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와인이 세대교체와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다양한 와인을
선보여 세계 와인시장에 돌풍이 예상된다.
▎그리스 와인을 마시는 건 그 신화를 바탕으로 세계 문명사가 시작된 곳에 경배를 표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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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의 아들로 지상에서 가장 힘센 영웅이다. 그가 신탁을 받아 행한 12과업 중 첫 번째가 네메아의 사자를 퇴치하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때려눕힐 때 흘린 피에서 포도품종 ‘아기오르티코’가 탄생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아기오르티코의 별명이 ‘헤라클레스의 피’ 입니다.”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115㎞ 남짓 떨어진 네메아강 상류 계곡의 ‘세멜리 와이너리’. 봄 햇살에 앞서 거센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시야 멀리 푸른 산과 하늘 사이로 길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네메아가 속한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코린토스만(灣)이다. 이 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세멜리 와이너리가 뜨거운 지중해 햇살 아래서도 포도 재배를 할 수 있게 습하고 서늘한 환경을 마련해준다. 와이너리의 설명대로라면 아기오르티코는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부터 내려온 그리스 토착품종이다. 네메아 일대 포도밭 중엔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도 수두룩하다.장구한 역사로 이어져온 그리스 와인이지만, 근대 이후엔 세계인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가내영세업 수준이며, 전체 생산량이 270만 헥토리터(2015년 기준, 1헥토리터=100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산량 기준 세계 17위다. 이 중 97%가 국내에서 소비되고 3%만 해외 수출된다. 당연히 세계 시장에서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하지만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다. 2008년 400여개였던 그리스 와이너리는 지난해 말 718개로 배 가까이 증가했다. 해외 수출도 늘고 있다. 주력인 화이트 품종 사바티아노·로디티스 뿐 아니라 북부 그리스의 대표적인 레드 품종 시노마브로는 이탈리아 ‘왕들의 와인’으로 불리는 바롤로에 견주어서도 손색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유수의 와인 평론지들도 “그리스 와인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며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스 와인 산업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리스의 KOTRA라 할 ‘엔터프라이즈 그리스’의 초청을 받아 지난달 말 산토리니섬, 펠레폰네소스반도, 아테네 등지의 와이너리를 둘러보았다.
석회암 토양에서 똬리를 틀며 자라는 포도덩굴
▎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115㎞ 남짓 떨어진 네메아강 상류 계곡의 ‘세멜리 와이너리’에서 만난 그리스 와인 생산업자들의 표정이 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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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빛 지중해, 푸른 하늘, 언덕 위 하얀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파랗게 빛나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 돔…. 산토리니 하면 사람들이 먼저 떠올릴 이미지다. 하지만 와인메이커들에게 산토리니는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곳이다.첫째, 이곳은 19세기 말 유럽 포도나무를 궤멸시키다시피 한 필록세라(진딧물과의 해충)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당시 필록세라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 포도원들은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토착 품종 몸통에 접목시켰다. 반면 산토리니에선 수백 년 된 토착품종이 원판 그대로 보존돼 자라고 있다.둘째, 산토리니는 ‘빈산토’라는 와인 종류의 원조 산지다. 빈산토란 수확기 포도를 말려 만드는 달콤한 와인이다. 지금은 이탈리아식 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산토리니섬에서 발달했던 양조 기법이다. 1200년대 산토리니섬에 온 베네치아인들이 이 와인을 이탈리아로 다량 수출하면서 ‘산토리니의 와인(Vino Santo)’이라고 소개했고, 이 스타일이 결국 빈산토라고 불리게 됐다.산토리니섬의 언덕배기 이아 마을에 자리 잡은 ‘도메인 시갈라스’의 포도밭을 둘러보았다. 특이하게도 포도나무가 모두 발치에서 동글동글하게 자라고 있다. ‘쿨로라(kouloura)’라고 불리는 산토리니 고유의 재배 방식이다. 어린 나무의 줄기를 동그랗게 구부려줘서 포도 덩굴이 똬리를 틀며 자라게 한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과 거센 해풍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포도잎이 그늘을 만들어줘서 포도알이 햇볕에 직접 노출되는 걸 막죠. 바다 안개를 가둬둘 수 있어 수분 보충도 되고요. 덕분에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라도 대량으로 물을 줄 필요가 없어요.” 이곳 관계자의 말이다.동그랗게 자라는 포도나무는 뿌리를 땅 속 깊이 뻗어간다. 기원전 1600년경 화산 폭발을 일으켰던 산토리니에선 화산암과 석회암이 토양의 대부분을 이룬다. 화산재 성분은 산토리니 특유의 떼루아(Terroir)를 만들어낸다. 특히 아시르티코는 미네랄 성분이 아주 높아서 이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입에 대면 ‘쨍한’ 느낌을 받는다. 쨍하게 다가오는 높은 산도와 특유의 과일향이 어우러져 상쾌하게 식욕을 돋워준다.5대째 와인업에 종사 중인 에반겔로스 가발라스도 여느 산토리니 와이너리처럼 화이트 와인에 주력한다. 특히 주력 품종 아시르티코 외에 카차노와 가이두리아라는 토착 품종으로 만들어진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둘 다 빈산토 제조용으로 주로 쓰이는 품종인데, 에반겔로스의 아버지가 8년 전 시범적으로 드라이 화이트 와인으로 생산·개발하기 시작했다. 첫 2년간은 반응이 없다가 요즘은 찾는 사람에 비해 생산량(연 4500병)이 부족할 정도라고 한다. 에반겔로스는 아테네에 있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가 대학에서 배우고 엿본 경영전략과 와인재배 신기술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 대에서만 해도 포도를 밟아 으깨서 압착했어요. 이 과정이 현대 장비들로 새로워진 게 저의 대에 와서 와서죠. 프랑스·독일 등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 동료들도 많아요. 다들 그리스 와인이 더 이상 저렴한 구식으로 여겨지지 않게 현대화·고품질화에 승부를 걸고 있어요.” 가발라스 와이너리는 이 같은 변화 사례 중 하나다.
