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7)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권력에 집착하는 부자들의 반면교사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년)는 로마 최대의 갑부였다. 포브스지는 2008년 ‘역사상 최고 부자 75인’이란 기사에서 크라수스의 재산을 현재 가치로 1698억 달러로 추정하며 역대 8위로 매기기도 했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크라수스는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 달성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다. 그가 부자였지만 존경받지 못한 이유다. / 중앙포토·채인택
1세기 로마인으로 당시 수많은 지식을 모아 『박물지』를 편찬한 백과사전적 학자이자 군인, 관리였던 카이우스 플리니우스(대(大)플리니우스, 기원 23~79년)는 크라수스의 재산이 2억 세스테리우스(고대 로마 화폐단위의 하나)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로마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다. 그의 재산에 대한 기록은 최소 액수가 1억7000만 세스테리우스다. 이런 기록으로 미뤄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심지어 세스테리우스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 따라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고대 인물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다. 1세스테리우스의 추정 가치 범위가 1~100달러로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환산 기준을 금, 은, 소매상품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정할 경우 가치 기준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크라수스 재산의 현재 가치도 2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까지 폭넓게 추정된다.

크라수스는 원래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87년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700만 세스테리우스라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오늘날 700만~7억 달러 또는 그 이상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전쟁 영웅이었으며 기원전 97년 집정관으로도 선출된 유력 인사였다. 푸블리우스는 로마가 민중파 정치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기원전 157년~기원전 86년)와 귀족파 정치인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가 기원전 87년 내전을 벌일 때 술라 편을 들었다가 마리우스 편에 의해 살해됐다. 크라수스는 부친의 재산을 제대로 물려받기도 전에 마리우스의 숙청을 피해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기원전 84년 술라의 심복이 된 크라수스는 기원전 82년 술라의 로마 진군 때 성문 근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술라의 세상이 된 로마에 돌아온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산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부를 늘렸다. 그가 재산을 불리는 방식은 비열했다. 마리우스파를 숙청하고 처형하는 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몰수자산의 상당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활용한 또 다른 치부 수단은 사설 소방대였다. 스스로 소방대를 조직해 공익 목적이 아니라 사익 목적으로 활용했다. 미리 진화 요금을 지불한 사람이 화재를 당했을 때만 불만 꺼준 것이다. 방재산업과 보험업을 독특하게 결합한 수익 모델이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더욱 악랄한 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화재 진압비를 미리 내지 않은 건물에 불이 나면 다 타도록 방치했다가 나중에 건물이 서있던 그 부동산을 시세 이하로 사들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재력으로 불난 터에 새로 집을 짓고 이를 원하는 가격에 세를 놓았다. 이런 방식으로 부동산을 늘리고 재산도 불렸다. 불난 집터를 팔지 않고 새로 짓겠다는 사람에게는 비싼 이자를 받고 자신의 자금을 빌려줬다.

이러한 고리대금업과 함께 은광도 소유했으며 농장도 대규모로 운영했다. 자신의 은광과 농장에서 일할 노예도 대규모로 소유했다. 노예를 사고파는 교역도 했다. 노예를 교육시켜 책 읽어주는 사람(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이 맡았던 여러 업무 중 하나), 집사, 그리고 요리사를 양성했다. 교육을 통해 업무 수행 능력이 높아진 수준 높은 노예를 수요에 따라 더욱 비싼 가격으로 팔아치웠다.

부잣집 아들 크라수스가 이토록 돈 모으기에 집착한 이유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경제사학자 피터 번스타인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은 금과 은의 시대였다. 이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년)는 갈리아 원정(기원전 58~기원전 52년)으로 지금의 프랑스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 뒤 10만 명에 이르는 노예를 이끌고 로마에 개선했다. 이탈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 등 로마 영토 곳곳에 있는 광산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끝없이 돈에 집착하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73년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의 진압을 맡아 전공을 세운다.
당시 부유한 로마인은 자신과 가족의 몸에 달고 다니거나 저택을 장식한 번쩍이는 금으로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보유한 금화의 양은 곧 재산의 규모를 의미했다. 로마는 독특하게도 공화정 시절은 물론 이어지는 제정 시절에도 재력이 곧 정치력을 의미했다. 금권정치는 로마의 특징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보다 자신이 보유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가 국정에 대한 발언권을 좌우했다. 재력은 정치적인 우군을 만드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재력으로 확보한 발언권은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뇌물이나 약탈 획득물을 얻을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 돈과 권력의 상호반응과 순환 구조다. 재력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다시 새로운 재력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금권정치의 특징이다.

