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한동안 여자와 남자가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의 답을 상담가 존 그레이의 저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찾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제 더는 남녀의 차이를 ‘남자의 뇌, 여자의 뇌’라는 식으로 구분해 설명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감성적이잖아요. 냉정한 이성이 요구되는 일을 여자 부하에게 맡기려니 불안해요. 험한 일은 되도록 남자 직원에게 주는 편이에요.”“내 밑에 여자 부장이 있는데, 너무 예민해서 눈치를 보게 돼요. 남자 직원들한테는 아무 말이나 막 해도 탈이 없는데, 여자들은 한번 삐치면 오래가잖아요.”“엔지니어들이 대부분 남자인 것을 보면 남자의 뇌가 수학이나 공학에 더 적합한 것 같아요.”여자와 남자는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일까? 한동안, 온 세상 사람들이 상담가 존 그레이의 저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 책의 인기 덕분에 ‘남자와 여자는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원래 근본적으로 다른 종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구분은 친밀한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존재하는 모든 장면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여자 동료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서로 다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니 말이 통해요.”뇌 연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학자가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가 따로 있어서 남녀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었다. ‘서로 다른 뇌’ 가설은 몇몇 대중과학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그중 하나가 신경정신과 의사 루안 브리젠딘(Louann Brizendine)의 저서 『여자의 뇌(The Female Brain)』다. 저자에 따르면 엄마 배 속에서부터 각자 타고난 뇌 발달 청사진에 따라 남아와 여아의 생물학적 운명이 갈린다. 테스토스테론의 왕성한 분비 때문에 남아의 뇌에서 ‘소통과 정서 센터’는 쪼그라들고 ‘공격성과 섹스 센터’는 강력해진다. 자폐증을 앓는 남자의 수가 여자보다 4.5배나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럴 법도 하다. 반면, 여아의 뇌에서는 소통과 정서 능력을 돕는 신경세포들 사이에 활발한 연결이 생성된다. 태어난 후 2세까지 여아의 난소에서는 에스트로겐이 성인 여성 수준으로 엄청나게 분비되는 덕분에 공감 능력의 기본 토대가 이 시기에 형성된다.
‘서로 다른 뇌’ vs ‘하나의 뇌‘서로 다른 뇌’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달리 ‘하나의 뇌’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뇌는 성별이 없으며 굳이 분류하자면 중성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뇌’를 사실로 보기엔 남녀의 뇌 사이에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여자 혹은 남자 뇌의 특징으로 꾸준히 드러나는 특성이 관찰되어야 하는데 그런 일관성이 발견되지 않았고 주장한다.한동안 ‘서로 다른 뇌’에 실렸던 무게중심이 이제 ‘하나의 뇌’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뇌 과학자 다프나 조엘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개인은 남자 혹은 여자 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특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호르몬과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어떤 때는 (‘서로 다른 뇌’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용어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여자의 뇌로, 다른 때는 남자의 뇌 상태로 변한다. 따라서 당신의 뇌는 남녀 뇌의 특성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조합한 결과물이며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뇌’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지난 50년 동안 발표된 남녀의 성차에 관한 논문 5만 편을 검토한 후 남녀는 심리학자들이 측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 즉 지적 능력, 정서적 능력, 성격 특성, 태도, 흥미, 행동 등에서 아주 비슷하다고 결론 내렸다.과학자들은 이제 더는 남녀의 차이를 ‘화성 남자 대 금성 여자’, 혹은 ‘남자의 뇌, 여자의 뇌’와 같은 식으로 구분해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나 자폐증 유병률은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반면 우울증, 알츠하이머 유병률은 그와 반대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성호르몬, 혹은 특정 뇌 영역의 활성화 정도의 남녀 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남녀가 원래 다른 종족이라는 식의 설명은 진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안 그래도 현실에서는 늘 ‘여자는 이래, 남자는 이래’라는 식의 범주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넘쳐나는 가운데 인지적인 구두쇠(cognitive miser)인 인간에게 범주 정보는 구세주다. 