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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6] 두산그룹 

최고 장수기업의 전통과 지혜로 젊고 새로운 100년에 도전하다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 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9월호는 가장 역사가 오래됐지만 가장 젊은 기업, 두산그룹이다. 박승직 창업주와 박두병 초대회장, 그리고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사회공헌에 노력하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집중 조명했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흔들리지 않는 정도경영과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사회공헌에 묵묵히 매진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두산그룹에 그치지 않고 나라 경제의 주춧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평가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가 주목할 만한 성명을 하나 냈다. 상공회의소는 “선배기업인의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열악한 환경에도 근면과 성실로 힘을 보탰던 근로자와 국민들의 희생정신, 국가주도의 치밀한 정책인프라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었기에 오늘날 풍요로운 사회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며 “민관 팀플레이를 강화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경영관행과 기업문화를 과감히 벗어던지는 혁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기업이 정부, 국민과 삼각편대를 이뤄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당찬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역동성이 엿보이는 시의적절한 성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성명을 주도한 대한상의 회장이 바로 박용만(60) 두산그룹 회장이다. 대한상의는 전경련과 함께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 3월 대한상의 회장 연임에 성공하면서 개별 그룹의 회장을 뛰어넘어 재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펄펄 날고 있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태명 <한국경제신문> 기자는 최근 <월간중앙> 5월호 기사에서 박용만 회장의 탄탄한 입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2014년 7월 제주도 롯데호텔 1층.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제주하계포럼 마지막 날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방상공회의소 회장단과 함께 출입기자단을 만났다. 2시간가량 이어진 술자리에선 ‘어디가 재계 대표단체냐’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전경련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재계 대표단체다”, “이제 대한상의가 재계 대표단체가 됐다고 봐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 그때 박용만 회장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대한상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데 어떻게 전경련과 비교해. 상대가 안돼….” 물론 웃자고 한 얘기였다. 그러나 박 회장의 농담 속에는 이제 대한상의가 전경련을 제치고 재계 대표단체로 올라섰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기업인 박용만


▎1. 1936년 촬영한 두산 삼대(三代)의 모습. 매헌 박승직(창업주, 오른쪽), 연강 박두병(초대회장, 왼쪽 위), 장남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이다. 사진 두산그룹. / 2. 현재까지 보존돼 내려온 주식회사 박승직상점 현판. 두산 본사인 서울 중구 두산타워빌딩 33층에 걸려있다. 현판 왼쪽엔 연강 박두병 회장의, 오른쪽에는 매헌 박승직 창업주의 흉상이 놓여있다.
이태명 기자는 이 기사를 정리하며 “대한상의가 급속도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재계 차원의 주요 행사를 대한상의가 독식하다시피 한다....재계 권력의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썼다. 박용만 회장이 이미 재계의 대표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포브스코리아가 재계 10위의 두산그룹을 10대 기업 기업가정신 시리즈의 6번째로 기획한 것도 기업 규모보다 박용만 회장의 재계 대표성과 기업가정신을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은 역사가 깊은 기업이다. 올해로 설립 119년을 맞은, 한국 기업들 중에서 보기 드문 장수기업이자 지속성장 기업이다. 두산의 성장세는 현재진행형이다. 경영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구한 말부터 2000년까지 자본금총액 기준으로 두산은 1926년 재계 17위, 1935년에 재계 14위였다. 현재는 30대 기업군 중 10위다. 지금이 두산그룹 역사상 가장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두산의 이 새로운 100년을 지금 한국 재계의 거물로 성장한 박용만 회장이 주도해가고 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를 건너 뛰어보자. 두산그룹의 창업주는 매헌(梅軒) 박승직(1864~1950)이다. 매헌은 경기도 광주 태생이다. 매헌은 33세 때인 1896년 8월 1일 서울 배오개(현 종로 4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을 개설한다. 두산그룹의 뿌리다. 매헌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해 신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20여 리 떨어진 송파장을 왕래하며 장터 상거래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남의 땅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발전이 없다고 판단해, 1880년대 초에 본격 상인으로 나섰다. 창업의 배경에는 1894년 갑오개혁이 있었다. 육의전이 폐지되면서 시전(市廛)상인들이 관으로부터 특권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일반 상인도 상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던 것. 18세기 전반부터 배오개는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리상으로도 한반도 동북방의 상품과 삼남 지방의 상품이 모이는 교차 지역이었다. 당시 매헌이 배오개에 점포를 개설한 것은 이같은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헌은 박승직 상점을 운영하면서 근면성실함과 장사 수완으로 ‘배오개 거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의 상인기질과 서비스 정신은 타고났던 모양이다. 매헌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종업원과 집안 식구들에게 “손님이 뺨을 때리거든 그 손을 붙잡으며 ‘손님, 손이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말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역발상이자 ‘고객경영’의 원형이라고 할만하다. 매헌은 사회활동에도 열성이었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후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으로 재임하면서 면포업계 상인들의 권익옹호와 사업신장에 헌신한다. 1905년 7월에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최초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한인상계 리더로서 활약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바로 현재 대한 상공회의소의 뿌리다. 그러고 보면 창업주인 매헌과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 그리고 박용만 회장이 대를 이어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매헌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상을 받은 일이다. 매헌은 1907년,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 환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족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 70여 원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대구 광문사에 기부해 서상돈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두산그룹이 그로부터 94년 후인 2001년 2월,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회 서상돈상 시상식에서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창업주로부터 이어진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이 3세 경영인에게 면면히 이어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박승직 상점엔 ‘박가분’이라는 이색적인 제품이 있었다. 박가분은 1915년 4월부터 매헌의 부인 정정숙 씨가 사업 내조의 일환으로 수공으로 제조한 화장품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제공했으나 반응이 좋아 여성들에게 판매해 인기를 끌었다. 박승직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된다. 매헌이 사장을 맡으면서 근대적인 기업으로 발전하는데, 가장 큰 변화는 감각상각비 계상과 대손처리 실시, 금전등록기 설치 등 회계처리를 근대화한 것이다. 수입 면직물뿐만 아니라 인조견 등 국내 직물류까지 판매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또 상점의 홍보를 위해 달력을 제작·배포했고, 신문에 광고도 게재했다. 요즘 기업들이 하는 마케팅과 홍보전략의 시초인 셈이다.

