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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 승부수가 통했다“예상하지 못했다. 돈을 들이는 것도 아닌데 수백만 명이 보는 홈쇼핑 채널에 제품을 노출할 수 있다는 것은 기회였다. 매출까지 늘어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더라.” 홈쇼핑 진출을 진두지휘했던 이충희(60) 듀오 대표는 당시 심경을 이같이 전했다. 그는 당시까지도 부자들만 이용한다는 인식이 있던 명품을 일반인에게도 널리 보급시킨 장본인 중 하나다.홈쇼핑에서 거둔 쾌거는 곧바로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첫해 홈쇼핑에서 20억원의 매출이 일어났고, 2010년 이후로는 100억원대 매출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 매출 1000억원대 중 10% 정도를 홈쇼핑에서 거두고 있는 셈이다. 홈쇼핑을 새로운 판매 채널로 활용하면서 백화점 매출도 함께 늘기 시작했다.이 대표의 ‘신의 한 수’로 꼽히는 홈쇼핑 진출 결정은 한 가지 고민에서 출발했다. ‘인지도’였다. 에트로 가방이 여성들 사이에서는 명품으로 통했으나 ‘인지도’ 면에서는 경쟁업체에 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광고비를 편성할 만큼 재정적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떠올린 묘안이 바로 ‘홈쇼핑’이었다. 중저가 브랜드나 생필품 위주였던 당시 홈쇼핑 판매는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내부 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에트로의 명품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내 결심은 확고했다. 어차피 광고나 마케팅을 못해서 망할 거라면 차라리 전국구 홈쇼핑에 내보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결정했다”며 이 대표는 웃었다. 상품 다각화를 모색하던 홈쇼핑 측도 적극 협조했다. 에트로 본사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브랜드 이미지 관리에 매우 까다로운 경쟁 브랜드 본사와는 다르게 홈쇼핑 진출 문제는 이 대표에게 일괄 위임했다. 한국 에트로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서 장사를 잘한 덕분이었다.듀오는 올해로 설립 23년을 맞았다. 이 대표가 명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0여 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79년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면세점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명품을 접했다.“신라면세점 근무를 시작했지만 그때만 해도 명품을 전혀 몰랐다. 매출 전표도 어떻게 구분하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는 업무를 익히기 위해 3개월간 창고에서 살다시피했다. 밥도 창고에서 배달시켜 먹었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일벌레라 불릴 정도로 퇴근도 안하고 공부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나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그같은 노력은 신라면세점 서울점의 점장이라는 위치까지 오르는 힘이 됐다. 불과 10년 만에 신라면세점 서울점의 책임자로 발돋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12년 만에 호텔신라 생활을 박차고 나와 명품 수입업체 유로통상을 거쳐 새내기 CEO로 나섰다.“명품 수입업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자 회사를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고 했다. 에트로 국내 독점권을 따기 위해 당시 수중에 있던 전 재산 800만원을 손에 쥐고 일본 에트로 총판기업 회장을 찾아갔다. 당시 800만원이면 그 무렵 인기를 끌던 자동차인 소나타 값도 채 안되는 돈이었다.
살던 아파트까지 내놓았던 확신에트로는 이 대표가 신라면세점 점장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유치하려고 쫓아다녔던 브랜드였다. “무모했다. 일단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도 끈질기게 찾아갔다. 사업을 어떻게 운영할지부터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키울지 등 호텔신라에 근무하면서 배웠던 모든 노하우를 쏟은 자료를 제출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로 설득하기를 수차례 했더니 성과가 있었다”고 이 대표는 당시를 떠올렸다. 에트로를 유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때 그가 모셨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재정보증인으로 나서줬던 행운도 따랐다. 그런 노력으로 1993년 이 대표는 에트로 국내 판권을 따내며 명품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순탄할 것 같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판권을 따내고 1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본사 업무를 담당하는 제너럴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백화점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라는 얘기였다”고 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총판권도 함께 날아가게 생긴 것. 그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살던 아파트를 내놨다. 아내의 충격이 컸다. 하지만 분명 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고 기억했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대표가 빠듯하게 차린 백화점 매장은 15평 남짓한 작은 규모였지만 국내에서 명품 시장이 태동하는 시기라서 손님들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다.