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베를린에 있는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서 열린 [GURLITT: STATUS REPORT : An Art Dealer in Nazi Germany] 전시는 나치 시대의 아트 딜러 구를리트의 수집품 전시였다. 미술관이 개인 수집가의 소장품을 전시할 때 통상 소장자의 이름에 ‘컬렉션’이라는 단어를 붙이지만 이번엔 ‘Status Report’란 용어로 대체됐다. 무슨 이유일까.
▎Exhibition Views All photos: Bernd Lammel, 2018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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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베른에 있는 쿤스트 박물관(Kunst Museum)에서 [GURLITT: STATUS REPORT “DEGENERATE ART”-CONFISCATED AND SOLD]라는 이름으로 전시됐던 구를리트 소장품이 2018년 9월 베를린에 있는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 Gropius Bau) 미술관에서 [Gurlitt: Status Report: An Art Dealer in Nazi Germany] 전시로 다시 기획됐다. 미술관에서 개인 수집가의 소장품을 전시할 때는 통상 소장자의 이름에 ‘컬렉션’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퐁피두 센터에서 있었던 [Collection Florence et Daniel Guerlain]과 릴(Lille)에 있는 트리포스탈 아트센터에서 플랑드르 컬렉터 18명의 작품들을 전시했던 [SECRET PASSIONS, PRIVATE FLEMISH COLLECTIONS]이 그 예다. 그러나 베른과 베를린의 구를리트 수집품 전시에서는 ‘Status Report’ 란 용어로 대체됐다.14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수집했던 힐드브랜드 구를리트(Hildebrand Gurlitt, 1895~1956)는 나치 시대 퇴폐미술 [art degenere: Degenerate art]의 판매를 위한 예술거래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딜러였다. 나치의 예술품 거래 프로그램은 두 가지 형태로 실행됐다. 첫 번째는 General Art Project로 German Museum이 소장한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해당되었고 두 번째는 힐드브랜드와 같은 딜러가 거래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전쟁 시 독일이 점령했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로부터 수천 점에 달하는 작품을 구매했다. 유대인 아티스트, 유대인 수집가 등을 주 대상으로 했으며 그중에는 로젠버그, 로스차일드, 카울스틱커스 등이 포함됐다. 힐드브랜드에게 작품 판매를 강요받았거나 박탈당했던 유대인 수집가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판매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 내무부장관이면서 레지스탕트였던 Georges Mandel(Georges Louis Rothschild)은 독일군 캠프 감옥에 있다가 퐁텐블로에서 처형됐다.·드레스덴의 변호사 FritzSalo Glaser는 수집가로서 작가, 문인, 예술 전문가들을 위해 문을 오픈했고 그중 한 사람이 힐드브랜드 구를리트였다. 힐드브랜드가 Zwickau의 박물관 디렉터로서 전시할 때 오토딕스, 막스 베크만, 코르나 펠릭스 뮐러 등 400여 작품을 대여해준 사람이지만,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작품 판매를 강요받았다.·유대인 출판업자로 예술 수호자였던 Henri Hindichsen은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인물이었다. 힐드브랜드에게 페인팅 두 점과 데생 두 점 판매를 강요받았다.·힐튼브랜드는 뭉크, 막스 리버만 같은 작가들을 퇴폐미술을 제작하는 작가라고 비하했고 박물관에서 작품을 몰수했다. 나치즘이 규정한 ‘Untermenschen’, 즉 절멸 및 노예화 대상인 열등 인류로는 히틀러가 지독히 경멸했던 유대인이 첫 번째로 꼽힌다. 그 외에 집시, 슬라브족, 흑인, 황인 및 유색인종, 프리메이슨, 일루미니티,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 여호와의 증인, 오컬트 신봉자, 사이비종교 신봉자, 공산주의자, 사민주의자, 아나키스트, 퇴폐미술 생산자, 민주주의자, 반란분자, 선천적 장애인, 정신병자, 에스페란티스토, 혼혈아, 왕당파근황주의자, 병역기피자가 열등 인류에 속한다. 백인우월주의와 여성의 권리와 장애인을 비하하고 예술가들을 근절하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던 히틀러의 집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힐드브랜드 구를리트는 히틀러가 ‘퇴폐미술 생산자’, 즉 예술가들을 지독히 멸시했던 특별한 정치적 상황에서 수집을 이어갔다.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 전시된 총 200여 점에 달하는 힐드브랜드의 소장품은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오토 딕스(Otto Dix),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Kirchner, Ernst Ludwig), 오토 뮐러(Otto Mueller),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에밀 놀데(Emil Nolde),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에드가 드가(Edgar Degas),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폴 시냑(Paul Signac),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등 미술사를 주도했던 대가들의 작품들이었다.
