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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사진을 보던 오스트리아의 파워 블로거 줄리아(25)도 고개를 들었다. 여행·스타일 관련 블로그(Chic Choolee)를 운영하는 그는 기자에게 “F13에 오르기 전, 내 앞을 지나가던 모르스체크 회장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을 건넸다. 기자가 “멀리 있어 잘 못 봤다”고 답하자 줄리아는 “몇 년 동안 꿈꾸던 비행을 하기 위해 설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사이 작은 새처럼 하늘을 날던 F13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짧은 비행이었지만 여운은 길었다.
막 비행을 마치고 “꿈이 현실이 됐다”고 짧은 소감을 전한 모르스체크 회장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있었다. 테스트 파일럿으로 동석했던 올리버 바흐만(Oliver Bachmann·43)도 “F13 조종석 앞쪽 창문이 얼굴을 절반밖에 가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100년 전 비행했던 조종사들의 기록까지 살펴봤을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했는데, 결국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기쁜 소감을 밝혔다.
비행기에서 내려 간이 무대로 자리를 옮긴 모르스체크 회장은 “부친이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비행기를 드디어 재현했다”고 말했다. 리모와와 F13의 특별한 관계에 싹이 트기 시작한 건 1930년대. 창업 1세대였던 할아버지(파울 모르스체크)에 이어 아버지(리차드 모르스체크)가 막 여행용 트렁크 제조 사업에 합류하게 된 때다. (할아버지 파울 모르스체크가 리모와의 전신을 세운 것은 1898년. 미국의 가방 브랜드인 샘소나이트보다 21년 앞섰다.)
F13 복원해 직접 비행까지 성공한 리모와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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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아버지가(파울) 연구하던 소재 혁신은 아들(리차드)이 완성했다. 세계 최초로 전체가 알루미늄으로 된 경금속 소재의 트렁크를 출시한 것이다. 새로운 소재는 독일의 항공 제작사 융커스(Junkers)가 만든 비행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비행기는 세계 최초로 동체 전체가 금속으로 된 항공기였는데, 당시에는 비행기조차 전체를 금속으로 만드는 것이 매우 혁신적인 때였다. 융커스의 혁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랄루민(알루미늄 합금). 두랄루민으로 만들어져 매우 가벼웠던 융커스 JU52은 당시 보통의 비행기들이 나르지 못한 크고 무거운 기계나 물자 운송에 주로 이용됐다. 당시 항공 제작 기술의 핵심은 사람과 무거운 짐을 싣고도 높이 떠오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동체는 최대한 가벼워야 했다.
리모와는 이런 항공 제작 기술의 핵심이 여행용 가방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날 함께 현지취재를 한 레옹 매거진의 신동헌 편집장은 “가방 회사가 웬 비행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승객을 대량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금속제 여객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여행 문화도 리모와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후 리모와의 지속적인 성공을 이끈 것은 창업주 대대로 내려오던 개척자 정신(pioneer spirit). 단순히 알루미늄 재질의 트렁크로 인기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리모와의 트렁크는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1950년, 그루브(Groove·가방 위에 좁고 긴 홈이 파진 디자인) 패턴의 외관은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한눈에 리모와의 트렁크임을 알아채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쉽게 미끄러지지 않아 가방 안의 짐을 보호하기에도 적합했다. 같은해 리모와는 알루미늄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두랄루민을 사용한 트렁크도 출시했다. 독일 만하임응용과학대의 빈프리트 베버(Winfried W. Weber) 교수는 이런 리모와가 독일 강소기업의 강점을 잘 드러낸다고 말한다. 베버 교수는 “고도의 전문성을 통한 틈새전략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성과를 설명하기엔 2% 부족하다”며 “독일 중소기업은 가족기업에서 내려오는 촘촘한 네트워크와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혁신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3대째 내려온 리모와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친이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비행기를 드디어 재현했다”라며 “꿈이 현실이 됐다”고 말한 디터 모르츠체크 회장의 깊은 감정을 헤아리기 힘들다. 현재 CEO인 3대 디터 모르스체크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리모와를 이끌고 있다. 디터 모르스체크 회장 역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도전해왔던 ‘개척자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모르스체크 회장은 1976년 세계 최초로 방수처리 된 포토 케이스를 개발했고, 2000년 폴리카보네이트를 사용한 캐리어를 내놨다. 폴리카보네이트는 대통령 경호 차량의 방탄 유리에 사용되는 소재로 뛰어난 내구성, 견고함을 갖췄으면서도 무게는 더 가볍다. 리모와의 토파즈 모델(두랄루미늄)의 트렁크가 84L 용량에 6.3㎏이라면 86L 용량의 살사 모델(폴리카보네이트)는 4.3㎏으로 용량은 2L 더 크지만 무게는 2㎏이 가볍다. 과거 알루미늄, 두랄루민 등 새로운 소재를 가방에 가장 먼저 도입했던 리모와의 선구자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굳혀나갔다.
