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린이 만난 경영 구루 네 번째 주인공은 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이다. 메타바이오메드는 한 해 매출 800억원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한국보다 글로벌 시장에서 더 큰 주목을 받는, 한국을 대표하는 강소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선 오 회장이 강조하는 ‘기업가 정신’은 큰 울림이 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생분해성 봉합원사 개발에 성공한 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이 공장에서 봉합원사 기기를 점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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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vision the Future. Diamond Quality, Gold Service, Silver Price’충북 청주시 오송생명과학단지에 있는 메타바이오메드 본사 정문 옆에 자리 잡은 기념비에 적혀 있는 문구다. ‘미래를 상상해라. 최고의 품질, 최상의 서비스,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의미다. 2001년 메타바이오메드가 충북 청주시 오창읍에 처음으로 공장을 세울 때 만든 비석이다. 공장을 짓느라 돈이 부족한 때였지만 오석송(64)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은 1500만원이나 들여서 이 기념비석를 만들었다. 본사를 오창에서 오송으로 옮길 때도 기념비를 챙길 정도로 애정이 깊다. 비석에 새긴 문구는 메타바이오메드의 사명이기도 하다. 오 회장은 “당시 돈이 부족했지만 우리의 사명을 임직원과 공유하기 위해서 무리해서 만들었다”며 웃었다.
치근관 충전재 분야 세계 1위대부분의 중견기업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기념비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메타바이오메드의 사명은 사업 실패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섰고, 글로벌 시장에 도전해 인정받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오 회장의 노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박혜린 옴니시스템 회장은 오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기자에게 “내가 지면에 초대하고 있는 선배 기업인들은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나 성공하신 분들”이라며 “오석송 회장님은 특히 실패를 이겨내 성공을 거두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인이다”고 강조했다.메타바이오메드는 치과용 재료(충전재) 및 생분해성 봉합원사(몸 안에서 녹는 수술용 실), 정형외과 및 치과용 골수복재 등 의료 기기를 만드는 바이오 기업이다. 특히 2000년 3월 개발에 성공한 치아의 치근관 충전재는 세계 1위다. 1999년 개발을 시작해 2002년 개발 완료한 생분해성 봉합원사는 미국 존슨앤존슨, 독일 비브라운 등 글로벌 기업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개발에 성공했다. 덴탈 제품과 생분해성 봉합사가 매출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오 회장은 메타바이오메드의 신성장동력으로 초음파 장비와 내시경 카테타, 성형 원사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오 회장이 바이오 분야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신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매해 매출액의 10~12%를 R&D에 투자해온 덕분이다. 지난해 1월에는 본사 부근에 연면적 3300㎡(1000여 평)가 넘는 ‘메타 뷰티 R&D 센터’를 열었다. 오 회장은 “그 센터가 메타바이오메드의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오 회장은 사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에 도전했고 현재는 100여 개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미국·독일·일본·중국·베트남 등 5개국에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수출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메타바이오메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강소기업으로 꼽힌다.두 기업인은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바이오 분야 기업을 운영한다는 점 때문에 두 사람의 인연이 더욱 깊어졌다고. 박 회장은 “6~7년 전 행사장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는데, 처음 몇 마디 나눴을 때 동지라고 느꼈다”면서 “오 회장님은 디테일과 추진력이 강하고, 리더십이 대단하다”고 설명했다.두 사람은 지난 1월 9일 오전 8시 충북 청주의 오송생명과학단지에 있는 메타바이오메드 회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박 회장은 오 회장에게 “제가 오늘(1월 9일) 미국 출장이 잡혀 있어서 이렇게 빨리 만나자고 했습니다. 회장님 죄송해요”라고 말을 건넸다. 오 회장은 “괜찮습니다. 기업인들이야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하니까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라며 “기자분들이 고생이네요”라며 웃었다.
기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에 도전해야
▎메타바이오메드 본사 현관 로비에 걸려 있는 임직원 사진 앞에 선 오석송 회장. 오 회장은 “회사의 주체는 임직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을 기억하기 위해 벽면에 임직원의 사진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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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제가 한 달 동안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됐습니다. 미국에 법인을 세우기 위해 미리 시장조사를 하러 갑니다.꽤 길게 가는군요. 혼자 가십니까?
네. 미국 실리콘밸리에 아는 기업인이 있어 저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회사 임원들은 저 혼자 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많이 반대했습니다.(웃음)오래전부터 글로벌 진출을 준비했으니 성과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임원과 함께 가지 않고 혼자 가는 이유가 있나요?
