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10) 

와인 앞에서 침묵하기가 어려운 이유 

이석우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
와인은 독서만큼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다. 단순한 알코올 음료로 즐겨도 무방하지만, 와인마다 제각각의 사연이 있고 스토리가 있다.

▎와인은 독서만큼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다.
그날도 정말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했다. 진심이다. “이 대표가 와인을 잘 아니까 시켜봐요.”

한때 상사로 모셨던 분의 하명이 떨어졌다. 뭐라고 대꾸를 할 겨를도 없이 와인리스트가 내 손에 쥐어졌다. 회사 일과 관련해서 모인 식사 자리라 말들이 별로 없었던 차에, 일제히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만의 착각일지는 몰라도, 나는 평소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와인 이야기만 나오면 떠들고 싶어진다. 번번이 그런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서 일행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터라, 오늘만큼은 입 다물고 조용히 있겠노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와인을 한 병 시키고 나서는 다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건 무슨 와인이야?” 상사로 모시던 분이 정말로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와인을 시켰으니, 약간의 설명은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짤막하게 답변했다.

“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브르넬로 디 몬탈치노라는 와인입니다.”

이 와인은 카스텔로 반피라는 생산자가 만든 와인이고, DOCG(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급이고, 그런 등급체계에 따라 법적으로 산지오베제 품종만으로 와인을 만들며, 최근 브르넬로의 품질이 많이 개선되어서 가격 대비 정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등 머릿속에서는 10분 분량의 스크립트가 떠올랐으나, 가만히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잘 참고 있다고 대견해 하고 있었다.

“이 와인에서는 특이한 향들이 나는데. 이건 무슨 향이라고 표현해?”

“뭐 향을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각자 표현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와인 전문가들은 표현하는 용어가 있을거 아냐.”

평소 와인에 대해 무덤덤하시던 분이 오늘은 왜 이렇게 집요하실까. 일전에 프랑스 보르도의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Chateau Cos d’Estournel)을 같이 마실 때 그 와인의 특징이 연필심 향(pencil shaving)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럼 연필을 사다가 냄새를 맡으면 되지, 왜 이 비싼 와인을 마셔?”라고 아재 개그를 하셨던 분인데.

“제가 무슨 향이 난다고 하면, 그게 오히려 선입견이 되어서 다른 향을 느끼시는데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슬슬 같이 계신 다른 분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차. 이제 그만하자. 음식이 나오면서 이런 저런 업무 이야기가 이어지자, 부르넬로 한 병이 금새 없어졌다. 한 병 더 시키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이번 와인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이거 좋다.” 상사로 모셨던 분이 꽤나 흡족해 하셨다.

“아, 네, 저도 좋아하는 와인이라 시켰습니다. 미국 나파에 있는 하이츠 와인 셀러스(Heitz Wine Cellars)에서 생산한 마사스 빈야드(Martha’s Vineyard)라는 싱글 빈야드 와인입니다. 파리의 심판이라고, 1976년에 스티븐 스푸리에(Steven Spurrier)라는 영국 사람이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미국 나파 와인들과 프랑스 특급 와인들을 블라인드로 비교시음을 했었는데, 거기서 선전한 와인입니다. 전에 1992년 빈티지를 마셨는데, 특이하게도 유칼립투스향이 났는데요. 알고 보니 포도밭 주변에 유칼립투스 농장이 있어서 바람을 타고 그 향이 포도에 밴다고 하네요. 나파의 잘 만든 와인들은 프랑스의 명품 와인 못지 않게 숙성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죠. 지난 번에 드셨던…”

그 때, 건너편에서 가만히 와인을 드시던 한 분이 버럭 한 마디 날리셨다.

“거 좀 편안하게 술 마십시다!”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나 또한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살짝 오른 취기에 또 아는 체를 해버렸다. 버럭 하신 분의 짜증 섞인 얼굴은 식사가 끝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와인


▎1. banfibdm2004: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위치한 카스텔로 반피에서 생산한 최고급 브르넬로 디 몬탈치노인 ‘포지오 알로로’ 2004년산 와인. / 2. cos2007: 프랑스 보르도 2등급 그랑크뤼인 샤토 꼬스 데스뚜르넬의 2007년산 와인. / 3. heitzmartha2006: 미국 나파밸리에 있는 하이츠 셀러스에서 생산한 나파밸리 카베르 소비뇽 ‘마사스 빈야드’ 2006년산 와인.
와인은 독서만큼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다. 단순한 알코올 음료로 즐겨도 무방하지만, 와인마다 제각각의 사연이 있고 스토리가 있다. 와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와인 산지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특정 지역에서 와인이 생산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연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다양한 와인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포도나무가 심어진 토양에 대한 지질학적 지식이 도움이 되고, 포도나무가 자라서 좋은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식물학과 기후학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된다.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생물학과 화학 등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는 단계에서는 그 향과 맛을 인지하는 코와 혀, 두뇌 등 인체의 기관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와인을 놓고 이렇게 폭넓은 지식을 넘나들 수 있으니, 나처럼 지적 허영심이 넘치는 소인배는 얄팍한 지식을 자랑질할 기회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더욱이 나이가 들수록 허튼 소리해대는 나를 말릴 사람이 줄어드니, 이제는 스스로 자중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 큰일이다. 와인 마시는 자리에서 제가 또 아는 체를 하며 떠들거든, 누가 나 좀 말려주세요, 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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