히틀러의 예술가 멸시에도 수집 이어가
▎Exhibition Views All photos: Bernd Lammel, 2018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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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브랜드 구를리트는 1895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956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한 미술상이며 예술사학자다. 그는 츠바카우에 있는 Konig-Albert-Museum과 Hamburg Artistic Society의 디렉터였다. 힐드브랜드 구를리트의 할아버지는 풍경화가 루이 구를리트(Louis Gurlitt)다. 음악가 빌발트 구를리트(Willbald Gurlett)를 형제로 두었고 미술상 볼프강 구를리트(Wolfgang Gurlitt)가 사촌이다.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유대인 혈통으로 1923년 무용수 헬레네 한케(Helene Hanke)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아들 코르넬리우스와 딸 니콜린 베니타 르네트를 두었다. 힐드브랜드는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예술사를 수학했다. 그리고 1924년 프랑크프루트 대학에서 건축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대인이었지만 히틀러의 손발이 되어 예술품 거래를 도맡을 만큼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히틀러 자신에게 없는 고귀한 집안의 수준 높은 엘리트였기 때문이었을까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서는 특히 힐드브랜드가 평생에 걸쳐 기획했던 전시 포스터를 보여주며 예술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했다. 힐드브랜드는 195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57년 서베를린 주립 박물관의 독일 미술사학자 겸 사무 총장이었던 레오폴드 라이데마이스터(Leopold Reidemeister)는 1957년 그를 기리는 추모 연설을 했고 1965년부터 뒤셀도르프의 빌크(Bilk) 구역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거리가 있다.나치 정권의 힘을 이용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작품들을 구입한 힐드브랜드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당시 구입한 작품들을 재판매해서 개인적인 향유를 누리지 않았으며 유대인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나 증오심으로 인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박물관 디렉터로서 훌륭한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전시기획자였다. 미술시장의 구조를 철저히 파악했던 힐드브랜드는 생전에 구입 과정을 밝히는 데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제거한 채 아들 코르넬리우스 구글리트(Cornelius Gurlitt, 1932~2014)에게 수집품을 고스란히 남겼다.‘퇴폐미술’이라는 명목으로 박물관과 유대인에게서 강제로 빼앗거나 매우 저렴하게 구입한 아버지의 소장품을 아들은 허름하고 작은 아파트에서 30년 이상을 숨겼다. 전화도 없이 마치 시골에 파묻혀 작품 활동만 하는 무명 예술가처럼 철처히 세상과 격리된 채 살던 코르넬리우스는 가끔 작품을 외국에서 팔아 생활해왔다. 그러나 그의 은밀한 삶은 어느 날 발각되고 만다. 2010년 9월 취리히에서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서 국경 경찰들의 검문 중 발견된 9000유로가 발단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100유로 지폐는 상당히 큰돈이다. 백화점에 가도 위조 지폐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이 일상이며 아직도 500유로 지폐를 한 번도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곧바로 그의 집이 수색되었다. 허름한 작은 아파트는 먼지 속에 여기저기 놓인 그림들로 빼곡했고 서랍에는 수채화와 판화 등이 쌓여 있었다. 그다음 과정은 세관의 일이었다. 세관원들은 1937년 2만1000여 점이 넘는 히틀러의 ‘퇴폐미술’ 압수품 중 1400여 점의 회화, 판화, 스케치가 보온 보습이 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것을 해결해야 했다. 200여 점만 액자에 보관돼 있었다. 코르넬리우스의 아파트에 있는 작품을 기록한 뒤에 작품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세관의 저장소로 옮기는 것이 시급했다.