회장님이 예전부터 강조하신 것처럼,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라도 직접 현장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임원보다 대표가 직접 움직이면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도 혼자 가는 이유입니다.(웃음)박 회장은 디테일에 강하고 감수성이 풍부해 임직원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자율적인 시스템과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임직원의 창의성을 살려주고 멍석을 깔아주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박 회장의 장점 같습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10년 전부터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기 시작했어요. 성과가 나기 시작한 것은 5년 정도입니다. 메타바이오메드를 시작할 때부터 해외 시장에 도전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처음 의료기기 제품을 출시했을 때 마치 잡상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경쟁을 하려면 해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 회장도 알겠지만 제가 사업에 실패한 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문턱까지 가보니까 제 자신이 너무 초라했어요. 이때부터 제 자신을 적극적으로 바꿨습니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생겨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거든요.
맞습니다. 기업가가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상황을 헤쳐나가기 어렵습니다.기업가 정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해외 전시회에 가면 메타바이오메드를 알아주기 때문에 편하지만, 예전에는 회사를 알리는 게 어려웠어요. 우리 제품을 해외에 알리는 길은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무조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이민가방 3개를 들고 나갔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수속에서 걸릴 때가 많았습니다. 공항에서 체크인을 할 때 짐이 별로 없는 사람이 보이면 도움을 요청해 수속을 밟을 때도 있었어요. 해외 전시회에 가면 하루 종일 물을 마시지 않았어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웠거든요. 제 항공사 마일리지가 350만을 넘습니다. 지구 140바퀴를 도는 거리라고 하더군요.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메타바이오메드의 현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도전에 주저하는 기업가들을 가끔 봅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해외에 나가는 게 두렵다고 합니다. 회장님은 어떠세요?저도 영어가 유창하지 않습니다. 저는 ‘생존 영어’를 배웠습니다.(웃음) 그래도 바이어와 중요한 계약이 있으면 무조건 제가 참여합니다. 2002년부터 중국 시장에 도전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제가 할 수 있는 중국어는 ‘니하오(안녕하세요)’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니까 우리 직원과 중국 바이어가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면 대충 무슨 내용인지 감으로 알 수 있게 됐습니다. 해외 진출에 도전할 때 언어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도 회장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저도 영어가 많이 부족해서 바이어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려가면서 소통할 때도 있습니다.(웃음)기업가는 박 회장처럼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기업가들이 외국어 능력이 좋지 않다고 해외 바이어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오랫동안 해외 바이어를 만나본 결과 언어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업가는 마지막 결정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이 부족해도 직접 소통하고 담판을 지어야만 합니다.
저도 해외 바이어를 많이 만나보니 영어 실력이 부족해도 대표가 직접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오랫동안 접촉해야 성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바이어와 화상 회의를 수백 번 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악수를 한 번 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서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스킨십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바이어가 많은데 지금은 친구들이 됐죠.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넘은 일본 바이어도 있습니다.
오 회장의 상징, 빨간 넥타이와 짧은 머리
▎오석송 회장과 박혜린 회장은 6~7년 전 행사장에서 만난 후 바이오 분야의 선후배 기업가로 인연을 맺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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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회장은 두 차례 뼈아픈 실패를 딛고 일어나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다. 1960년대 그는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다른 친구들과 달리 금융권 대신 기업을 선택했다. 사업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금성, 대우와 함께 대기업으로 꼽히던 서통, 대주, 신영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대기업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던 그가 바이오 분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태원에서 만난 외국인 덕분이다. 오 회장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태원을 많이 돌아다녔고,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의 소개로 외국계 회사로 옮겼다”고 회고했다. 1986년 치과 의료 소재를 팔던 미국계 회사 한국슈어프로덕트에 관리이사로 스카우트됐다. 이곳에서 해외 바이어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바이오 분야에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쌓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89년 다니던 회사가 노사분규로 문을 닫은 것. 오 회장은 집을 팔고 대출을 받아 회사를 인수했다. 하지만 노조에 밀려 3개월 만에 회사를 포기하고 나와야만 했다. 다시 도전했다. 인도네시아에 현지인과 손잡고 의료 소재 공장을 짓고 재도전에 나섰지만 문제는 현지 물정을 전혀 몰랐다는 것. 제품 불량률이 높았고, 해외 바이어들은 ‘메이드인 인도네시아’ 제품을 믿을 수 없다고 구매하기를 꺼렸다.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성급했던 도전이었다. 3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철저한 패배. 귀국 후 수면제를 들고 아버지 산소로 갔다. 죽기 위해서다. 소주를 마시면서 통곡하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다. 오 회장은 “추위도 이기지 못하는데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빈털터리가 된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은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1990년 동창 일곱 명의 도움으로 신용금고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충북 충주의 한 동네에 있는 건물 지하에 198㎡(60평) 규모의 사무실을 열었다. 