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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를 낳고 기네스 맥주를 만든 땅 

더블린(아일랜드)=함승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수려한 자연 경관, 높은 빌딩의 화려한 야경,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명소, 짜릿한 액티비티를 기대하는가? 그걸 원한다면 아일랜드는 답이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문호와 음악가를 낳은 아일랜드 특유의 분위기는 당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대 트리니티 대학의 교정. / 아일랜드 관광청 제공
아일랜드는 작은 나라다. 수도 더블린은 서울의 5분의 1도 안 된다. 눈도장 찍어야 할 관광 명소도 적다. 고난에 찬 역사도 그렇고 내수시장이 작아 수출에 의존하는 건 한국과 닮은 꼴인데, 서울과 더블린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숲도, 거대한 쇼핑몰도 찾기 어렵다.

툭하면 쏟아지는 비. 변덕스레 부는 바람. 위도가 높아서 낮은 길지만 날씨는 대체로 싸늘하다. “런던에도 며칠 머물다 왔는데 여기 날씨가 더 우중충한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현지에서 만난 한 교민은 “가뜩이나 추운 편인데 올해는 여름도 지나간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살짝 덧붙인 말이 ‘진짜’ 아일랜드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어쩌면 그런 울적한 분위기가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조너선 스위프트, 새뮤얼 베케트 같은 문호와 U2, 벤 모리슨, 크랜베리스, 엔야 같은 음악가를 낳고, 펍에서 마시는 기네스 맥주 한 잔을 더 운치 있게 만들어주는 비결 아닐까요?”


▎(왼쪽부터)아일랜드의 펍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템플바. / 트리니티 대학 구 도서관의 ‘롱 룸’ / 아일랜드 관광청 제공
오스카 와일드와 새무엘 베케트


▎그래프턴 거리 초입에 있는 ‘몰리 마론’상. / 아일랜드 관광청 제공
더블린에는 멀쩡한 사람도 사색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가을 정취를 느끼기 위해 더블린의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시작 지점은 ‘더블린 스파이어(Spireof)’.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넬슨 기념비가 있었는데, 영국의 식민지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121미터 높이의 첨탑을 세웠다. 2003년, 아일랜드의 국민소득이 영국을 앞지른 해다. 잠깐 동안의 호황 뒤 경제 침체로 재역전돼 그 의미가 다소 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픔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한국의 국민소득이 일본을 앞지르면 이런 기분일까?

오코넬 스트리트를 따라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리피강을 건너면 트리니티 대학이 나온다. 최근 이공계를 중심으로 더블린 대학(UCD)과 더블린시립대학(DCU)이 떠오르고 있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노벨수상자들을 배출하는 등 인문학 전통이 강한 트리니티를 여전히 최고 명문대로 꼽는다. 1592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을 모델로 설립했다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캠퍼스 전경은 우아하고 고전적이다. 바닥에 울퉁불퉁하게 깔려 있는 자갈길을 걷노라면 마치 중세에 들어온 느낌이다.

최고 명문 트리니티대학


▎리피강 부둣가의 <기근>상. / 아일랜드 관광청 제공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 트리니티 대학 구 도서관의 ‘롱 룸(The Long Room)’이다. 1732년에 공사를 시작해 20년이 걸려 지어진 도서관이다. 1850년에 책을 더 보관하기 위해 천장을 더 올려 지었다. 그 덕에 롱 룸은 유럽에서 가장 큰 단칸 도서관이 됐다. 학생들이 애용하는 이곳에는 각종 고서를 비롯해 20만여 권의 책이 꽂혀 있다. 높은 천장에 갈빛 장서가 양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은 유럽의 고딕성당 같은 느낌도 준다. 이곳은 영화 <스타워즈>와 <해리포터> 시리즈의 모티브로 활용되기도 했다.

롱 룸을 보고 나와 바깥의 스산한 공기를 다시 마시니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잘 모르는 영문 소설이라도 한 편 읽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래프턴 거리를 따라 성스테판그린 공원으로 향했다. 개선문처럼 생긴 정문을 지나면 넓은 호수와 잔디가 펼쳐져 있어 산책하기 좋다.

더블린 시민들은 해가 뜨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고,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

공원을 나와 그래프턴 거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거리의 시작 지점까지 오니 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수레를 끄는 여성의 동상이 보였다. ‘몰리 마론’ 상이다. “아리따운 몰리가 더블린에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생선을 팔았지만,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노랫말의 주인공이다. 몰리 마론이 실존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웠던 시절 아일랜드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가 전 세계로 흩어진 아일랜드인을 통해 유명해지면서 그들의 애국과 향수에 대한 상징이 됐다.

전날 우연히 리피강 부둣가에서 본 비슷한 느낌의 조형물이 떠올랐다. 더블린 스파이어에서 오코넬 브릿지를 건너 더블린 항구 방향으로 약 650미터 거리에 있는, 관광객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기근>이라는 이름의 청동상이다.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이들이 가슴팍에 보따리를 부둥켜안은 채 어딘가로 떠나는 형상이다.

이 조형물은 1845년부터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아일랜드 대기근을 표현하고 있다. 800만 명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이 끝난 1851년 4분의 1이 줄었다. 약 100만 명이 사망했고, 약 100만 명이 굶주림을 피해 모국 아일랜드를 등지고 떠났다. 현재 이 동상이 있는 곳이 이주민들이 미국 등지로 향하는 배를 타던 곳이다. 소소한 동상에 비춰지는 역사가 아일랜드인들의 묘한 감수성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음악영화 <원스>의 촬영지


아일랜드에 애환과 울적함만 있는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여느 유럽인들보다 많은 흥을 갖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몰리 마론 상이 있는 그래프턴 거리에서부터 그 흥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저녁 무렵이면 하나 둘씩 등장하는 악사나 행위예술가, 화가들이 거리 공연을 펼친다. 영화 <원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프턴 거리의 흥은 리피 강쪽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템플바로 이어진다. 음악을 즐기고 축구경기를 응원하는 펍과 카페들이 몰려있는 거리다. 유명한 더블린의 펍(pub)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인구 100만의 도시 더블린에 펍이 무려 1000여 개나 있다. 대문호 조이스가 ‘펍을 피해서 더블린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 고 했을 정도다. 어떤 곳에 들어가도 흥겨운 라이브 음악과 함께 기네스 맥주의 쌉쌀하면서 짙은 맛과 부드러운 거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국내에서 마시는 기네스 맥주와는 맛과 향이 사뭇 다르다.

- 더블린(아일랜드)=함승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201510호 (20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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