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업계 억대 연봉 포기하고 창업 나선 김세훈 셰프
▎수라선의 대표이자 주방장인 김세훈 셰프는 IT업계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창업의 길에 들어선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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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를 돌 때마다 좀 귀하다 싶은 것을 먹을 때면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이것이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던 진상품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진상품이니 수라상이니 하는 단어만 가지고는 ‘나도 웬만치 먹을 줄 안다’는 미식가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임금 밥상쯤과 겨루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누구보다도 싱싱하고 차별화된 음식을 제대로 즐기느냐가 관건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나의 경험상으론 ‘수라’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찾아갔다가 실망한 기억이 여러 번 있었기에 수라상 하면 오히려 식상한 맛집 용어로 기억되곤 했었다. 수라선 또한 이런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채 예고 없이 방문하게 되었다.수라선이 있는 곳은 서울 잠실 리센츠아파트 상가의 지하다. 미식가의 맛집이 있어야 되는 요건으로 볼 땐 맛보기 전부터 평가 절하되는 분위기다. 예스러운 골목길에 한옥 기와집이 으레 익숙한 수라상이 아니던가. ‘수라’라는 단어를 쓴 여느 맛집들은 흔히 이런저런 밑반찬이 많이 나오는 한식집이 많기에 이 집도 그러려니 생각하며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의외로 밝은 민트 색상과 정면으로 보이는 오픈 주방이 무척 젊은 감각이다. 메뉴에 딸려 나오는 밑반찬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전복장비빔밥’, ‘민어돌솥밥’이 단골들이 많이 찾는 음식이란다. 흔한 메뉴가 아니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주방장이 누굴까?
딸아이의 밥투정이 뚝
▎(왼쪽)수라선의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 (오른쪽) 수라선의 대표 요리인 전복장비빔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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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검은색 조리복을 입은 김세훈 셰프가 수줍게 나타났다. 그가 수라선의 대표다. 생선을 응용한 이 집의 메뉴들이 그의 작품이라기에 늘 그렇듯 몇 년차 조리 업력인지 물어보게 되었다. 의외로 이력이 독특했다. 40대 초반인 김 대표는 소위 잘 나가던 외국 IT업계 임원 출신이었다. 한마디로 억대 연봉을 받았던 엘리트였다.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누구보다도 먹는 걸 무지 좋아했기에 맛있는 것이 있다면 한달음에 어디든 달려가는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IT 노하우와 마케팅을 접목해 곰탕 최고 맛집, 우동 최강 일식집 등 미식 맛집을 모아 한때 배달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배달의 민족’이나 ‘요기요’의 모델격이다. 2013년 일을 잠시 쉬던 공백 기간에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그가 좋아하는 생선요리를 찾아 국내 해안가 곳곳을 돌기 시작했다.꽃게가 좋은 계절이면 산지에서 직접 맛을 보고 꽃게를 왕창 사서 집으로 보내는 등 바닷가의 해산물을 먹고, 즐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직접 재료를 사서 만드는 것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연습하던 어느 날, 간장소스로 비빔밥을 만들어 딸아이에게 주었더니, 밥을 더 달라고 했단다. 밥투정하던 딸아이가 김 대표의 정성에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소문이 나서 아파트 옆집에 나누어 주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이게 업이 될 줄이야! 그의 간장소스는 점점 인정받아 아파트 단지 내에서 ‘OO아빠의 간장게장 맞춤’이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간장게장 좀 살 수 없겠느냐?”는 주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차피 그에게 IT와 미식, 요리는 한 맥락이 아니었던가!“어떤 요리 만들기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그는 서슴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를 할 때가 참 좋아요”라고 말했다. 과정 자체가 좋단다. 닭을 삶아 육수를 식히고 닭살과 채소 고명이 따로따로 얹어지는 요리로 족히 반나절 이상 걸리는 초계탕이 그가 유독 사랑하는 음식이라니. 초계탕 먹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걸 좋아해서 초계탕이 그의 집에서는 귀한 손님 접대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김 대표가 IT전문가에서 한식당 창업자로 변신했을 때 친한 지인들의 반응은 “드디어 할 것을 하는구나!”였다고 한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맛있는 한 끼를 위해 시간과 열정, 돈을 투자하던 미식가가 요리사로 변신한 순간이었다.개업 후 입이 짧은 딸아이에게 인정받은 전복장비빔밥을 바로 식당의 메인 메뉴로 정하게 되었다. 간장에 담근 전복장을 잘게 썰어 달걀 반숙과 함께 정갈한 비빔밥으로 내고 가격 또한 1만원을 넘지 않는다. 민어돌솥밥은 흰살 민어가 밥 위에 얹어진 형태로, 보기만 해도 은은한 품격이 느껴지는 한 끼 식사다. 그 외에도 편하게 먹는 간장게장비빔밥, 양념게장비빔밥도 있다. 모두 합리적인 가격과 건강밥상을 원하는 현대인의 니즈를 사업가의 감성으로 콕 집어낸 듯하다. 특별한 한 끼를 위해 준비한 3만원대 전복삼합 요리도 일품이었다. 전복, 민어, 꽃게 등은 나름 원숙한 손맛이 가해져야 제대로 된 요리가 되는 해산물들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음식 잘하는 그의 어머니 솜씨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어디서 이런 좋은 해산물을 구해오는지 궁금해졌다. 전복은 완도에서, 민어는 목포와 제주에서 올라온다고 했다. 주재료인 꽃게는 연평도와 강화도 인근에서 어업을 하는 선주와 계약을 해서 가져온다고 한다. 식당 문을 열면서 무려 5t 물량을 선계약했단다. 역시 단순한 식당 업주가 아닌 사업가의 배포다. 안정적인 재료 조달과 급속냉동 해산물 보관창고까지 준비한 그의 계획을 듣자하니 수라선이 앞으로 펼쳐나갈 외식분야의 길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임금님의 밥상 & 베풀 선먹을 것을 정말 좋아해서 은퇴 후 ‘식당이나 해볼까?’ 하는 꿈을 꾸는 중년들에게! 아니 이건 내 자신의 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꿈이 얼마나 구체적이지 못했는지를 그와 인터뷰하는 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다른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먹기만 좋아하던 사람도 이렇게 ‘주방 안의 창작자가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그가 정성으로 내온 요리를 맛보며 “요리가 당신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일초도 기다리지 않고 즉답을 했다. “요리는 나에게 행복입니다”라고.수라선을 찾는 이에게 입맛을 충족시키는 행복과 함께 품격 있는 인테리어와 테이크아웃 포장지는 또 하나의 덤이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김 대표 아내의 솜씨란다. 샐러리맨을 포기하고 음식으로 행복 창업에 나선 젊은 부부의 미소가 좋다. 임금님의 밥상 ‘수라’에 딸의 이름에서 따온 베풀 ‘선’이 더해진 수라선(02-420-7775)은 만드는 이의 행복이 바로바로 고객에게 전달되는 곳이다. 그 마음이 변함없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