그러던 중 야속하게도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공격적으로 매장확장에 나서던 명품 브랜드 매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원·달러 환율이 두 배 이상 치솟으면서 달러로 물건을 100% 수입해 와야 하는 업체들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이 대표는 “다른 업체 사장들은 수입물량을 줄이거나 단가 협상을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로 하루가 멀다하고 나갔지만, 우리는 매출 일부를 비축해뒀고 면세점 사업을 통해 확보한 달러를 충분히 활용해 버텼다”고 했다.그래도 본사 도움이 절실한 것은 다른 브랜드와 마찬가지. 그는 고심 끝에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팩스 한 장에 요약해 이탈리아 본사로 보냈다. ‘생존’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빼곡히 적은 A4 용지 한 장이었다. “매입가를 깎아줄 것, 무리하게 매입 물량을 늘리지 않고 줄여줄 것 그리고 긴급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꾸준한 성장의 비결? 욕심부터 버려라궁즉통이라던가. 에트로 패밀리(에트로 창업주 가문)가 요구 사항을 수용하고 이 대표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 대표는 이 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엄연한 무역회사인 듀오가 에트로 말고도 다양한 명품을 수입해도 문제가 없지만, 굳이 에트로 한국 대표를 자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외환위기 여파가 잦아들던 2000년대 초부터 다시 에트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소비 수준이 좋아지면서 백화점 매장 매출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면세점 판매가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 차지하던 때에서 백화점 매장의 국내 매출 증가가 두드러졌다.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면세점 한 곳으로 출발했던 에트로는 현재 전국에 4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면세점은 14곳, 백화점은 무려 29개에 달한다. 전 세계 매장이 200여 개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한국 시장이 꽤 큰 셈이다. 지난해 매출도 면세점에서 500억원대, 백화점은 600억원대로 총 1100억원대를 훌쩍 넘어섰다. 지난 2013년부터 남성복 시장에도 진출해 국내 젊은 층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내친김에 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손사래를 쳤다. “1년에 5~10%씩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제대로 된 회사는 꾸준히 성장하는 곳이다. 회사 경영에도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을 생각”이라고 이 대표는 강조했다.이 대표가 에트로 수입을 맡은 지 23년. 몸을 낮춘 그의 경영 전략이 통한 셈이다. 이 대표에게 수차례 위기를 이겨내고, 꾸준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절약’을 꼽았다. 왠지 사치스러울 것 같다는 편견을 갖기 쉬운 명품 브랜드 수입업체 대표이지만, 낭비라고 여겨지는 일에는 한 푼도 아까워하는 ‘자린고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회사를 설립하고 위기 때마다 회사를 살리는 데 절박하게 매달렸던 경험도 털어놨다. “지방 출장을 가면 역 주변의 저렴한 호텔에 묵었다. 코펠까지 들고 다니며 라면으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40대 때까지는 비행기는 이코노미석만 이용했다.” 위기 때마다 힘이 된 비축자금도 “안 써야 돈을 번다”는 이 대표의 지론 덕분에 모아졌다.“우리나라 소비자들도 앞으로 집 앞 마트에서 명품을 구매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명품 시장 전망을 묻는 말에 그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우리나라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명품 시장도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이충희 듀오 대표는 “소득수준이 1만 달러대였을 때 백화점 1층은 의류판매장이 대다수였다. 2만 달러가 되자 잡화점이 생겨났고, 3만 달러에 가까워지자 쥬얼리·시계 매장이 자리를 잡았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만큼 명품 시장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래서 요즘 새 경영 전략 짜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이충희 듀오 대표 profile : 1979년 호텔신라 입사 / 1991년 유로통상 입사/ 1993년∼현재 듀오 대표/ 2002년∼현재 백운장학재단 이사장/ 2010년∼현재 백운갤러리 대표.- 글 김영문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박스기사] 장학재단과 재능기부로 ‘나눔’ 실천이충희 듀오 대표에게 건네받은 명함 뒷면에는 백운장학재단 이사장·백운갤러리 대표·로리앙 대표·ROTC 수석부회장이라는 4개 직함이 적혀 있었다. 2002년 아버지의 호를 따 백운 장학재단을 설립해 매년 100여 명의 고등학생,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해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사업가들에게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을 내놓는 재능기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수년전 아들이 군대 갔을 때 특강을 한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요청이 들어오면 새벽에라도 달려간다. 강사료는 전액 부대에 기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군부대와 대학 강단에 선 것만 스무 차례나 된다. 이 대표는 “사업을 일궈온 과정, 힘든 시기를 이겨낸 경험 등이 제법 인기 있다”며 웃었다. 지난 2010년 청담동 본사엔 갤러리를 열고, 신진 미술가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다음은 이 대표의 말이다.“‘나눔’은 모두가 더 잘 사는 사회가 돼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 기업도 그래야 산다. 나 또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초심을 다지는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