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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의 art TALK(7)] ‘Charles1:King and Collector’ 전 

4세기 만에 한자리에 모인 찰스 1세의 명작 컬렉션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런던에 있는 영국 최고 왕립미술학교인 로열 아카데미가 설립 250주년을 기념하며 의미 있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번엔 역사적인 정치 사건들에 기인하여 숙명적으로 흩어진 한 영국 왕 찰스 1세 미술 컬렉션과 영국의 첫 포퓰리즘 혁명가 크롬웰의 개혁 정책과 함께 고찰해보고자 한다.

서양미술사를 연구하다 보면, 가장 흥미롭게 빠져드는 이야기 중 하나는 미술작품과 컬렉션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이다. 특히 ‘작품은 세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한 번은 작가가 작업을 할 때, 다음엔 그 작품이 다른 사람들의 소유로 팔려 나갈 때, 마지막으로는 그 작품이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될 때다. 그런 맥락에서, 영국 왕 찰스 1세는 17세기에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및 북유럽 르네상스 최고의 명작들을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모았던, 대단한 컬렉터였다.

사실상, 15~16세기 영국의 튜더 왕가는 미술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가문이었다. 강력한 군주 국가의 영향력을 시사하기 위해,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때도 그들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초상화 커미션 정도만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영국 전역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멋지게 그려 보내기 위해, 당시 신교적 입장을 함께하던, 북유럽 앤트워프 출신의 한스 홀바인을 궁정 화가로 초청했다. 그 이후, 영국이 유럽에서 최고의 예술적 리더십을 발휘한 업적으로 남길 만한 일이 있다면, 바로 영국 내전의 주인공인 찰스 1세가 수집한 유럽 최고의 명작으로 이루어진 미술 컬렉션이다.

찰스 왕세자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623년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찰스 왕세자는 티치아노(Titian)와 베로네세(Veronese)의 작품을 포함해 많은 작품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학자와 같은 삶을 꿈꾸며 자신의 컬렉션을 구축할 의향이 있던 왕세자는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Mantua)의 공작이 축적한 당시 최고의 명망 있는 곤차가(Gonzaga) 컬렉션의 주요 작품을 인수했다. 당시에 이러한 거래를 도운 다니엘 니스와 같은 당대 최고의 딜러 역할을 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러한 단단한 당대의 마스터 피스들과 더불어 당시의 현대미술 작가인 안토니 반다이크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중요한 초상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성에 반다이크(Anthony Van Dyck) 및 ‘반다이크류’의 초상 작품들이 없는 곳이 없다 할 정도로, 영국 미술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유럽에 이러한 컬렉션 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영국 귀족사회에도 왕과 경쟁할 만한, 영국 왕실 공작인 토머스 하워드(1586~1646), 아운델 백작, 조지 빌리어스(1592~1628) 등 여러 컬렉터가 있었다. 이러한 예술적 리더십에 관해 생각을 조금 더 해보자. 사실, 영국이 계몽주의 시대를 시작하며, 새로운 산업혁명을 이끌어가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최고로 리딩했던 것이 컬렉션 문화다. 그리고 1753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스 슬로운 경의 컬렉션에 힘입어 세계 최초의 퍼블릭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컬렉션 문화는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소더비(1744년 설립)와 크리스티(1778년 설립)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한 시대의 예술적 리더십은, 후대에 한 국가의 문화유산을 만드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영국 사람들은 선대가 만들어놓은 문화관광 콘텐트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세계적인 경매회사도 런던에서 시작해


