자리한다.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가 흩뿌려져 있다. 그 중 선유도는 덩치로는 셋째지만 그 미모(?)와 함께 발달한 항구 덕분에 예로부터 고군산군도의 중심을 차지해왔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고려시대 선유도를 찾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당시 사신들을 맞이하던 ‘군산정’과 연락선(船) 역할을 하던 ‘송방’등에 대해 적은 기록이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 무역항이자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에 고군산군도의 중심인 선유도에 수군 본부인 ‘군산진’이 들어선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름을 군산진으로 붙인 것은 선유도의 원래 이름이 ‘군산도’였기 때문이다. 왜구들이 군산진을 피해 연안으로 침입하자 조선 수군 진영은 육지의 진포, 지금의 군산시로 자리를 옮긴다. 군산이라는 이름까지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원래의 군산은 옛 고(古)가 더해져 ‘고군산’이 됐다고 한다.

선유도에서 첫손에 꼽히는 풍광은 낙조라고 한다. 특히 명사십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태양이 녹아드는 듯 붉게 물든 고군산군도 사이로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가 아름답게 저물어간다고 한다. 내 인생의 후반부도 그렇게 아름답게 물들 수 있어야 한다.


대장봉을 내려와 친구와 함께 하얀 선유도 백사장을 걸었다. 신발도 양말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선유도에는 우리 일행 외에도 관광객이 많았다. 젊은 청춘 한 쌍이 모래 위에 사랑의 하트를 그려놓고, 어릴 적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부럽기도 하고 예뻐서 사진에 담았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가 혼자서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너무 낭만적이어서 멀리서 찰칵 사진을 찍었다. 나도, 친구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서로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다가 백사장 위로 힘껏 뛰어 올랐다. 그 순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한바탕 환희의 전율이 온 몸을 감쌌다. 저절로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동심으로 돌아가 진한 우정을 맛봤다. 마음이 넓은 멋진 친구가 있어 정말 오늘을 마음껏 즐겼다. 감사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친구 회사의 발전과 직원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