이렇게 재산을 크게 불린 크라수스는 보다 많은 자금을 관리들에게 뇌물로 뿌릴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다양한 이유로 정부에 몰수된 부동산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헐값에 다량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더욱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크라수스는 거대한 현금 자산과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로마 최대의 갑부로 올라섰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크라수스의 정치적 발언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73년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의 진압을 맡았다. 돈만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자신에게 부족했던 전공을 세울 기회였다. 당시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되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기원전 118년경~기원전 56년)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기원전 106~기원전 48년)는 모두 로마를 비운 상태였다.

반란은 기원전 73년 귀족들의 휴양지인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시작됐다.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남부) 출신의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다수의 동료를 이끌고 탈출하면서 시작됐다. 로마는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디우스 글라베르에게 2개 군단을 맡겨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봄 로마 원로원은 그 해 집정관을 맡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의 두 사람에게 진압을 맡겼으나 다시 실패했다. 그러자 절망한 원로원은 야심만만한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집정관이 남긴 2개 군단과 새로운 6개 구단을 합친 8개 군단을 맡겨 집압에 나서게 했다.

크라수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군단을 가혹하게 몰아갔다. 첫 전투에서 패배하자 군단 전체에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10분의 1형(decimatio)’으로 불리는 무자비한 집단 형벌이었다. 군기가 해이됐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한 군단을 대상으로 병사 10명 중 1명꼴로 무작위로 처형 대상으로 고른 뒤 나머지 10분의 9의 병사들이 둘러싸고 돌멩이나 채찍, 곤봉 등으로 죽을 때까지 때리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이 형벌 대상이 돼 죽어간 로마 병사는 4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 진압 후 집정관으로


▎크라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 체제를 만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야망과 정치력, 크라수스의 재력,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전공(戰功)이 서로를 보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 중앙포토·채인택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크라수스의 병사들은 악에 받친 채 잔혹한 공격을 파상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로마군단 병사들에게 가혹했던 크라수스는 포로로 잡힌 노예들에게는 더욱 잔혹했다. 포로 6000여 명을 전원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노예들의 고통의 소리는 크라수스에게는 정치적 성공의 축포와도 같았다. 문제는 서쪽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군단을 해체해야 로마로 들어올 수 있는 법을 어기고 군대를 데리고 로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크라수스도 자신의 8개 군단을 그대로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원로원에 집정관직을 요구했다. 법을 무시했지만 두 사람은 힘으로 나란히 집정관에 올랐다.

원래 로마 공화정은 건전한 공직 체제가 뒷받침했다. 로마 공화정에서 초기 제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이 맡을 수 있는 공직은 재무관(Quaestor)-안찰관(Aedie)-법무관(Praetor)-집정관(Consul)-감찰관(Censor)의 순으로 위계가 있었다. 공직은 입후보와 시민 투표에서의 선출을 거쳐 각각 1년간 맡았다. 로마의 공직으로 유명한 호민관(Tribunus)은 임시직이며 독재관(Dictotar)은 비정상적인 자리로 로마의 정규 공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호민관은 평민만 입후보해 평민회에서 선출하며 평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독재관은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심각한 국론분열 등의 국가 비상사태 시에 6개월~1년을 임기로 전권을 맡기는 자리다. 독재관 중에는 임기가 무제한인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a)가 있는데,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이 자리에 취임했다가 왕이 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 속에 암살을 당했다.

공직은 힘과 함께 봉사의 상징이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한 공직을 연속으로 맡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난세가 계속되면서 현실적인 권력과 금력이 공직, 특히 최고 관직에 해당하는 집권관 직을 좌우했다. 당대의 실력자였던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부터 100년까지 5년 연속 집정관을 맡았다. 마리우스의 정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에 입성해 권력을 잡은 술라는 같은 공직을 반복해서 맡으려면 10년 터울을 두도록 했다.