매헌은 이후 1933년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된다. 당시 대주주는 일본 기린맥주로, 매헌 등 2명의 조선인이 소주주로 참여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매헌의 장남인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의 지배인이 되었고, 동양맥주로 발전하게 된다. 두산의 초창기 사업을 대표했던 OB맥주의 시초다. 1946년, 박승직은 경제난으로 휴업 중이던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해 현재 두산그룹의 여명기를 열게 된다. 경영사학자들에 따르면, 매헌이 박승직 상점을 통해 보여준 기업가정신은 인화, 근검, 정직과 신용이다. 이같은 기업가정신이 담긴 매헌의 좌우명 ‘근자성공(勤者成功)’은 지금도 대를 이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특히 매헌의 기업가정신 중에서도 인화와 인재경영에 주목한다. “점원 없이는 상점이 상점이 될 수 없으며, 좋은 점원은 곧 그 상점의 보배올시다. 10년 또는 15년, 인생의 일생 중 가장 존귀한 청춘 시절을 포목상 점두에서 자질과 주판질로 보내고 지내온 그네들의 공로를 생각하면 눈물이 돕니다...” 매헌이 1929년 5월, <매일신보>에 직원들의 근속표창을 하면서 발표한 담화문의 한 대목이다. 매헌이 직원들을 얼마나 아끼고 구성원간의 인화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연강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을 거쳐 현재의 박용만 회장대에까지 핵심가치로 이어진다. 인재경영을 중시하는 두산의 ‘사람이 미래다’ 슬로건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은 인화와 근검, 신용


▎3. 직원들을 격려하며 활짝 웃고 있는 1950년대 연강 박두병 회장 모습. 박두병 회장은 기업 경영에서 인간관계를 가장 중요시해 ‘인 화’를 늘 강조했다. / 4. 연강 박두병 회장이 1970년 5월 13일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총회에서 회장 당선 후 취임사를 하고 있다. 연강은 타계하기 한 달 전까지 대한상의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매헌의 뒤를 이은 연강(蓮崗) 박두병(1910~1973) 회장은 오늘날 두산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나가는 데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두산그룹의 실질적 창업자로 불린다. 연강은 1951년 ‘주식회사 두산상회’를 설립했고,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동양맥주를 설립해 두산의 성장가도를 이끌었다. 연강은 1960년 건설회사인 동산토건주식회사(두산건설 전신)를 설립한 데 이어 1967년 국가의 기간산업인 기계공업 분야로 진출한다. 1963년에는 OB맥주를 미국에 첫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1968년엔 코카콜라와 환타를 생산해 시판했다. 합동통신사를 인수해 한국 언론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등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해 두산그룹의 매출액을 무려 349배로 성장시킨 탁월한 경영자였다.