하지만 그러한 미술 컬렉션이 그저 순탄하게 보전되고 인정받으면서 지켜지진 못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거니와, 시대적 가치와 정치적 시각에 따라서, 예술품들도 달리 해석되고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찰스 1세의 컬렉션은 연이은 영국 내전에서 당시 군부의 개혁가인 올리버 크롬웰이 승리하면서 모두 해체되었다. 즉, 1649년 왕의 처형 이후 그의 소장품들은 크롬웰에 의해 모두 전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크롬웰은 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거두어들인 왕의 세금 환수와, 이 예술품을 판매해 확보한 재정으로 더욱 강력한 철기군에 기반한 군부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10년이 지난 후 찰스 2세가 다시 왕정복고에 성공하여, 크롬웰 공화정을 극복하며 아버지의 작품들을 회수하였지만, 여전히 그의 대부분 작품은 유럽 전역에 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방문해서 보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찰스 1세의 총 2000점에 이르는 막대한 컬렉션 중 140개만 소개되었고, 현재 여왕의 컬렉션으로 남아 있어 본 전시에 대여해준 작품은 총 전시품 중 80여 개밖에 되지 않는다. 스페인은 티치아노가 그린 실물 크기의 ‘찰스 5세 초상’을 획득했다. 프랑스는 ‘엠마오의 만찬’을 가졌다. 다른 페인팅 작품들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마침내 뉴욕에 도달했는데, 반다이크의 작품은 현재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으며 브뤼헐(Bruegel)의 작품은 뉴욕의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또 생각해야 할 부분이 올리버 크롬웰의 정책이다. 사실 영국에 오래 살아본 사람이라면, 크롬웰의 커몬웰스(Commonwealth)정책이나, 그의 외무상으로 일하며 10년간 그의 정치적 사상의 근간을 만들어준『실락원』의 저자 존 밀턴(John Milton)에 대한 국민의 큰 존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두 번의 영국내전을 통해, 찰스 1세를 처형하여 왕정을 붕괴시키고, 첫 공화당을 시작하여 민주주의적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한 사람이다. 또 찰스 1세의 카톨릭적 교황제 우대정책을 하는 영국 성공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새로운 성서주의에 입각한 청교도적이며 프로테스탄트적 성공회로의 변화를 추구한 대개혁가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일반 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중산층 시민에게 보통선거를 시작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시작한 매우 건강한 포퓰리즘 정치를 시도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수많은 작품을 모두 팔아버리고, 예술적 가치에 대한 보전이나 의미를 지키지는 않았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대중에게 이러한 엘리트적인 예술품은 필요하지 않다는 게 혁명가들의 입장이었고, 과감히 그 모든 예술품을 남김없이 팔아버렸다. 과연 이처럼 훌륭한 혁명가이고 왕정복고 이후에도 더욱 민주적 기반을 닦은 크롬웰의 정책을 예술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오랜 시간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가 유럽 미술관들을 방문할 때, 가끔 운 좋게 만나는 과거 대가들의 전시들, 가령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등의 전시들을 현시대에 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전시가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단지 과거의 명작들을 보면서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적 가치에 찬사만 보내기 위한 것이라면, 수많은 미술사가와 큐레이터들이 5~6년의 시간을 들이고, 다른 미술관에 있는 작품을 많은 보험 비용을 지불하면서 대여해 올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유럽에서의 예술적 리더십 되돌아봐


전시의 핵심은 안토니 반다이크가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맡은 주요한 커미션 작업인 왕과 왕실의 기념비적인 초상화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시대순이나 주제별로 전시한 것이 아닌, 찰스 1세의 비전이 담긴 컬렉터로서의 모습, 예술 후원자로서 선구적으로 발굴한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이 부각된 전시였다. 어떤 면에선, 다시 옛 왕들의 문화적인 업적과 그들이 시작한 선구적인 예술적 리더십을 말하고 있다. 그 유명한 루벤스의 ‘전쟁의 신 마스에게서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 여신(Peace and War, 1629~30)’이라든지, 반다이크의 ‘큐피드와 프시케(1639~40, Royal Collection) 등도 모두 찰스 1세의 커미션 작품이었다. 그리고 후대에 더욱 중요하게 인정받는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의 후원을 받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와 귀도 레니(Guido Reni) 등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내용을 방증한다.

전 세계적으로 다시 자국주의,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포퓰리즘의 시대로 들어가는 시점이다. 이럴 때 본 [Charles1:King and Collector] 전시는 다시 한번, 250년 전통의 영국 로열 아카데미의 위상을 재확인하며, 브렉시트하는 영국이 유럽에서의 예술적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다소 옹호하고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닐까. 혁명가 크롬웰에 의해 사라졌던 작품들이 런던으로 돌아온 것을 영국인은 매우 뭉클하게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영국인의 손에 의해 사라졌었던 것이며, 다시 한번 예술의 가치와 대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는 전시인 것 같다. 전시는 4월 15일까지다.

※ 이지윤은… 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박사/미술경영학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 360도]을 기획하였고,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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