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병수 더블유앤펀엔터테인먼트 대표 

누드에 빛을 입힌 예술 ‘크레이지호스 파리’ 

사진 김현동 기자
물랑루즈, 리도와 함께 프랑스 파리의 3대 쇼로 꼽히는 ‘크레이지호스 파리’가 65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크레이지호스의 한국 공연을 기획한 이병수 더블유앤펀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만났다.

무대를 비추던 조명이 꺼지면 가로 6m, 세로 2m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특별한 아트 쇼가 시작된다. 첫 번째 테마는 ‘GOD SAVE OUR BARE SKIN(신이여, 누드를 지켜주소서)’.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 폐하를 지켜주소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품은 1989년 완성된 이래 26년째 오프닝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영국 왕실 근위대 군복 중 모자와 장갑, 벨트, 신발 등 최소한의 소품만 걸친 여섯 명의 아름다운 무희들이 병정이 돼 무대에 등장하자, 또 다른 옷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바로 빛이다. 옷을 벗고 빛을 입은 무용수들이 다양한 안무와 표정으로 만들어내는 이 공연이 바로 ‘크레이지호스 파리(CRAZY HORSE PARIS)’다. 크레이지호스 파리는 무용수의 몸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다양한 조명을 입힌 뒤 안무와 표정을 더하는 세계 유일의 네이키드 쿠튀르(naked Couture)다.

순식간에 지나간 오프닝 공연에 이어 두 번째 테마인 ‘Lecon d’Erotisme’가 시작됐다. 이번 작품의 소품은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인 ‘입술 소파’다. 새빨간 입술 모양의 소파 위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무희만으로 무대가 꽉 찼다. 다소 몽환적인 샹송이 흐르자 무희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야릇한 몸동작에 입술이 마른다면 쇼와 함께 준비된 샴페인을 한 모금해도 좋겠다. 이 두 개의 테마를 포함해 총 14개의 다른 프로그램을 1, 2막에 걸쳐 90분간 즐기게 된다.

샴페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이 쇼는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탄생했다. 파리의 유명한 전위 예술가였던 알랭 베르나댕은 모든 생명이 여자의 몸에서 탄생하는 만큼 여자보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게 없다고 여겨 여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루이비통, 샤넬 등 명품이 즐비했던 샹젤리제 거리에서 실오라기만 걸친 여자의 몸에 빛이라는 옷을 입힌 패션 예술을 하기로 한 게 ‘크레이지호스’의 시작이었다.

손짓 하나에도 예술의 혼 담아


크레이지호스는 첫 공연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1500만 명이 관람했으며, 그중에는 존 F. 케네디, 마릴린 먼로, 스티븐 스필버그, 크리스티나 아길레나, 비욘세, 워런 버핏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이 포함돼있다. 이제는 물랑루즈(Moulin Rouge), 리도(LIDO)와 함께 프랑스 파리의 3대 쇼로 자리 잡은 크레이지호스 공연이 창립 65주년 기념 월드투어의 행선지로 아시아의 국가 중 서울을 선택했다. 이번 서울 공연의 레퍼토리는 ‘태양의 서커스’로 유명한 프랑스 안무가 필립 드쿠플레(Philippe Decoufle)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크레이지호스 파리의 레퍼토리를 선별해 재구성했다.

지난 5월 6일 서울 광진구의 워커힐씨어터에서 크레이지호스의 한국 공연을 기획한 이병수 더블유앤펀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만났다. 이날 인터뷰는 크레이지호스의 특색을 살려 관능적인 빨간색과 화려한 파란색으로 꾸며진 프로듀서 룸에서 진행됐다. 일명 VIP룸으로 불리는 이곳은 단체 관람객을 위한 장소로 샴페인을 즐기면서 크레이지호스 공연을 볼 수 있다. 이 대표는 “실제 프랑스 파리 크레이지호스의 프로듀서 룸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얼마나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썼는지 화장실에는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빨간 두루마리 휴지가 걸려있었다.

