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성문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마니아인 이탈리아 건축사 정태남이 10월 3일 독일 통일 기념일을 맞아 독일 베를린을 다녀왔다. 분단 독일의 아픔과, 통일 독일의 기쁨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성문을 재조명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야경 / 사진:정태남
10월 3일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다. 동서로 갈라져있던 독일이 통일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베를린을 찾은 것은 동서 간의 냉전이 한창 때이던 1980년대 중반 어둡고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당시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가 관할하는 서베를린과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으로 분단되어 있었는데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로 둘러싸여 있는 고독한 섬 같은 곳이었다.

동독은 자본주의의 서방과 첨예하게 마주치는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공산권에서 동독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독에 대한 소련의 입김은 매우 강했고 또 동독정권은 자본주의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유를 억압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서베를린은 동토(凍土)의 땅 동독 지역 안에 위치한 유일한 자유의 보루였던 셈이다.


▎서베를린에서 본 브란덴부르크 성문. 한때 동베를린의 상징이던 TV송신탑이 문틈으로 멀리 보인다. / 사진:정태남
당시 서독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동독영토 통과비자를 먼저 받고난 다음 차가운 얼굴을 한 동독경찰로부터 입국검문 절차를 받은 다음 지정된 고속도로를 통과하게 되는데 말이 고속도로이지 도로면이 온통 울퉁불퉁했으니 품질이 좋은 독일제 자동차라도 속력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서독이 도로유지관리비를 엄청나게 대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동독은 무슨 심술인지 도로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고속도로를 따라 몇 시간 달린 다음 베를린 근교에 도착하면 다시 섬찟한 출국검문을 받는데 동독경찰은 혹시라도 자동차 안에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시민이 숨어 있는지 알려고 자동차 안에 탄 사람들을 신분증과 일일이 대조했으며 차 안과 짐칸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동차 바닥까지 샅샅이 검사했다. 이런 마음 조이는 순간을 보내고 서베를린의 체크포인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천국에라도 온 듯 안도의 숨이 저절로 나왔다.

춥고 어둡던 그 겨울날


▎브란덴부르크 성문과 부속 건물.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입구 프로필라이온을 연상하게 한다. / 사진:정태남
제2차 세계대전 후 포츠담회담 결과에 따라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성문을 중심으로 동서로 분할되었고 베를린의 역사 중심지는 모두 동독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서베를린 시민들은 도시의 역사와 기억이 담긴 구심점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베를린에서는 오로지 제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진 처절한 모습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와 티어가르텐 숲 한가운데 세워진 전승기념탑만이 역사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다. 베를린이 완전히 분단되어 사방팔방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서베를린 시민들은 날로 엄습해오는 심리적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6월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서베를린 시민들을 향하여 연설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역설했다. 또 그는 미국이 서베를린 시민들의 자유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것을 전 세계에 천명하면서 “나는 베를린 시민(Ich bin ein Berliner)”이라고 독일어로 또렷하게 외쳤다. 당시 동독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커다란 장막으로 가리고 동베를린 시가지를 볼 수 없도록 했다.

그후 24년이 지난 1987년 6월12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서베를린 시민들과 자유의 세계를 향해 연설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기둥 사이로 본 개선마차. 역사 중심지가 있는 동베를린 쪽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정태남
“고르바초프 총서기장님,
만약 당신이 평화를 간구한다면,
만약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에 번영을 간구한다면,
만약 당신이 자유화를 간구한다면,
여기 이 성문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씨, 이 성문을 열어젖히시오
고르바초프씨,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


어둡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찾아오는 법인가? 2년 후인 1989년 8월, 동독주민들이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대거 탈출하면서부터 서슬이 퍼렜던 동독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유럽에 닥쳐온 자유화의 물결이 동독으로 파급되자 자유를 요구하는 민중들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돼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전격적으로 동독시민이 서베를린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조치를 내렸다. 이리하여 마침내 11월 9일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12월 22일에는 서독의 헬무트 콜(H. Kohl) 총리는 두 발로 걸어서 활짝 열어젖혀진 브란덴부르크 성문을 통과하여 동독의 마지막 서기장 한스 모드로(H. Modrow)와 서로 손을 굳게 잡았다. 이로써 독일 통일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고 다음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다시 통일 되었으며 격동의 독일 역사를 지켜본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이제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서쪽 티어가르텐 숲으로 뻗은 6월17일 거리. 19세기에 세워진 전승기념탑이 초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만약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헝가리가 동독주민의 대거 탈출을 막았더라면? 만약 콜 수상이 통일을 신속히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에서 흔히 그렇듯이 독일 통일에는 행운도 따랐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기회를 놓치는 자에게는 미소를 보내지 않는다. 독일 통일기념일 10월 3일은 우리나라의 개천절이기도하다 그러고 보면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언제 막을 내리려는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우리는 한반도도 5년 내에는 통일되리라고 낙관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없는 것일까?