연강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의 전신)을 졸업한 후 은행에서 4년간 실무를 익힌 뒤 매헌이 하던 가업을 계승했다. 매헌의 개척자적 창업정신을 이어받은 연강은 1936년 박승직 상점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연강의 색깔을 입힌 지금의 두산이 만들어진다.

해방이 되자 연강은 박승직상점을 무역업체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두산 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두산은 박두병의 가운데 자인 두(斗)에다 산(山)이라는 글자를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매헌이 새 사업을 시작하는 연강에게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는 의미로 지어주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근검절약해서 부자가 되라는 메시지다. 이를 깊이 가슴에 새긴 연강은 “인생에서 과욕과 무리는 절대 금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순리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처세술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정도경영과 내실경영이 그의 기업가적 신념이 된다.

연강의 청렴함과 정도경영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연강은 1967년 이후 외자도입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경제의 현대화에 이바지했다. 한국경제의 도약기였던 1970년대 초 연강은 경제 문제에 관련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자문에 자주 응했다고 한다. 그 무렵은 국내자본 축적이 미흡했던 때라 외자도입으로 거의 모든 공장을 건설하던 시기였다. 외자도입 심의위원으로 있는 동안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외자를 빌려 국가 기간산업에 진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연강은 공인의 청렴한 자세를 굳게 지켰다. 연강의 이러한 철학과 자세는 현재 박용만 회장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기업인으로서 연강의 삶은 한 갈피 한 갈피가 기업가 정신의 보고다. 연강은 1970년 자신이 창립한 OB그룹의 경영을 정수창 회장에게 맡겨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실천한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업계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기업경영사에 큰 획을 그은 결단이었다. 연강의 이런 기업풍토 쇄신 노력은 당시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한국기업 혁신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연강은 또한 창조성이 뛰어난 경영자였다. “일을 맡기고 맡는 것은 그 일을 추진한다는 것으로서 ‘갑(甲)’이란 상태에 있던 일을 맡고 나서 “갑(甲) 더하기 무엇”이란 상태로 해 주고 해 받는 것으로서 동(動)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여기에서 더 큰 가치가 창조되는 것을 봅니다. 무게가 더 큰 일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또 같은 무게의 일이면 그것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64년 1월 연강의 OB뉴스 권두언 중에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영락없는 ‘창조경영’이다. 일을 창조적으로 해야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이같은 사고는 연강의 뒤를 이은 두산의 CEO들과 박용만 회장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상공회의소는 재계의 총의(總意)다”


연강은 이처럼 부친인 매헌이 축적한 상업자본을 산업 자본화해 지금의 두산을 일으켜 세웠고, 기업활동을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으로 사업보국의 신념을 펼쳐나갔다. ‘나’라는 개인보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기업 경영에 임했으며, 우리 가족, 우리 회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와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애국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연강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것도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사실 연강의 기업인 삶에서 대한상의를 떼어놓고 말하기는 힘들다. 연강은 “상공회의소는 재계의 총의(總意)다”는 신념으로 한국 상공업계 발전에 온 힘을 쏟은 기업가다. 연강은 타계하기 한 달 전까지도 대한상의 일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재계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3년 7월에 투병 중인 박두병 회장이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각 지방 상의 회원들과 회의를 할 때였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가 “왜 이렇게 무리를 하십니까? 일일이 챙기시지 않아도 다 될 텐데요. 좀 쉬십시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연강은 마지막 순간까지 상공업계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 다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고 한다.

“내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기업과 우리나라 상공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7월 11일, 대한상공회의소 8대 회장으로 연임된 연강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다음 달인 8월 4일, 그는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업과 나라경제를 위해 몸 바쳐온 경제계 거목의 타계에 많은 기업인들이 숙연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연강이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하던 격동의 시대였다. 연강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에 피선돼,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의 대표적 재계 리더로 존경을 받기도 한다. 연강이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태평양경제위원회, 한일민간경제협력위원회에 뿌린 씨앗들은 이후 한국 상공업계와 나라경제 발전에 큰 기둥이 되었다.

