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황문자(65) 씨는 하루 종일 상념에 잠겨 있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지만 그는 절망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감사해야 하는 목록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너무 늦기 전에 암을 발견했고 가슴 두 곳 중 한쪽만 수술했습니다. 가족 중 남편과 아이들이 아닌 제가 암이란 점에 감사했어요.”이날 저녁 황 씨는 조심스럽게 남편 김귀열(68) 슈페리어 회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김귀열 회장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저는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1967년 동원섬유를 설립한 다음부터 일만 하고 살았지요. 70년 저와 결혼한 이후 고생만 한 아내가 암이란 소식을 접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동원섬유는 국내 최초의 골프 전문 의류 브랜드 슈페리어의 전신. 김 회장은 한국에서 골프 의류 분야를 개척한 기업인이다.
그는 혈혈단신 아이디어와 열정만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한 점이 많았다며 아쉬워했다. 김 회장은 상처(喪妻)한 친구도 머리에 떠올랐다고 한다. “만나기만 하면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충고하던 친구였어요. 평소에 잘해 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김 회장 부부는 다른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같았다. 암을 현실로 받아들인 부부는 수술 일정을 잡고 치료에 나섰다. 우선 김 회장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내조를 시작했다. “스무 살 때 잠시 자취하며 익혔던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지요. 아내는 접시 몇 개 닦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린다며 타박하더군요.(웃음)”
수술은 지난해 10월 8일 받았다. 김 회장은 부인에게 반드시 완쾌해서 맛있는 밥상을 차려 달라고 말을 했다고 회상했다. “제 입맛이 저 사람에게 길들여지다 보니 이제는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답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라도 꼭 병을 이겨내라고 했지요.”그러자 황 씨는 “제가 남편 밥은 무조건 챙겨주곤 했지요.
새벽 4시에 골프 치러 간다고 하면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3시 반에 깨워 식사를 하시라고 했다”고 말했다. 네 시간 반에 걸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황 씨는 수술 경과를 잘 살펴보고 회복을 돕기 위해 병원에서 지내다 지난해 10월 24일 퇴원했다. 김 회장은 병원에서 함께 지내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힘들어하는 아내를 억지로 일으켜서 산책을 하곤 했습니다.” 황 씨는 잃은 한쪽 가슴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평소에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가족도 더 자주 보고, 교회 지인들의 끊임없는 기도에도 감사했다.
황문자 씨는 남편 성격이 180도 변했다고 말한다. 무뚝뚝하고 다혈질이던 김 회장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제가 몸이 아픈 다음부터 남편이 훨씬 자상해졌어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그러자 김 회장은 “원래 부드러운 남자였다”며 “60 넘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렇듯 가부장적인 문화가 몸에 배어 표가 나지 않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한국 남자들, 아내에게 사근사근 대하는 건 잘 할 줄 모르잖아요.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일이 참 어렵더군요. 하지만 아내의 암 투병 덕에 제 표현력이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집에서 권위 부리는 건 이젠 다 포기했어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서 아예 장롱에 넣어두고 지낸답니다.”
유방암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유방암은 재발 위험이 있어 최소한 5년은 두고 보면서 정기적으로 검사해야 한다. 김 회장 부부는 의사의 주문대로 암을 예방하는 생활습관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채식 위주의 식단, 정기적인 운동, 스트레스 피하고 마음 편안하게 먹기다.
“아내는 골프를 상당히 잘 쳤습니다. 어서 완쾌한 후 함께 필드에 나갔으면 합니다. 아내가 평생 저를 보살펴줬으니 이젠 제가 보살펴줘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