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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그때 그 브랜드 

 

송은지 포브스코리아 인턴기자
복고 바람을 타고 1980년대의 향수가 만연하다. 덩달아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았던 그때 그 브랜드들도 다시 인기몰이 중이다. 우리 주위의 장수 브랜드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보았다.
[신발] 리복-펌프시리즈 | 리복 스니커즈, 복고 열풍에 응답하다


“아들 또 마이 따라하겠다. 고마 억수로 뿌라지겠네.” 스포츠브랜드 리복의 CF를 보던 주인공 덕선의 엄마가 읊조린 한 마디. 덕선 엄마의 예상은 적중했다. 신인배우 이종원이 등장해 하늘을 날아 가뿐히 착지하는 발레 동작이 일품이었던 이 광고는 당시 수많은 청소년들이 한 번쯤은 따라했을 정도로 유행이었다. 당시 CF로 인지도를 올린 리복의 상승세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1980년대 한국 스포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 1988년 서울 올림픽 열기가 이어지면서 나이키, 아디다스와 같은 스포츠브랜드들이 대거 한국에 유입됐다. 리복도 그런 열풍의 수혜를 입었다. 하지만 리복의 반짝 선전도 잠시, 1980년대 벌어졌던 스포츠브랜드들의 시장 점유율 경쟁은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양강 구도로 굳어져 갔다.

GL6000과 더 펌프 오리지널 출시

외국 브랜드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듯 보였던 리복이 21세기 들어 명예 회복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 콘셉트는 바로 ‘오리지널의 고수’였다. 1985년 출시와 동시에 인기를 끌었던 ‘GL6000’ 오리지널 버전을 2012년 선보였던 것이다. 리복은 제품과 함께 1980년대 ‘의자 CF’를 떠오르게 하는 ‘보드 CF’를 선보이며 제품은 물론 CF까지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오리지널을 고수한 결과, GL6000 모델은 복고 열풍을 타고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해 출시 이듬해인 2013년 전년 동기 대비 200%까지 매출이 성장했다.

최근에 리복은 다시 1988년의 부름에 응답했다. 1989년 최초로 출시된 ‘펌프 시리즈’가 오리지널의 디자인을 그대로 복원해 2014년에 ‘더 펌프 오리지널’로 선보여졌다. 리복 관계자는 “더 펌프 오리지널은 25년간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 왔던 펌프시리즈 모델”이라며 “앞으로도 오리지널 제품을 계속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음료] 일화-맥콜 | ‘우리는 맥콜세대’의 영광을 다시 노린다


“그대여, 내 손을 잡아주오”라는 달콤한 노랫말을 속삭이는 조용필이 손에 쥔 ‘맥콜’을 아리따운 여성에게 전달하는 장면.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 조용필이 등장한 이 광고는 ‘우리는 맥콜세대’라는 광고 카피를 유행시키며 맥콜의 인기를 견인했다. 맥콜이 등장한 것은 1982년이다. 보리를 주원료로 사용해 ‘건강’이란 콘셉트로 출시된 맥콜은 출시 3년 만인 1985년 8월 한 달간 700만 병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일화 관계자는 “맥콜은 당시 국내 탄산업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콜라와 사이다의 굳건한 구도를 무너뜨리며 명성을 더했다. 15.7%라는 음료 시장 점유율이 말해주듯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혜리)이가 우간다 피켓을 들고 입장했던 서울올림픽의 올림픽전야제 ‘프레올림픽쇼’에 맥콜이 단독 협찬하면서 일화는 전성기를 맘껏 구가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화가 맥콜을 출시하며 강조했던 ‘건강’이란 콘셉트는 당시 소비자에게 완전히 스며들지는 못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에 대해 “당시는 현재처럼 건강을 열심히 챙기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제품의 인기로 환원되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건강이란 콘셉트가 맥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을 수 없었던 때, 우후죽순으로 맥콜과 비슷한 보리텐, 비비콜 등의 미투(Me too)제품이 출시되자 맥콜은 매출 부진에 시달리게 된다.

1988년, 맥콜이란 단일 제품만으로 1400억원의 매출(소비자가 기준)을 달성한 일화는 10년 뒤, IMF 사태로 풍파를 맞았다. 일화 관계자는 “기존 메이저 음료제조사들의 미투제품 출시에 대응하기 위해 제품 공급과 영업망을 확충하느라 차입금 규모는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맞게 돼 매출규모가 감소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결국 일화는 부도라는 아픔을 겪은 이후, 이듬해 법정관리에 들어서게 된다. 일화의 이성균 대표이사는 당시 “한계사업부문 정리와 재무구조개선 등 자구노력을 추진해 회사를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시키겠다”고 밝혔고, 1999년의 그 다짐을 오늘날 현실화시켰다.