사장이자 경리, 운전기사이자 영업사원 등 1인 5역을 하면서 버텨냈다. 예전에 관계를 맺었던 바이어들이 그의 제품을 사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메타바이오메드의 성공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1995년 근관치료용 제품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치아 충전재 생산에 들어갔다. 2000년 3월 치근관 충전재 개발에 성공했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 회장이 “목숨을 걸고 기업을 운영하는 게 기업가의 운명”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메타바이오메드가 다시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은 것은 2002년 개발에 성공한 생분해성 봉합원사 덕분이다. 1998년 오 회장은 전북대 학생들에게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만난 김학연 전북대 섬유공학과 교수는 자신이 몸 안에서 녹는 수술용 실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오 회장은 김 교수와 함께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메타바이오메드가 유명한 것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생분해성 봉합원사를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도전하게 됐습니까?당시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회사 매출이 20여억원에 불과했는데, 개발비만 50억원 정도가 필요했죠. 그때 투자를 받으려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대부분이 ‘실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업가는 5% 성공 확률만 있어도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에 성공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투자도 받지 못했고 자본도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연구개발을 계속할 수 있었나요?운이 좋았습니다. 당시 DJ 정부에서 벤처 진흥 정책을 추진했는데, 기술력 있는 기업에 투자를 해주는 프라이머리 CBO(채권담보부증권) 제도가 생겼습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으로 30억원을 투자 받았습니다.
5%의 성공 가능성만 있어도 기업가는 도전한다는 말이 인상에 남습니다.생분해성 봉합원사에 도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김 교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수술한 환자가 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개복해야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만일 실이 체내에서 녹는다면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환자에 대한 서비스이자, 인류에 공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회장님은 두 차례 큰 실패를 했습니다. 기업가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실패를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아닐까요?저는 실패를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영원히 사장되지만, 실수는 경험이 되잖아요. 또 다른 기회가 왔을 때 실수를 거울 삼을 수 있다면 남들보다 빠르게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임직원에게 ‘실패라고 단정하지 마라. 실패는 접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에 머뭇거리고 피하게 됩니다.
회장님을 상징하는 게 ‘빨간색’입니다. 속옷도 빨간색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인데요.보여드릴 순 없지만 속옷도 빨간색입니다.(웃음) 일상에서는 빨간색 넥타이만 맵니다. 골프를 칠 때는 빨간색 옷을 고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 시장에 도전했는데, 중국 바이어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빨간색 의상을 입기 시작했어요. 중국에서 붉은색은 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머리도 중국 시장에 진출할 때부터 고수하고 있습니다. 빨간색은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도전하기 힘든 색입니다.(웃음)
메타바이오메드는 직원 복지가 좋은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임직원이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면 학비 50%를 지원하고, 구내식당을 운영해 조·중·석식을 전 직원에게 무상 제공하는 등 여러 복지 제도가 있습니다. 다양한 체육시설과 매월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아시겠지만 제 책상에는 전 직원의 생일을 기록한 노트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그 노트를 보고 생일을 맞은 임직원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냅니다. 어차피 회사의 주체는 사람이고 임직원입니다. 노조와의 문제를 미리 겪어보니 임직원에게 먼저 좋은 복지 혜택을 주는 게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요즘 집중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요즘은 일회용 초소형 내시경 카테터와 성형 시술이 가능한 성형사(성형실) 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내시경 카테터는 원래 2017년부터 중국에 수출하려고 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올해 인증을 받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반기에는 두 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하반기부터 실적을 내려고 합니다. 2018년 매출액이 약 800억원 정도 되는데, 2020년에는 1000억원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입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는 게 기업의 혁신입니다. 회장님은 한 우물을 파면서도 계속 혁신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웃음) 기업가가 혁신을 하려면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살이 돋습니다. 기업가가 어느 순간 안주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임직원 교육에 집중하는 것은 저를 포함해 임직원 모두가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죠. 저는 여전히 1년에 100일 이상 해외 출장을 갑니다. 바이오 분야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오랜만에 회장님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회장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업가는 죽을 만큼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무역협회에서 함께 부회장을 맡고 있죠. 인연이 꽤 깊은 셈입니다. 바이오 분야에서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료 기업인이 있다는 게 즐거운 일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 박혜린은…신용카드· 전자화폐시스템 업체 바이오스마트, 스마트전력계량플랫폼 기업 옴니시스템, 라미화장품 등 10개 회사의 매출 총합은 지난해 3000억원을 넘었다. 2018년 5월 출판사 시공사를 인수했다. ‘영업이익의 10%를 무조건 기술개발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정리=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