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Cover

Home>포브스>On the Cover

[아버지와 딸] 김성주 회장의 `부전여전` 

돈보다 더 귀한 `사업가 DNA` 물려받았다 


“지금 히스로 공항이에요. 어제 영국 해러즈 백화점 사장과 미팅이 있었거든요.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해러즈 백화점에서 MCM이 루이뷔통보다 잘나갔습니다. 하지만 본사가 어려워지며 문을 닫았어요. 우리가 MCM을 인수한 후엔 다시 인기를 얻고 있어 매장 재오픈에 대해 서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5월 18일 저녁 김성주(55) 성주그룹 회장이 전화를 받은 곳은 런던 히스로 공항. 영국 출장을 마치고 독일로 이동하던 참이었다. 그는 “1년에 비행기 타는 횟수만 80번이 넘는다”며 “전문경영인을 구해야지 몸이 힘들어 미칠 지경”이라며 웃었다.

1990년대 초 해외 명품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와 사업 발판을 닦은 김 회장은 2005년엔 독일 명품 MCM을 사들여 큰 화제를 모았다. MCM은 현재 30여 개 나라에 100여 개 직영 매장을 두고 있다. 그는 “지난해 한국 명품시장에서 면세점을 제외하면 루이뷔통 다음으로 매출이 많았다”며 “구찌와 프라다는 물론 샤넬까지 제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대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수근 명예회장의 막내딸이다. 재벌가 딸로 태어나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그 때문에 아버지 지원은커녕 혼자 밑바닥에서 사업을 개척해야 했다. 아버지를 원망할 법도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돈보다 훨씬 큰 유산을 받았다”며 입을 열었다.

부전여전1 사업가 DNA를 타고나다

1970년대 말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김성주 회장은 미국 명문대 앰허스트에 지원해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라는 이유로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딸은 아버지 지인 중 앰허스트대 졸업생들을 집으로 모셔 설득에 나섰다. 결국 유학 길에 올라 1981년 앰허스트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원(LSE)을 거쳐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하버드에선 영국계 캐나다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감행했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 게다가 유교 정서가 강했던 재벌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집안 좋은 배필과 정략결혼을 준비했던 아버지는 딸을 ‘버린 자식’ 취급했다. 학비와 생활비도 끊었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찾아다녔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첫 직장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백화점 블루밍데일. ‘패션 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로 미국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는 백화점이다.

김 회장이 근무한 곳은 패션업계 전설로 불리는 마크 트라우브 회장의 직속 기획실이었다. 그는 “패션산업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5년 가까이 부모와 연락을 끊고 살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 업체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싶다는 미국 회사를 알게 됐다. 마침 아버지 회사인 대성그룹엔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계열사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직접 연락하지 못하고 그룹 임원을 통해 이 제안을 전달했다.

당시 현대차가 미국 수출을 막 시작하던 시절이어서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들은 미국 진입장벽을 넘기 위해 해외 기술 도입에 목말라 있었다.


▎96년 미국 텍사스주 오클라호마 유전 개발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고 김수근 명예회장(왼쪽에서 셋째).

합작회사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아버지가 미국 디트로이트에 왔다. 10여 명의 임원을 이끌고 나타난 아버지는 5년 만에 딸을 불러 통역을 시켰다. 부녀 간 어색한 분위기는 협상의 격렬한 줄다리기에 묻혔다. 양쪽 의견차가 너무 심해 협상은 3일 만에 결렬 위기에 처했다. 딸은 ‘어차피 깨질 협상이라면 내게 기회를 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중재자로 나선 딸은 서로에게 양보할 만한 제안을 하나씩 내놓았다.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윈-윈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객관적 중재에 양측은 3시간 만에 합의에 도달했고, 2억 달러 규모의 합작회사가 탄생했다.

협상이 끝나고 저녁에 열린 파티 자리. 미국 회사 임원이 아버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더 걸었다. “합작회사의 이사회 자리 중 하나는 당신 딸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껄껄 웃고 말았지만 상대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결국 딸은 당시 합작회사의 이사를 맡으며 금의환향했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보면서 사업가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나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빼닮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부전여전2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합작회사가 성공적으로 출범하자 아버지가 다시 딸을 불렀다. 딸은 난생처음 아버지 사무실에 갔다. 김 회장은 “당시만 해도 대성그룹엔 차나 커피를 끓이는 비서 외엔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며 “어머니도 회사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회사에 기여했으니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딸은 패션 회사를 차릴 테니 자본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딸의 제안에 아버지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3억원을 내놓았다. 사옥 내 창고로 쓰던 먼지 쌓인 방을 사무실로 내줬다. 책상 하나와 컴퓨터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성주인터내셔널이다. 그는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것을 흠모하고 자랐기에 내 사업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업을 시작한 딸에게 아버지는 세 가지를 조언했다. 신용으로 경영하고, 멀리 보고 투자하며, 정치와 부동산 투기는 일절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경영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알려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너무 철학적이라 실망했다”며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 세 가지가 내게 가장 중요한 경영 지침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1년 세상을 떠난 김수근 명예회장은 연탄에서 시작해 석유·가스 등 에너지 한 우물을 판 한국 에너지산업의 선구자다. 김 명예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7년 대구 칠성동에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연탄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석탄, 석유, 가스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국내 최초의 종합에너지 업체로 발돋움했다.