크라수스는 금력으로 권력을 키워 이러한 제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집정관에 이어 기원전 65년 감찰관에 오른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산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빚에 허덕이는 원로원 의원이나 명망 인사들에게 돈을 대주면서 ‘스폰서’가 됐다. 기원전 62년에는 젊은 유력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자금을 대주면서 환심을 샀다. 카이사르는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에서 재무관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상당한 양의 금을 들고 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서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확보한 금으로는 자신의 희망했던 정도의 시민 환심을 살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최대의 부자였던 크라수스의 돈으로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고 싶어했다.

그 사이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카스피해에 이르는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 지역과 예루살렘을 로마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이집트를 세력권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금력과 함께 군사 지도자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기원전 106~기원전 48년)의 인기도 이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갈수록 사이가 벌어져 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자신이 포함된 세 사람으로 제1차 삼두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야망과 정치력, 크라수스의 재력,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전공이 서로를 보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는 로마의 전통적인 공직 시스템을 무시한 애삼가와 권력자들의 야합이었다.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바라는 대로 폼페이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됐다. 초법적인 선출이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크라수스는 로마 영토의 동부를 책임지는 시리아 총독을 5년간 맡아 현지에 파견됐다.

크라수스는 자신을 ‘돈 자루’로만 여기는 로마 시민들에게 군사적 재능도 있는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업적이 필요했다.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이웃 페르시아인의 나라인 파르티아에 전쟁을 걸었다. 그는 파르티아에 군사적 승리를 거둬 폼페이우스와 카아사르에 필적하는 전공을 세우고 영토를 확장한 인물로 로마 시민들에게 각인되기를 원했다. 영토를 확장하면 엄청난 토지와 노예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토지와 노예는 부와 동의어였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중무장 보병을 주축으로 한 4만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영토인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크라수스는 부주의하게 파르티아 깊숙이 들어갔다가 함정에 걸렸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인 카레(지금의 터키 동부 하란)에서 파르티아 군과 마주했다. 역사상 로마 사상 최대 패배로 기록되는 ‘카레 전투’다. 파르티아 왕 오도데스 2세의 수하인 수레나스 장군은 1만 명의 기마궁 수와 화살을 나르는 1000마리의 낙타로 로마군단을 공격했다. 크라수스는 아들 피블리우스에게 특공대를 맡겨 퇴로를 열려고 했지만 파르티아의 화살은 로마 최대의 유산 상속 예정자였던 젊은 로마 장교를 놓치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아들의 목이 잘려 적의 창끝에 꽂힌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로마 최고 부자의 최후

결국 그는 퇴각 조건을 논의하자는 파르티아군에 속아 협상장에 나갔다가 자신을 생포하려는 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적장을 살해한 파르티아 군은 로마군단을 더욱 맹렬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크라수스의 로마군단은 1만 명 정도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시리아 속주를 파르티아로부터 지켜냈으나 더 이상 동진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서 제일 가는 재산가, 3두체제의 한 축으로 로마의 최고 정치 지도자라는 지위도 크라수스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오히려 파르티아는 돈 자랑을 하던 그를 혐오하며 끔찍한 최후를 안겼다. 뜨거운 불에 녹인 고온의 액체 금을 그의 시신 목구멍(일설에는 머리라고 한다)에 들이부은 것이다. 파르티아인의 입장에서 ‘인간으로서 고상함을 잃고 돈에 미쳐 이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로마와 그 문명, 그리고 그 지도자인 크라수스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 것이다.

크라수스만큼 반면교사의 삶을 산 부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금력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지만 권력 획득에 필요한 전공(戰功)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그런 콤플렉스가 그를 결국 종말로 몰고갔다. 크라수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나 수단이 정당하지 못했기에 평판은 낮았다. 돈으로 평판까지 살 수는 없었다. 재산은 모았으나 덕을 쌓지는 못했다.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 달성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다. 그는 전공으로 평판을 얻어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 했으나 결국 아들과 함께 전쟁터의 고혼이 되는 화를 당했다. 로마에선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10호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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