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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와인 이야기(1) 

그대, 아직도 와인을 마시는가! 

이석우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
약간의 경험을 통해 와인에 대한 나만의 이해의 틀을 머리 속에 담고, 그 와인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천천히 습득하게 된다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와인을 시음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그 와인을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은 지난 2월 열린 제1회 소믈리에 베스트 초이스에서 시음하는 이승훈 소믈리에.
와인을 한잔 따라주고 품평을 해달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당황한다. 와인을 자주 접할 기회가 없거니와, 비싼 가격 때문에 선뜻 사서 마시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와인을 마주한 대다수의 한국인은 와인에 대한 의견을 자신 있게 표현하기 어렵다.

반면, 김치는 다르다. 너무 익었다거나 아직 설익었다는 평가부터,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서 너무 맵다거나, 특정 젓갈이 들어가서 짜다는 식으로 한참을 설명할 수 있다. 김치라는 음식을 어려서부터 매일같이 먹고 자라온 탓에 자신만의 평가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김치를 맛본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김치의 맛과 향, 그리고 스타일에 대한 분류가 머릿속에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김치를 본인이 좋아하는지 체험적으로 학습한 결과다.

와인과 김치는 서로 다른 음식이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둘은 많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발효식품이라는 점이다. 발효되는 식품은 모두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한번 만들어 놓으면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속에 존재하는 미생물이 유기물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다른 유기물과 가스를 생성하면서 다양한 맛과 향을 갖게 된다. 와인과 김치는 숙성되는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축을 놓고 본다면 변화하는 매력을 가진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특징을 가진 발효식품이지만, 우리는 와인을 마실 때마다 생소한 경험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경험은 소위 와인전문가들의 문장을 접하게 되면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카시스, 타임, 사향과 같이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이나 향신료를 동원한 와인서적을 접하게 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라. 약간의 경험을 통해 와인에 대한 나만의 이해의 틀을 머리 속에 담고, 그 와인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천천히 습득하게 된다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크게 두 가지 정도만 염두해 두자.

음용(drinking)하기보다는 시음(tasting)하라

첫째, 당신이 와인을 접하게 되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면 음용(drinking)하기 보다는 시음(tasting)을 해보자. 음용과 시음은 얼핏보면 음료를 마신다는 관점에서 같은 행위이지만, 그 목적상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경험이다. 음용의 목적은 목마름을 해소하는 해갈이거나, 알코올을 섭취해서 취중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 시음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 앞에 놓인 음료의 맛과 향, 그리고 품질을 평가하는 행위이다. 와인을 시음하면 그 와인에서 어떤 맛과 향이 느껴지는지, 이전에 마신 와인과 무엇이 다른지 관찰하고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마시는 행위이다. 와인을 시음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그 와인을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자신이 경험했던 와인들의 맛과 향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기억에 남는 다양한 맛과 향들이 총동원된다. 어릴 적 집 마당에서 맡았던 치자꽃 향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엊그제 저녁상에 올라온 고소한 참기름 양념냄새가 생각날 수 있다. 맛과 향 뿐만 아니라, 입안에서 전해지는 다른 느낌들도 표현의 대상이다. 어떤 와인은 시골 장터에서 맛본 막걸리처럼 걸죽하고 묵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아니면 어머니가 담가주신 식혜처럼 가벼우면서도 경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이 와인을 시음하는데 도움이 된다.

후각과 미각을 통해 다양한 경험 축적해야

와인을 시음하는데 한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과장이다. 수년 전 일본의 한 작가가 와인을 주제로 만화를 연재했다. 그 만화 덕분에 국내에서 갑자기 와인 붐이 일기도 했다. 흡사 와인 무협지와도 같은 그 만화 때문인지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 종종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와인을 마시니까 깊은 숲 속 샘물 옆에 자란 딸기밭 속을 금발머리의 미소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라던지, “롤링 스톤즈의 리드보컬인 믹 재거의 힘찬 남성적 중저음이 느껴진다”는 식이다. 와인을 마시는 순간, 그 사람의 머릿속에 정말로 금발의 미소녀가 보였거나 믹 재거의 목소리가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와인 표현방법은 시음을 통해 그 와인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와인을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평소 후각과 미각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맛과 향을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담아뒀다가, 와인을 접했을 때 써먹는 방식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서 평소 다양한 향과 맛들을 기억해 놓으면, 와인을 시음할 때 이를 환기시킬 수 있다. 예전에 샤블리의 화이트 와인을 마실 때, 자리를 함께했던 지인이 “성게알의 향이 난다”고 했었고,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공감을 했던 경험이 있다. 평소 느꼈던 향을 기억해 뒀다가 적절히 표현했던 경우다.

위에 제시한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와인에 대한 학습을 하더라도, 와인에 관한 알 수 없는 표현들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와인이라는 음료는 역사상 유럽이라는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와인의 특징을 설명하는 용어들 역시 유럽인들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카시스를 예로 들어보자.

카시스는 우리 말로 직역하면 ‘까막까치밥 나무 열매’이다. 카시스향은 주로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레드 와인들이나 남부 프랑스에서 생산된 레드 와인들을 설명할 때 언급된다. 국내에서 ‘까막까치밥 나무 열매’를 맛본 사람은 매우 희소할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 와인에서 카시스의 향미가 느껴진다고 한다면, 국내의 독자들은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김치에서 “새우젓의 풍미가 강하다”고 표현하면, 새우젓을 맛본 적 없는 유럽인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치와 똑같다. 경험해 보지 못한 과일이나 향신료가 궁금하면, 수입식료품을 찾아가서 그 재료로 만든 잼이나 말린 향신료를 구해다가 경험해보는 방법이 있다.

와인을 표현하는데 정답은 없다. 와인의 특징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표현해보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조금만 지나면 잊혀져버릴 와인의 특징을 기록함으로써, 추후 다른 와인을 경험했을 때 비교를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만 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사고틀이 생길 수 있고, 비로소 내가 선호하는 와인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와인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와인을 좋아할지는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605호 (201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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