평화를 상징하던 고전풍의 베를린 관문


▎동독을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은 영혼을 기리는 하얀 십자가들 / 사진:정태남
그후 1999년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근처의 독일 의사당은 2차 대전 때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베를린이 수도로 정해진 다음에는 말끔히 복구되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이제 베를린에서는 그 어둡고 추웠던 겨울의 음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시내 곳곳에서는 환희가 넘쳐흐르는 듯하여 마음이 들떠진다. 다만 장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총 맞아 죽은 동독주민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성문 근처에 세워 놓은 하얀 십자가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그런데 이 성문은 언제 세워진 것일까? 겉모습을 보면 고대 그리스를 연상하게 하는 완전 고전풍의 건축이다. 베를린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고 이 성벽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중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베를린 서쪽 50km 떨어진 브란덴부르크와 연결하는 성문이었다. 현재 문의 기원은 지금부터 꼭 2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6년에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기존의 성문을 헐고 평화를 상징하는 새로운 베를린의 관문 건립을 계획하고는 1788년에 이를 착공했던 것이다. 건축가는 카를 랑한스(C. G. Langhans). 그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입구 프로필라이온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서 디자인했고 착공한 지 3년이 지난 1791에 오늘날 보는 모습으로 완공했다. 당시 유럽 전역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 양식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다시피 하는 이른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양식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관광기념품이 되어버린 동독과 소련의 국기와 군장을 파는 노점. / 사진:정태남
성문의 높이는 26m, 폭은 65.5m, 깊이는 11m가 되고, 기둥은 모두 도리스 양식으로 바깥쪽과 안쪽을 합쳐 모두 12개인데 한가운데는 황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기둥과 기둥 간의 간격을 더 넓게 했다. 이와 같은 고전풍의 건축에서는 기둥의 양식에 따라 건축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장식이 없고 절제된 모습의 도리스 양식의 기둥은 근엄하고 묵직한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다소 여성적인 기분을 주는 이오니아 양식이나 발랄한 소녀와 같이 화사한 인상을 주는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과는 달리 남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곧고 강직한 북부 독일 프로이센 사람들의 기질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이 성문은 세워진 이래로 원래 모습을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는데 다만 성문 위에 올려진 개선의 사두마차와 빅토리아 여신상은 좀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하고는 전리품으로 승리의 여신상을 사두마차와 함께 몽땅 떼어다가 파리로 가져갔다. 하지만 1813년에 프랑스군이 라이프찌히에서 프로이센 군에게 패배하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졌다. 이리하여 개선 마차를 탄 빅토리아 여신상은 1814년 베를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이때 빅토리아 여신이 들고 있는 화관에 프로이센의 권위를 상징하는 철십자가가 첨가되었다.


▎동독과 서베를린의 경계였던 연합군 관할의 체크포인트 찰리. 독일 통일 후 주변에 새로운 상업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 사진:정태남
이 성문은 나치 치하에서도 히틀러가 아끼던 독일의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 성문 주변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온통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 성문도 크게 파손되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종전 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당국은 이 성문을 공동으로 보수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자동차나 사람들이 성문을 자유스럽게 통과했다. 하지만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동독 시민들이 날로 늘어나자 1961년 8월 동독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를 지키겠다면서 브란덴부르크 성문을 중심으로 베를린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단하는 장벽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 성문은 이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8년 동안 ‘금단의 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자동차로 브란덴부르크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 다시 금지 되었다. 아니, 또 어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는 놀랄 일도, 마음 아파할 일도 아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주변 일대가 보행자전용구역으로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티어가르텐 한가운데 세워진 전승기념탑 위에서 동쪽으로 본 베를린시가지. 숲속의 직선도로(6월17일 거리)가 끝나는 곳에 브란덴부르크 성문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현재 국내의 (주)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외에도 음악·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저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 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관하여 강연도 하고 있다.

201710호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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