두산그룹은 연강이 타계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978년 기업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하고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이라는 연강의 의지를 기려 ‘연강재단’을 설립한다. 연강재단은 순수 기초학문과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환경연구 및 의료연구 등을 하는 학자들에게 학술연구비를 지원하고, 장학사업, 문화재보존관리사업, 교사들에게 해외견문의 기회를 제공하는 해외학술시찰사업, 중국학 연구 지원사업, 해외동포 도서 보내기 사업 등을 전개했다. 두산 창립 111주년을 기념해 2007년 10월 새단장해 문을 연 두산아트센터는 ‘연강홀’을 확대해 개관하고, 소극장 Space111과 두산갤러리를 통해 전시, 공연, 음악 등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연강이 강조한 사회공헌은 박용만 회장 체제에서 ‘Doosan Day of Community Service’(두산인 봉사의 날) 행사로 계승되고 있다. 이 행사는 두산이 사업을 영위하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임직원들이 각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공헌 활동을 펼치는 실천적인 봉사활동으로 유명하다.

위기를 두산 특유의 창조와 혁신으로 돌파


▎5. 박용만 회장은 코칭 리더십의 귀재이자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이 시대의 경영구루다. 사진은 2013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코리안시리즈 / 6. 차전에 앞서 박용만 회장이 선수단을 찾아가 선전을 당부하는 모습. 6_4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이 경남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해 박용만 회장으로부터 세계 최대 단위용량 해수 담수화 플랜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 3월 임기 3년의 상의 회장 연임에 성공하면서 개별 그룹의 회장을 뛰어넘어 재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연강은 슬하에 박용곤(83) 두산그룹 명예회장, 고 박용오 회장, 박용성(75) 중앙대 이사장, 박용현(72)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박용만(60) 두산그룹 회장, 박용욱(55) 이생그룹 회장 등 6남 1녀를 뒀다. 연강의 사후 두산그룹은 전문경영인 정수창 회장에 이어 박용곤·박용오·박용성· 박용현 회장 등 재계에서 보기드문 ‘형제경영’을 거치면서 그룹의 도약기를 맞는다.

1980년대에는 맥주·건설·전자·유리·기계·무역 부문을 중심으로 해외시장을 폭넓게 개척했고, 1990년대에는 각 부문의 기술 고도화에 중점을 두고 국제경쟁력 강화에 매진했다. 두산은 박용곤 회장 시절인 1991년 이른바 ‘낙동강 페놀사건’으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이후 특유의 돌파력으로 그 후유증을 극복해낸다. 두산그룹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김 신 경희대 명예교수는 “두산은 페놀사건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모범 환경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위기를 특유의 창조와 혁신으로 돌파하는 특성이 있다”며 “1990년대 후반 IMF체제 이후 그룹의 위기를 맞았지만 한국중공업 등 10여 건의 M&A를 성공시키며 100년 기업의 새로운 기반을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까지 주로 소비재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두산은 창업 100주년인 1996년을 전환점으로 그룹의 사업구조를 수출 중심의 중공업으로 재편하기로 한다. 새로운 100년의 경영활동의 근간이 될 2G 전략(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을 수립하고, 글로벌 ISB(인프라 지원산업)기업으로의 사업 전환을 추진한 것. ISB는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가 융합해 고도화된 엔지니어링 및 금융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거대사업으로 막대한 자본 동원력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걸출한 M&A(인수·합병)능력을 보인 박용만 회장의 역할이 컸다. 2001년 한국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 2005년 대우종합기계, 2006년 건설장비 업체 밥캣(Bobcat) 인수 등 10여 건의 M&A에 성공하면서 두산은 중공업그룹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에 성공했다. 대규모 M&A와 기업구조 변화를 추진한 중심에 ‘박용만 파워’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연강의 다섯째 아들이다. 경기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 보스턴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1977년 외환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 1983년 두산건설 뉴욕지사, 1990년 두산음료, 두산식품, 동양맥주를 두루 거치며 경영 실무를 두루 익힌 그는 오너 경영인이면서도 특출한 전문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경영능력은 실적으로 나타난다.