그리스는 포도품종의 ‘쥐라기공원’ 같은 곳
▎그리스 고유의 암포라 항아리로 레치나와인(솔향이 그윽한 그리스 와인)을 생산하는 테트라미토스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파파야노풀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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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그리스 와인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이다. 이번 와인 출장 기간 동안 기자가 맛본 와인은 줄잡아 100여 종에 이른다. 이 중에서 연 4만 병 이상 생산하는 건 하나도 없다. 1만 병도 꽤 많이 하는 편에 속한다. 게다가 대부분 그리스 안에서 소비된다. “이러한 희소성이 이젠 강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엄선된 고품질 와인만 해외시장으로 나가는데, 그로 인해 그리스 와인의 이미지 자체가 높아지고 있는 거죠. 같은 이름과 품종으로 명품와인부터 테이블와인까지 생산하는 대량생산국가들과는 다르죠.”세계적인 와인전문자격증 ‘마스터 오브 와인’을 그리스 출신으로선 처음으로 취득한 콘스탄티노스 라자라키스의 말이다. 라자라키스에 따르면 그리스 와인을 주목해야 할 또다른 이유는 신상 품종이 계속 ‘발견’되고 있단 점이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포도밭 중에 아직 품종으로 확인되지 않은 게 많다”면서 “그리스는 포도품종의 ‘쥐라기공원’ 같은 곳”이라고 강조했다. 원시성이 보존되고 있단 의미다.
오랫동안 그리스 와인은 그리스인 입맛에만 맞춰 생산돼 왔다. 300종 남짓한 토착 품종 가운데 50개가 전체 와인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세계 와인시장의 ‘주류’와 동떨어지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이젠 이것이 차별화된 정체성으로 재평가되고 있단 얘기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해외에서 그리스 와인에 ‘질 나쁜 와인’ 이미지를 심어준 대표적인 와인 레치나(Retsina·송진) 역시 근대적인 양조 방식과 함께 ‘솔 향이 나는 독특한 와인’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포도품종 ‘아기오르티코’으로 빚은 세멜리 와이너리의 레드와인. 아기오르티코의 별명은 ‘헤라클레스의 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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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프라이즈 그리스’에서 와인무역 파트를 담당하는 요르고스 파파파나요토에 따르면, 2009년 경제위기 이후 그리스에선 ‘벌크(bulk) 와인’ 판매가 확 늘었다. 벌크 와인이란 병에 넣어 판매되는 브랜드 와인이 아니라 식당에서 통으로 들여와 주전자에 담아 파는 식이다. 0.5ℓ에 4유로 정도로 부담 없는 가격이다. 대신 일반 와인에 비해 묽고 맛도 ‘맹탕’에 가깝다. 소비자들이 벌크 와인을 찾게 된 것은 주세로 인한 가격 상승 때문이다. 와인에 붙는 부가가치세는 8년 전 8%에 지나지 않았지만 경제 위기 이후 23%로 치솟았다. 올해 들어 새로이 ℓ당 20센트가 추가되기까지 했다.
와인은 그리스 미식 완성하는 마지막 붓터치
▎남부 산토리니에서는 어린 나무의 줄기를 동그랗게 구부려줘서 포도 덩굴이 똬리를 틀며 자라게 한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과 거센 해풍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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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와이너리들은 포도품종이나 빈티지(vintage·포도를 수확한 해 표시)를 따지지 않고 생산업자들로부터 헐값으로 대량 구매해 벌크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포도생산업자들로선 고품질 포도를 ‘밭떼기’로 넘겨야 할 처지가 됐다. 이렇게 되자 생산자들은 납품을 포기하고 직접 ‘와인 브랜드’ 설립에 나섰다. 경제위기 이후 그리스 와이너리 숫자가 되레 급증한 이유다. 이들 신생 창업자들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 와인 연합도 해외 홍보 및 마케팅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와인투어의 마지막 날 아테네의 고급식당 ‘디오니소스’에 앉았다. 런치 코스의 전채 요리로 토마토와 올리브, 페타치즈가 가득 든 그릭 샐러드가 나왔다. 그리스 음식은 자극적인 향신료 없이 신선한 제철 재료에 천연 허브를 첨가하는 식이다. 와인은 이런 그리스 미식(gastronomy)를 완성시켜주는 마지막 붓터치와 같다.세멜리 얼굴이 그려진 와인 병을 따르자 붉은 ‘헤라클레스의 피’가 묵직한 체리향을 풍기며 흘러나왔다. 세멜리는 그리스 신화 속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다. 헤라클레스나 디오니소스나 제우스가 아내 헤라 여신 몰래 바람 피워서 낳은 혼외자들이니, 둘은 배다른 형제라 하겠다.식당 창문 밖으로 아테네의 심장부라 할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 보였다. 아크로폴리스엔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 파르테논 외에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디오니소스’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오늘날 연극이 유래됐기 때문에 최초의 원형극장에 디오니소스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렇듯 그리스 와인을 만나는 건 단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다. 포도 품종부터 병 외관을 장식하는 레이블 디자인, 브랜드 이름 어디에나 수 천년 올림포스 신화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스 와인을 마시는 건 그 신화를 바탕으로 세계 문명사가 시작된 곳에 경배를 표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그리스 와인은 잠에 취해 있었다. 호된 각성 끝에 서서히 ‘디오니소스의 후예들’이 깨어나고 있다.- 그리스= 글·사진 강혜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