‘소비자 건강’ 고수해 장수브랜드 우뚝

전성기, 부도, 법정관리, 그리고 기업정상화까지 16년간 크나큰 부침을 겪으면서도 일화는 ‘소비자의 건강’이라는 경영 철학을 고수했다. 맥콜은 건강에 좋은 유기농 보리가 주원료다. 일화의 또 다른 주력상품인 초정탄산수 역시 세계 3대 광천수인 초정리광천수를 원수로 사용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웰빙’에 대한 소비자의 선호도가 상승하자 일화의 상품들은 다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시작했다. 법정관리가 종결된 2005년 828억, 5년이 흐른 2010년엔 1078억, 2015년에는 2300억의 매출을 올렸다. 모진 풍파를 견디고 부활한 일화는 초지일관 소비자의 건강을 중시하는 정신을 지킨 덕분에 빠른 속도로 매출을 회복하며 맥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성균 일화 대표이사는 “원가 상승이란 측면에서 ‘웰빙’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를 경영합리화와 혁신 활동을 통해 상쇄해가면서 몸에 도움이 되는 웰빙 제품 생산에 계속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1988년에서 27년을 뛰어넘은 현재, 흥망(興亡)의 정점을 모두 겪은 일화는 이제 수성(成)을 꾀하고 있다.


[음료] 동아오츠카-오란씨 | 1988년도에 2010년대를 입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이른바 86세대(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노랫말은 동아오츠카에서 1971년 발매한 탄산음료 오란씨의 CM송 가사다. 이 노래를 작곡한 가수 윤형주는 “오란씨 CM송은 어린 아이부터 성인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누렸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윤형주의 말처럼 1980년대 동아오츠카의 오란씨는 연간 3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소위 ‘잘 나가는’ 제품 대열에 합류했다.

1993년 이후 잠시 역주행하던 오란씨의 매출 그래프는 2010년대 들어 다시 상승세다. 2009년 디자인 리뉴얼로 승부수를 던진 뒤 이듬해 20년 만에 TV광고라는 마케팅을 부활시킨 것이 주효했다. 아날로그의 감성에 2000년대 세대의 트렌드를 가미시킨다는 전략이 통했던 것. 동아오츠카의 관계자는 “20년 만에 선보인 광고에서 복고 패션을 현대적 패션으로 체인지하는 장면 등을 통해 1980년대와 2010년대를 결합하고자 했는데, 이게 소비자에게 먹혀들었다”고 말했다. 2011년 이후, 오란씨 매출은 1980년대 수준과 비슷한 연간 300억원대로 회복됐다. 동아오츠카 관계자는 “2016년엔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소비자의 선택을 다시금 받는 오란씨의 모습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전했다.

[제조] 덕인기업-못난이삼형제 인형 | 인형에 담긴 추억을 팝니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덕선이의 방 책꽂이에 가지런히 놓인 ‘못난이삼형제 인형’이 클로즈업돼 나타난다. 제조사인 덕인기업의 인흥수 사장의 사무실 책꽂이에도 삼형제 인형이 나란히 서있다. “1970년대부터 흑백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주로 TV 장식용으로 많이 팔렸다.” 인흥수 사장의 말이다.

한 드라마에서 소품으로 노출된 이후, 못난이삼형제 인형의 매출이 급속도로 상승했다. 인흥수 사장은 “제일 잘 나갈 때에는 한 달에 100만개씩 나갈 정도로 인기였다”고 말한다. 직원 50명을 고용하며 공장을 운영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9년, 덕인기업의 성장에 제동을 건 사건이 발생한다. 인형을 제조하는데 사용됐던 폴리염화비닐에 인간의 몸에 유해한 ‘프탈레이트계 가소제’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후 인흥수 사장은 ‘인터넷 시장’을 돌파구로 삼았다. 한때 사업이 어려워져서 장애를 얻은 상황에서도 완구 산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2014년 온라인창업스쿨 ‘나의 왼발 8기 교육’에 참여했다. “나의 왼발 교육에서 우수 교육생으로 뽑혔다. 이후 옥션의 후원을 받아 인터넷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 인흥수 사장은 완구 산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 송은지 포브스코리아 인턴기자

201601호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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