아버지의 유물을 뺏기고 싶지 않았던 아들
▎Auguste Rodin(1840~1917), Crouching woman, c. 1882, Marble, 33.5×27.5×18㎝,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Photo: Albrecht Fuchs,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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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은 세 가지로 분류됐다. 첫 번째 나치가 퇴폐예술이라고 지정한 380점, 두 번째 유대인 소장자에게서 강제로 압수한 590점, 세 번째는 힐드브랜드가 합법적 과정을 거쳐 수집한 310점이었다. 이 작품들은 나치 시절 이전에 구입한 것으로 추정됐다. 부인도 자녀도 없이 오로지 예술품들과 살던 코르넬리우스는 작품을 공개해서 모두 원래 소장자에게 돌려주기를 원치 않았다. 아버지의 유물을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는 심장수술 이후 죽음(2014년 5월 6일)을 맞기 전에 소장품들을 스위스 베른 박물관에 맡겼고, 베른 박물관은 그림의 출처를 찾고 원래 소장자를 찾아주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까지 박물관이 공식적으로 이런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없었다.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가 생존했었던 2014년 1월, 출처를 기다리는 작품 458점의 리스트를 Lootedart.com(The Central Registry of Information on Looted Cultural Property 1933~1945)에서 ‘Gurlitt Case’란 명목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458점 중에는 카미유 코로, 쿠르베, 샤갈, 도미에, 고갱, 들라크루아, 드랭, 오토 딕스, 밀레, 앵그르, 뭉크, 로트레크, 쇠라 등의 작품들도 있었다. 작품들이 원소장자를 찾아가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였고, 출처의 중요성이 더욱 요구됐다. 2016년 1월 [독일분실미술재단 The Lost Art Foundation]은 ‘Gurlitt Provenance Research’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구를리트 아트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 아직 그의 수집품 중에 근원이 분명하지 않은 작품들의 출처를 찾아 나치의 예술품 프로젝트로 인해 분실된 작품인지를 증명하는 게 목적이다. 이 프로젝트는 안드레아 바레셀 브랜드(Andrea Baresel-Brand) 박사에게 맡겨졌으며 독일 연방 정부 산하 문화 및 미디어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구를리트는 인간의 끝없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의 상징이다. 힐드브랜드 소장품은 인간이 만든 체제에 스스로 굴레를 만들고 다른 민족을 학대하고 예술품을 박탈하는 권리를 자행하는 인류 역사의 일부분이었다. 이런 불행한 역사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박물관의 작품들이 언젠가는 주인을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별했다. 새로운 희망을 주듯 베를린에 부는 11월의 상쾌한 바람이 전시를 보고 나오는 관람자들을 반겼다.
▎Ferdinand Waldmuller(1793~1865), Portrait of Two Ladies, 1831, Oil on canvas, lined, 95.5×75.5㎝,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2014, Provenienz bislang nicht aufklärbar, aktuell kein Raubkunstverdacht Photo: Mick Vincenz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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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s Cranach the Younger(1472~1553), Workshop, The Christ Child with the Infant, Saint John the Baptist, 1540 (?), Tempera and oil on oak panel, 35.3×25.6㎝,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inv.no. G 18.007, Photo: Mick Vincenz © Kunst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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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dinsky Wassily(1866~1944), Heavy Floating, 1924, Black and coloured inks and watercolour on paper, 48.5×33.6㎝,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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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1884~1950), Zandvoort Strandcaf, 1934 Watercolour and gouache on laid paper, 49.8×64.8㎝,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Provenance undergoing clarification / Currently no indications of being looted art Photo: Mick Vincenz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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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1863~1944), Eifersucht I, 1896(Druck nach 1906) Lithographie und Schabtechnik auf Papier, 36.5×50㎝, Kunstmuseum Bern, Legat Cornelius Gurlitt 2014, Provenienz in Abklärung / aktuell kein Raubkunstverdac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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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marc(1880~1916), Seated Horse, 1912, Watercolour and graphite on ribbed laid paper, 45.5×37.8㎝,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2014, provenance undergoing clarification / Currently no indications of being looted 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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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1832~1883), Sea in Stormy Weather, 1873 Oil on canvas, 55 × 72.5 cm, Kunstmuseum Bern, Bequest of Cornelius Gurlitt, Photo: mick Vincenz © 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Gmb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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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주는…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