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산호초 섬을 연결한 42개의 다리를 모두 건너야만 미국의 ‘땅끝 섬’ 키웨스트에 닿을 수 있다. 망망대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듯한 아찔함도 잠시, 햇살을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이 코 끝에 스미면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US-1 도로. 키웨스트로 가는 유일한 육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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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공간을 바꿀 것을 추천한다. 뜨거운 여름, 이색적인 여행지로의 휴가는 어떤가? 알래스카의 빙하 여행부터,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와 태양의 도시 프랑스 남쪽의 아를까지. 자연은 생각보다 육중하며 대단하다. 출발하기 전에 먼저 눈으로, 가슴으로 떠나보자. 분명, 새로운 인생은 나에게로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1930년대 한 작가 지망생이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 미국 최남단 섬 키웨스트(Key West)를 찾는다. 창작의 고통을 털어놓는 젊은이에게 헤밍웨이가 충고를 건넨다. “절대 샘이 마를 때까지 자신을 펌프질해서는 안돼. 내일을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하네.” 헤밍웨이의 문하생이었던 아널드 새뮤얼슨이 스승과 보낸 1년을 추억하며 쓴 책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에 나온 구절이다. 헤밍웨이는 32살부터 8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키웨스트에서 보냈다. 최상의 것을 아낀 덕분인지 그는 말년에서야 『노인과 바다』를 펴냈다. 헤밍웨이가 작품 활동에서는 그 신조를 지켰을지 모르나, 인생에 있어서는 성급했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를 너무 일찍 찾았다.키웨스트는 미국 플로리다 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진 여러 섬 가운데 가장 끝에 있다. 점처럼 연결된 섬을 ‘플로리다 키(key·산호초로 둘러싸인 낮은 땅)’라고 부르는데 키 중 가장 서쪽(west)에 있는 섬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한겨울인 1~2월에도 낮 평균기온이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기후를 자랑해 미국인들에게는 최고의 피한(避寒) 휴양지다.
‘바다 위 도로’를 달리는 쾌감
▎헤밍웨이가 1931~1939년까지 살던 집. 집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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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단 지점임을 알리는 표식인 서던모스트 포인트 (Southernmost Poi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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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향하는 길은 마이애미에서 US-1 고속도로를 타면서부터 시작된다. 멕시코 만과 플로리다 해협을 가르는 약 202㎞의 왕복 2차선 도로는 크고 작은 섬을 잇는 42개의 다리로 이뤄졌다. 이 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다 위 도로(Overseas Highway)’다. 양 옆으로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를 끝없이 가르는 쾌감은 달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다.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 섬과 바히아 혼다 키를 연결하는 11㎞ 구간, 세븐 마일 브릿지다. 이 다리는 아놀드 슈와제너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영화 <트루라이스>에서 비행기가 다리 위를 달리는 차를 쫓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폐쇄된 옛 교량을 옆에 두고 달리는 기분이 묘하다. 차를 잠시 세우고 끊어진 다리 끝까지 걸어가볼 수도 있다. ‘천상의 길’ 끝에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섬, 키웨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오래 전 스페인이 처음 발견한 이 섬이 미국령이 된 것은 1822년. 배를 타지않고는 갈 수 없던 외딴섬은 1938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세계적인 휴양지로 발전했다. 본토인 플로리다 반도까지의 거리가 약 130마일인데 반해 쿠바 하바나까지는 90마일(약 150㎞)에 불과해 양국의 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헤밍웨이가 살던 하얀 목조주택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돼 있다. 그는 이 집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킬리만자로의 눈』 등을 집필했다. 집 건너편에는 등대 박물관이 있다. 88개 계단만 오르면 되는 작은 등대이지만,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는 탓에 지역 전체를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7월 말 열리는 ‘헤밍웨이 데이 페스티벌’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유명한 슬로피 조 바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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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로리 광장에서 바라본 일몰.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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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번화가인 듀발 거리를 중심으로 작은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 바가 늘어서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는 1933년부터 80년 넘게 매일 영업 중이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다름 아닌 헤밍웨이의 단골집이기 때문이다. 매년 헤밍웨이의 생일이 있는 7월 말이면 바에서 ‘헤밍웨이데이 페스티발’이 열린다. 헤밍웨이와 닮은 사람을 선발하는 이 행사는 3일 밤낮 계속되는데, 이맘때면 헤밍웨이처럼 하얀 턱수염을 기른 덩치 큰 남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듀발 거리의 남쪽 끝에는 이곳이 미국 최남단 지점임을 알리는 표식이 서 있다. ‘쿠바까지 90마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커다란 표식은 키웨스트의 상징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면 긴 줄을 서는 게 예사다.
해 질 녘에는 섬 서쪽 끝에 위치한 맬로리 광장으로 가보자. 푸르른 멕시코 만이 온통 붉게 물드는 풍경은 키웨스트에서 놓쳐서는 안될 장관이다. 광장 곳곳에 펼쳐진 공연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새빨간 태양이 수평선에 매달려 하루의 작별을 고한다. 열기가 한층 가라앉은 밤의 풍경도 아름답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티키바에 앉아 라임을 쭉 짜 넣은 모히토 한 잔을 들이키면 여독이 싹 풀린다. 키웨스트는 ‘휴양’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작고 예쁜 섬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인생에 있어 최고의 것을 아껴야 한다면 이곳은 죽기 직전에나 찾아야 한다. 키웨스트, 그 이상은 없다.- 글·사진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