카테고리에 기반해서 개인에 대한 판단을 내리면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머릿속이 편안해진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가 선풍적 인기를 끈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남자는 고민할 때 동굴로 들어가는 반면 여자는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간편한가? 남자든 여자든 상황에 따라 때로는 여자처럼, 혹은 남자처럼 뇌가 변하고 행동이 달라지며 개인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특별하고 독특한 조합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정말 듣기 싫어한다.성별뿐인가. 뭐든지 유형으로 분류하면 인기다. “예상대로 김 과장은 A형이었어. 하는 짓 보고 딱 알아봤지.” ‘근본’도 없는 혈액형 이론이 국민 상식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기업에서 사용하는 성격 검사도 마찬가지다. 성격을 연구한 학자들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입이 아프게 말려도 인사 부서의 선택은 늘 DiSC와 MBTI 같은 유형형 검사다. 성격을 다양한 차원의 조합으로 설명하는 Big 5 이론은 학계를 지배하지만 기업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당신은 ‘사교형’입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니까 머리에 접수되질 않는다.여자 혹은 남자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 고정관념이다. 남녀의 차이는 실제보다 사람들의 관념 속에 더 확고하게 존재한다. 고정관념적 판단은 전형적인 범주적 사고다. 예를 들어, 김 과장을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인으로 여기지 않고 여성 집단의 멤버로 취급하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인 당신은 부하 직원들보다 이런 오류에 더 취약하다. 더 바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런 인지적 지름길을 반복해서 채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신의 의식 깊숙히 자리한 ‘범주적 사고’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의 핵심은 따뜻함과 양육인 반면 남자의 경우는 능력과 지배다. 따라서 유치원 선생님 직무에서는 여성 유리 편향(female advantaging bias)이 일어나 여성이 남성보다 더 능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직 상황에서는 주로 남성 유리 편향(male advantaging bias)이 발생한다. 동의하지 않겠지만 당신도 남자 직원이 여자 직원보다 더 능력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당신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성과를 평가절하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다른 여자의 업적을 더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사람은 누구나 고정관념의 영향을 받는다.연구 분야와 업적, 연구 펀드, 강의 경력 등이 완벽하게 똑같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조교수 자리에 지원하면 동일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심리학자 레아 스타인프리스(Rhea Steinpreis) 연구팀은 동일한 이력서에 여자 이름 혹은 남자 이름을 붙여서 238개 미국 대학의 심리학과에 보냈다. 79% 대학에서 남자 지원자를 교수로 채용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반면, 여자 지원자를 원한 대학은 49%에 그쳤다. 논문, 소설,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적 평가를 확인한 연구는 수없이 많다.2016년 크레디트 스위스 리서치가 전 세계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50% 클럽’의 기업들, 즉 여성과 남성 고위임원의 비율이 5 대 5로 균형을 이루는 기업이 주가 실적과 안정성, 시가총액 등에서 가장 높은 성과를 발휘했다. 전 세계적 데이터를 기준으로 신입사원의 남녀 비율은 50% 대 50%지만 CEO의 남녀 비율은 95% 대 5%로 벌어진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당신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여자는 이래, 남자는 이래’라는 식의 범주적 사고가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성별에 상관없이 베스트 인재를 등용하려면 이제부터 당신이 해야 할 연습은 ‘젠더 바꾸기’다. 만약 당신의 눈에 자신감 넘치는 여자 직원의 행동이 거슬린다면 스스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영희 과장이 아닌 철수 과장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한 남성 대기업 임원이 말했다. “앞으로는 여자 임원이 더 많아져야죠. 그런데 여자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서 그게 걸림돌이에요. 부하 직원이 자기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 좀 개인적이고 위계에 약한 면이 있잖아요.” 이 말은 얼마나 진실일까?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이렇게 질문하면 어떨까? “만약 남자가 (혹은 여자가) 같은 말을 했다면?”
- 조지선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전문연구원(심리학 박사)
※ 조지선 전문연구원은…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타임워너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심리학, 인간행동과 사회적 뇌,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