융커스 F13은 독일 비행기 엔지니어 휴고 융커스(1859~1935) 박사가 1919년 개발한 비행기로, 기체를 금속으로 만든 사상 첫 기종이다. 1933년까지 330대 가량 제작된 후 단종됐다. 현재 프랑스 파리 박물관에 보관된 1대를 비롯해 불과 몇 대 남지 않았다.
F13에 착안해 알루미늄 트렁크 출시 인연
높이 3.5m, 길이 9.6m. 작은 비행기 1대를 만들어 날게 하는데 걸린 기간은 약 1만6000시간. 융커스 F13의 복원은 그 과정에서부터 개척자정신이 녹아있었다. 캐리 람(Carrie Lam) 리모와 아태지역 마케팅매니저는 “F13을 복원테스트하기 위해 현재 융커스 비행기를 운행하고 있는 스위스 항공업체 유-에어(JU-Air)와 협력했다”라며 스위스에서 이번 행사를 진행하게된 배경을 설명했다. 복원과정에는 유-에어를 포함해 수십 개의 업체가 중지를 모았다. 항공기 복원 전문업체인 칼린 에어로 테크놀로지의 칼 고트발트(Karl Gottwald) 전문가는 “융커스 F13의 제작 도면이 모두 사라져, 파리 박물관에 보존된 비행기를 3D 드로잉 기법으로 분석했다”고 말했다.
“실제 하늘을 날 수 있는 융커스 F13을 볼 수 있어 정말 기쁘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인 이도 있었다. 휴고 융커스 박사의 손자 버나드 융커스(Bernd Junkers)였다. JU52는 여객기로 개발됐지만 2차대전 발발 후 독일 공군의 폭격기로 바뀌어 폭탄을 실어 날랐다. 아돌프 히틀러도 JU52를 전용기로 사용했다. 융커스기술박물관에 따르면 융커스 박사는 평화주의자로 나치 정부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치는 1933년 융커스의 경영권·기술 특허를 몰수했고 193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융커스 박사를 체포했다. 나치에게 항공기술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도주했다 가택 연금된 융커스 박사는 이듬해 2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항공산업을 개척했던 융커스는 이후 항공사업에서 철수해 냉장고, 난방기구 같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서 에어하츠가 “직접 F13 비행을 앞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디터 모르츠체크 회장은 “very excited”라고 답했다. 리모와 코리아의 최준 상무의 표현을 들으면 직접 F13 비행을 앞뒀던 모르츠체크 회장의 심정이 더욱 와닿는다. 최준 상무는 F13을 복원한 리모와를 이렇게 비유했다. “한국의 거북선을 복원해 다시 바다에 띄운 셈이다.”
- 취리히(스위스)=임채연 기자 yamfler@joongang.co.kr
[박스기사] 최신기술 적용된 리모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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