김수근 명예회장이 한 우물을 판 데는 ‘번 만큼만 투자한다’는 지론이 있다. 평소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경영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소개한 평전 <가보니 길이 있더라>에도 이는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견할 때 에너지 문제가 중차대해질 것”이라며 “내 평생을 에너지 문제와 씨름해 국가와 사회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투명 경영으로도 유명했다. 출장을 갔다 오면 영수증 한 장까지도 빠짐없이 챙기고, 경비가 남으면 회사에 고스란히 넘겼다. 이뿐만 아니라 외국 호텔 객실에서 쓰고 남은 일회용 비누를 “집에서 면도할 때 쓰면 좋겠다”며 가방에 넣어 왔다. 정치권 압력에도 초연했다. 친구였던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정치헌금 요구를 거절해 세무조사를 받았을 정도다.

김성주 회장 역시 아버지를 닮았다. 김 회장은 성주인터내셔널을 통해 구찌, 이브생로랑, 소니아리키엘, MCM 등 명품 브랜드 딜러 계약을 하면서 본격적인 패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는 그룹과 관련한 일을 해볼 것을 원했던 것 같지만 나로선 패션 사업을 가장 잘 알고, 이를 가장 좋아했다”며 “특히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배운 노하우를 한국에 접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처럼 투명 경영을 고집한 탓에 사업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김 회장은 “뇌물과 접대를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어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며 “특히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김 회장의 남다른 안목과 원칙을 고수한 경영은 거래처의 신용을 얻기 시작했고 회사는 성장했다. 성주인터내셔널은 설립 4년 만인 1995년 매출 400억원을 돌파했다. 김 회장은 1997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뽑혔다.

투명 경영은 외환위기 때 빛을 발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수입 위주였던 성주인터내셔널은 매출이 줄었지만 이자가 불어나면서 300억원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했다. 부도 위기까지 갔던 김 회장은 구찌의 판권을 본사에 넘기면서 270억원을 받아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구찌에서는 우리 장부에 있던 유형자산 리스트를 믿지 못해 실사까지 했지만 결국 장부와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만한 값을 지불했다”며 “지금까지 이중장부나 편법을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빚지고 못 사는 것도 아버지와 판박이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엔 아버지 구두를 닦거나 물건을 정리해 용돈을 벌었고, 매년 아버지와 ‘임금협상’을 해 액수를 올렸다”며 “사업 자본금으로 아버지에게 빌렸던 3억원을 나중에 이자까지 더해 갚았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에게 돈이나 회사를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하는 유일한 자식이었다”며 “나중엔 아버지와 더 진실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돌아가시기 전 나를 부르시더니 ‘어떻게 여자인 네가 내 기질을 가장 닮았느냐’며 후회하셨다”며 “난 ‘후회하지 마시라.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회고했다.

부전여전3 가보니 길이 있더라

김 회장은 국내를 넘어 해외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글로벌 시장 중 특히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4월엔 베이징의 최고급 백화점 신광톈디(新光天地)에 직영 매장을 열었다. MCM은 이로써 베이징,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직영점과 공항 면세점을 합쳐 중화권에만 모두 9개 매장을 운영하게 됐다.

그는 “올해 안에 매장을 30개까지 열고, 2015년엔 100개로 늘려 중국 명품시장을 석권하겠다”며 “해외 매출 비중도 50%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MCM이 승승장구하면서 투자 러브콜도 쇄도하고 있다. 김 회장은 “세계적인 투자은행 담당자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됐을 정도”라며 “우리에게 매각을 희망하는 브랜드도 널려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아직은 MCM에만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는 “3~4년 후 상장을 통해 신규 사업에 나설 예정”이라며 “지금은 문어발식 확장보다 MCM의 중국시장 공략에 올인하겠다”고 밝혔다.

해외진출의 경우 김 명예회장이 선구자였다. 대성산업은 1970년 해외자원투자사업 국내 1호인 호주 드레이턴 광구 사업에 투자했다. 당시 김 명예회장은 사보를 통해 “이제부터 대성은 해외자원 개발과 수입에 매진해야 할 시기”라며 “호주, 캐나다, 미국 등에 진출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된다’는 평소 지론처럼 김 명예회장은 철저한 현지 조사와 검토를 거친 후 주도면밀하게 해외진출을 계획했다. 본격적 호주 진출을 공표한 지 4년 만인 1980년 시드니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탄광을 개발했을 정도다. 유전사업으로는 1990년 리비아 광구 개발에 참여했고, 1992년 베트남 가스전에 뛰어들었다.

김 회장이 해외진출에 나서는 데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김 회장은 “재벌가 출신의 여성 CEO들이 해외 브랜드 수입에만 매달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글로벌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이겨 한국의 젊은 여성에게 꿈을 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10년 후엔 루이뷔통을 따라잡고 세계 럭셔리 시장 판도를 바꾸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평소 수익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평소 외동딸에게 ‘유산은 꿈도 꾸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는 “아버지처럼 기업을 통해 애국하고 싶다”며 “향후 전 재산을 북한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106호 (2011.06.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