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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경일의 경영리더십 - 창업에는 단절 없는 준비 경영의 자세가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위화도 회군’이라는 역사적 사건만 보면 태조 이성계의 행동이 즉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조선 건국은 철저한 준비와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인생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물며 역사의 순간에 다가오는 기회란 더 말할 나위 없다. 태조 이성계의 인생은 변방의 무관 시절부터 스스로 이룩한 실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되기까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곳곳이 결정지었다. 거창하게 말만 앞세운 게 아니라 구체적 실적으로 증명해 냄으로써 군내에서 지위는 급부상하고, 이를 계기로 요동 정벌을 통수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욱일승천의 기세와 같은 것이리라. 이제 운명은 그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었다. 뽑은 칼을 어디로 휘두르느냐에 따라 정벌군 대장으로서 영예를 한껏 드높일지, 역심만 품는다면 하늘 아래 최고지선의 자리를 넘볼지 결정 나는 판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 그의 입지전적 창업 과정은 이런 배경하에 시작됐다.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낸 조선 창업


▎이성계는 외부로 돌려야 할 칼을 안으로도 돌리는 내실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창업으로 가닥 잡았다.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함경남도 영흥)에서 고려조의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인 이자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창업의 무대는 힘의 균형이 늘 요동치고, 기존 질서에의 균열이 발생하는 변화가 무쌍한 변방이었다. 그는 원나라의 점령지인 쌍성에서부터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해 마침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킴으로써 더는 변방인으로 남지 않게 됐다. 변방인에서 중앙인으로 일약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서서히 자기 대에 왕가(王家)의 기틀을 완성하는 초석을 놓았다. 창업의 기회는 벼가 무르익어 가듯 서서히, 때로는 급물살을 타듯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척돼 갔다. 1388년, 그에게 마침내 ‘위화도’라는 강 사이에 놓인 작은 섬 하나가 창업을 완성하는 결정적 키워드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의 결정을 계기로 그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맞이한다. 외부로 돌려야 할 칼을 안으로도 돌리는 내실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창업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던 것은 이미 판세가 이성개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뜻한다. 최영 장군이 있었지만, 이미 모든 군사력이 이성계에게 집중됐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회군을 단행한 이상, 이성계는 1인자 자리를 두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조민수의 실각 이후, 이성계와 창업 지지파들은 빠르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오랜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1392년 7월, 마침내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이 추대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이로써 조선은 창업의 새 역사를 맞이하고, 고려는 34왕 474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창업의 과정이 얼마나 오랜 준비의 결과였는지는 태조 즉위 11일 만에 관제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준비 끝에 창업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을 기반으로 자기 세력 구축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제휴 카드는 세를 불리는데 무엇보다도 유용한 방도였다. 자신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흥 무장 세력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합치는 절묘한 정치력을 발휘한 것은 이를 목적에 둔 것이었다. 제휴·결집은 힘을 모으는 이성계식 리더십의 한 특징이었다. 회군하면서는 동료 사령관인 조민수를 동참시켰고, 수하 병사들로부터 충성 언약도 받아냈었다. 또 다양한 민심 이반책을 통해 고려 백성의 환심을 사는데도 성공했다. 고려조를 폐하면서도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시점을 4년 후로 연기한 것은 이 같은 치밀함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성계, 후계자 선정에서는 리더십 한계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념해 만든 태조 어보.
창업을 조직화하는데 사상적 구심점은 명분과 실리 양측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전복하는데 힘을 모은 고려의 문신들은 그와 사상적으로도 동질 의식을 지녔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열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국가 창시에 큰 관심을 뒀다. 전제개혁을 통해 기존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들 쪽으로 전환한 것은 당연히 혁명의 목적을 나누는 분배의 과정이기도 했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반란 세력의 경제적 역량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정적을 무력화시키는 책략으로 작용했다. 경제적 토대를 장악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준비된 역량을 드러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요로의 인사들은 오랜 시간 치밀하게 국가 창업을 준비했다. 예를 들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조준, 정도전, 남은은 물론 뒤에 개국공신에 포함된 52명 대부분이 공양왕 대부터 창업을 위한 준비 활동을 같이 해온 인물들이었다.

이성계와 이들 추종 신진 사대부들 간에는 창업 말고도 공유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창업 이후 실질적인 국정 운영 과제였다. 혁명의 과정은 물론 창업 성공 이후 국가적 공론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 조선이란 신생 국가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신진 관료 집단들로서는 창업 이후 임금과 신하가 함께 통치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상이 구현되길 바랐을 것이다.

조선의 창업군주인 태조는 역사적 변절점에 국가 창업이라는 대운을 잡았다. 그는 창업에 많은 준비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창업 과정에서 모든 점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성계는 창업은 했으나 국가 경영에는 원대한 꿈과 경험이 없었다. 대부분의 창업군주가 그렇듯 그 또한 왕제로서 훈련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창업 이후 벌어진 후계자 지명 과정은 물론 개국 공신 선정 과정에서 연달아 나타난 실수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만년에는 지도력 혼선과 레임덕 현상까지 겪는 불운을 자초했다.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실수가 빗어낸 비극적인 ‘왕자의 난’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 점은 그 자신의 능력 및 리더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장군의 자리와 국왕의 자리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서 창업은 단절 없는 준비 경영의 자세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명암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창업과 경영상의 교훈을 익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니겠는가.

전경일 -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인문과 다른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적 관점을 연구한다. 저서로『조선남자』와 『창조의 CEO 세종』 등이 있다.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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