이 대표와 크레이지호스의 인연은 2001년에 시작됐다. 그는 당시 크레이지호스를 처음 본 소감에 대해 “생전 보지 못한 독특한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무용수들이 모두 누드임에도 외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예술적 체험으로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이후 누드 공연인 크레이지호스가 왜 예술작품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파리를 찾을 때마다 크레이지호스를 반복해서 보며, 오랜 기간 생각해낸 끝에 얻은 답은 제작자인 알랭 베르나댕이 엄청난 예술의 혼을 이 쇼에 불어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알랭 베르나댕은 예술작품으로서 이 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대표적인 게 무용수들의 신체조건입니다. 크레이지호스의 무용수를 일컫는 크레이지 걸이 되려면 키 168~172cm, 양 가슴 사이의 거리 21cm, 배꼽에서 치골까지 거리 13cm라는 조건에 부합해야 합니다. 가슴도 B컵 이하여야 하죠. 너무 크면 그로 인해 관객들이 외설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크레이지 걸스는 성형이나 문신을 해서도 안됩니다.” 무대를 보고 나면 이렇게 신체조건을 규격화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비슷한 키와 몸은 그들의 벗은 몸이 아닌 안무와 표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대표는 신체적인 조건 외에도 크레이지 걸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클래식 발레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손짓 하나에도 예술의 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까다로운 조건에 충족시킬 수 있는 여성이 전 세계에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매년 새로운 크레이지 걸이 탄생한다. “크레이지호스는 공연을 위해 인력풀을 항상 80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이나 육아, 혹은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그만두는 무용수가 생겨 매년 14~20명의 공석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매년 오디션을 진행하죠.” 크레이지 걸이 되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는 여성들이 매년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오디션을 통과해 크레이지 걸이 되면 1년간 1인당 500L 화장품과 300개의 립스틱, 720쌍의 인조 속눈썹, 2500켤레의 스타킹을 소모한다. 여기에 명품 브랜드의 유명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고 신발을 신게 된다. 크레이지 걸스가 입는 코르셋은 1889년 브래지어를 발명한 헤르미니 카돌(Herminie Cadolle)의 손녀이자 코코샤넬 디자이너 앨리스의 딸인 푸피 카돌(Poupie Cadolle)이 전담하고 있다. 무용수들은 프랑스의 전위적 패션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가 만든 의상을 입고,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이 특별 제작한 하이힐을 신는다. 크레이지 걸 한 명을 위해 1년에 최소 6켤레의 구두가 맞춤 제작된다.

크레이지호스를 파리가 아닌 안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건 이 대표의 숨은 공이 크다. 이 대표는 크레이지호스를 처음 본 2001년 SK그룹 소속으로 워커힐 단장을 맡고 있었다. 이에 워커힐씨어터에 공연을 올리기 위해 바로 크레이지호스 제작팀에 러브콜을 했지만, 크레이지호스 제작팀은 “크레이지호스는 파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같은 해 크레이지호스 파리가 미국 라스베가스 MGM 그랜드 호텔에서 50주년 상설공연을 펼치는 걸 지켜보게 됐다. 크레이지호스 파리의 사상 첫 상설공연이었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즐겨라


2005년 크레이지호스 파리는 싱가포르로 건너가 두 번째 상설공연을 했다. 이 대표는 2011년 다시 크레이지호스 제작팀에 구애를 시작했다. “1년에 네 차례 이상 파리에 가 크레이지호스 공연을 보고, 한국에서 공연할 것을 끊임없이 제안했습니다.” 2011년 말 기밀유지협약(Non-disclosure agreement)을 맺고 공연 계약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 결국 지난해 본 계약을 맺었다. 크레이지호스를 한국에 초청하기 위해 꼬박 4년이 걸린 셈이다. “저는 저와 같은 경험을 한국의 많은 분이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멀리 파리를 가지 않더라도 크레이지호스를 볼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는 크레이지호스를 잘 즐길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알려줬다. “저는 크레이지호스 공연을 그림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프로시니엄 무대를 그림의 액자로 보면 그 안에 펼쳐지는 공연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막은 누드 자체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구상화입니다. 관객들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구상화를 즐기면 됩니다. 2막은 관객이 도대체 무엇을 상상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모호한 추상화가 펼쳐집니다. 관객들은 그림을 감상하듯 크레이호스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한국 관객들이 크레이호스를 통해 90분 동안이라도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공연을 보고 돌아갔을 때,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답고 즐길만하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작은 바람이다.

- 글 정혜선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김현동 기자

201506호 (201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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