1995년 두산동아 부사장,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경영 일선에 뛰어든 이후 박 회장은 크고 작은 M&A를 진두 지휘했다. 오죽하면 ‘미스터 M&A’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 신 경희대 명예교수는 “2006년 밥캣 인수는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격이라고 할 정도로 M&A 당시 세간의 우려가 컸는데, 지금 건실하게 경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박용만 회장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두산은 현재 두산중공업의 해수 담수화 플랜트 등 세계 일류상품 총 19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독보적 기술 역시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영국 수처리 전문업체 엔퓨어를 인수해 역삼투압(RO) 방식 담수화 기술을 보유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박용만 회장은 또 사고가 유연한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기업과 근로자들이 구조조정을 ‘인력 재배치’나 ‘해고’로 받아들일 때 박 회장은 ‘구조조정은 기업의 미래가치를 끌어올리는 기업활동’이라고 단박에 정의했을 정도다. 박 회장은 이런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두산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그룹으로 변신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M&A와 합리적인 구조조정, 인화경영을 바탕으로 두산은 모기업 (주)두산을 비롯해 두산중공업, 두산 인프라코어, 두산건설, 두산엔진 등 계열사 21개를 보유, 자산 총액 31조3693억원으로 재계 10위(공기업 제외)를 고수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액 20조4682억원, 영업이익 1조81억원, 순이익 332억원을 달성했다. 두산그룹은 현재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이다. 두산의 해외 매출 비중은 1998년 12%에 불과했지만 2013년 기준 64%로 5배 이상 커졌다. 두산그룹에서 일하는 4만2600여 명의 임직원 가운데 2만1000여 명이 해외사업장에 소속돼 있다. 그룹의 중심인 두산중공업은 해외 수주 비중이 70%가 넘을 정도로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확대했다.

박용만 회장은 이런 글로벌 기업의 오너인만큼 글로벌 소통에 아주 능하다. 박 회장 본인이 IT 기술에 관심이 많고, 한 때 ‘트위터하는 CEO’로 불릴만큼 SNS를 통해 젊은 세대들과 소통해 인기가 높았다. 원탁회의에서 격의 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수십년 나이 차이의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의 SNS 소통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11년 1월 2일, 서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출근길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오전 10시에 시무식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그러자 9시께 박용만 회장이 사내 트위터인 야머(Yammer)에 시무식을 늦춘다고 올렸다. 젊은 직원들은 즉각 이 통보를 접수했지만 임원들 다수는 시무식이 연기된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나중에 젊은 직원들에게서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간 대한상의 회장을 맡아 박 회장의 SNS 소통이 과거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글로벌 소통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한국의 경영구루이기도 하다.

“저는 리더들에게 4가지 덕목을 갖추라고 주문합니다. 첫째, ‘자기 사업처럼 일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구팀의 코치같이 적절한 수준의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목소리로 이끌지 않고 가르치고 육성하는 코칭 리더십(Coaching Leadership)입니다. 세 번째, 혁신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혁신적이거나 최소한 밑에 사람이 제시하는 혁신을 일단 거부감 없이 들어줄 수 있는, 혁신에 대해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열정을 가지라고 주문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보일러에 불이 안타는 사람이니, 열정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가 리더십 강의를 할 때면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다.

가장 역사가 오래됐지만 가장 젊은 기업

두산그룹의 특징은 형제경영이다. 2012년 박용만 회장이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다른 형제들은 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3세의 자녀들인 4세가 각 계열사에 들어가 경영을 맡으면서 3세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박용만 회장 이후는 누가 될까? 재계에서는 두산그룹 4세들 가운데 지분 보유에서 가장 앞서 있는 박정원(53) 두산건설 회장을 주목한다. 두산가의 장손이기에 미래의 두산 4세 경영을 주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3세 경영이건 4세 경영이건 그룹의 전통인 인화경영은 여전히 그룹 경영을 관통하는 핵심가치다.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은 “반목은 결국 파멸을 가져오고, 화목은 영원한 발전을 의미한다”며 형제간, 임직원간 인화를 늘 강조했다. 하지만 인화의 전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2005년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는 경영권 분쟁을 겪었고, 박용오 전 회장은 그 분쟁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최근에도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은 학교 구조조정과 관련해 교수들과의 인화에 실패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박용만 회장은 흔들리지 않는 정도경영과 사회공헌에 묵묵히 매진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두산그룹에 그치지 않고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나라 경제의 주춧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평가다.

“우리는 하나의 단계에 집착하지 말고 다음,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생성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만 안주해서는 적응력을 잃어버린다. 항상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는 인간만이 안이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은 헤르만 헤세가 남긴 이 말을 자주 임직원들에게 인용하곤 했다. 박용만 회장도 연강의 이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용만 회장은 올해 환갑이다. 하지만 그의 사고방식과 경영스타일은 여전히 젊다. 119년 역사의 한국 최고령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두산의 조직도 굉장히 젊다. 바로 그룹의 수장이 박용만 회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박 회장은 “누군가 ‘두산은 어떤 기업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두산은 강력한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이자 사람을 키우는 방식과 열정이 남다른 기업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용만 회장의 열정이 있는 한 두산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두산그룹은 이처럼 3~4세가 조화롭게 그룹을 책임지면서 예측 가능한 후계구도 속에 오늘도 탄탄한 장수기업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9호 (201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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