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정치는 매우 복잡해도, 밀라노는 잘하고 있다.” 최근 밀라노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극보수와 극좌파로 나뉜 두 개 정당이 함께 연방정부를 이끌고 있는 실정이라,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있다고는 하나, 밀라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새로운 유럽 아트와 디자인 혁신이 몰리는 ‘잇(it)’ 장소다. 그 중심에 포뮬러 원의 후원사이자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타이어사인 ‘피렐리’가 설립한 현대미술 전시공장 ‘Pirelli Hangar Bicocca’가 있다. 밀라노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아트와 디자인, 건축, 패션에 이르는 많은 신생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유를 ‘행거 비코카’를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안젤름 키퍼, 일곱 개의 천상의 궁전들 2004~2015. Photo : Agostino Osio. Courtesy Pirelli Hangar Bicoc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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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행거 비코카 미술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공장’이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피렐리 타이어 회사의 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인 동시에, 나아가 매우 특별한 개인 작가들의 솔로 전시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밀라노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미술이나 디자인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잘 모른다.본래 문화 중심지로의 변화에는 부동산 가격이 큰 역할을 한다. 낮은 임대료 덕분에 한때 예술가들의 집결지였지만 이제 상업 갤러리의 중심지가 된 뉴욕 첼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문화산업의 중심 지역이 되고 있는 런던 쇼디치, 서울 성수동이 그러하다. 밀라노도 마찬가지다. 비코카 지역은 밀라노의 산업을 이끈 거대한 세 기업 브레다(Breda), 마렐리(Marelli), 피넬리(Pirelli)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주한 곳이다. 특히 레코 지역 출신 가족의 대규모 타이어 회사인 피렐리는 전기 케이블과 타이어 무역산업의 선구자로 이탈리아를 최고의 산업 국가 중 하나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가장 이른 시기에 제일 중요한 산업단지가 됐다. 하지만 1970~80년대 비코카 지역은 산업 형태의 변화와 낮은 고용률로 인해 많은 사람이 떠나고, 낙후되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밀라노에서 비코카 지역은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으로 지난 20년을 보냈고, 피렐리사는 21세기를 기점으로 매우 대대적인 재생사업을 시작했다.
피렐리는 밀라노 노동계급 역사의 상징인 공간을 대학 캠퍼스, 오피스, 공공기관, 현대미술 센터 피렐리 행거 비코카 등으로 변형했다. 이렇게 낙후된 산업 공간이 예술 공간이 된 것은 비단 비코카만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생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것에 반하여, 비코카는 ‘기업의 주도’로 도시 재생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파우스토 멜로티, 시퀀스, 2019. Photo: © Jiyo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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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산업단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피렐리 행거 비코카 건물은 관람객에게 비코카 지역의 산업 역사와 진화를 보여준다. 특정된 구획 없는 공간은 본래의 건축적 특징을 드러낸다. 전시 공간은 쉐드(Shed), 쿠보(Cubo), 나바테(Navate) 구역으로 구성된 복합 장소다. 방문객이 로비를 지나 처음 마주하는 공간은 쉐드다. 면적은 1400㎡이며, 1920년 지어진 이곳은 기관차와 기차, 농장 기계를 설비하는 곳이었다. 그다음 공간인 쿠보는 나바테로 이어지는 공간이며, 면적은 약 550㎡다. 1950년에 지어진 이 공간은 냉난방을 하지 않으며 천장이 높고, 전기 터빈을 시험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가장 감동적이고 놀라운 공간은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나바테다. 예전엔 조립 라인과 기계 볼트를 시험하는 곳으로, 높이 30m, 면적 9500㎡(약 3000평)인 대형 공간이다. 천장 크레인의 프레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공간은 작가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하다. 웬만한 작가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압도적 공간감을 지녔다.
2004년 개관한 행거 비코카는 영향력 있는 대형 전시를 독특한 전시 프로젝트로 선보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2012년 이래, 토마스 사라세노, 라그나르 카르탄슨, 조앤 조나스, 필리프 파레노, 다미안 오르테가 등 국제적으로 최고로 인정받는 작가들의 대규모 개인전시를 소개했다. 이 기관의 아트 디렉터는 테이트 모던 큐레이터 출신인 비센테 토돌리이며, 큐레이터 3명이 이 대규모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특별히 여기서 소개하는 전시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이 매우 흥미롭다. 토돌리는 산업 환경이나 물질 등을 다루는 작가들을 선정해 바로 여기 이 ‘장소’만을 위한, 장소 특정형 전시를 만들게 한다.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새로운 프로듀스를 하는 전시공장인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전시 공간은 흔하지 않은 기회이기에 작가들에게도 매우 도전이 될 뿐만 아니라, 가장 잘나간다는 대형 작가들도 가장 기다리는 초대전으로 꼽히는 미술전시장이기도 하다.
▎브레다 전자기계학의 새로운 창고 건축, 1963~64, 브레다 역사 자료실. Courtesy Fondazione Isec. Rif: 09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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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행거 비코카는 매우 젊은 작가와 중견 작가의 전시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새로운 작가 발굴과 창작 지원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최근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아트센터의 사례라고나 할까. 비코카 지역은 밀라노에서 예술과 인문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피렐리사가 이러한 문화재생사업을 시작한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철학이 있다. 과학과 인문학을 연구하고 지역사회 간 소통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기업의 철학이 그것이다. 그 정신으로 피렐리사는 과거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중요한 매거진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78년까지 발간한 ‘매거진 피렐리’는 당시 움베르트 에코, 이탈로 칼비노, 귀도 카를로 아르간 등 세계적인 석학, 지식인들과 대화를 통해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학, 건축, 경제학, 도시계획과 문학 등 다양한 학제를 연구해왔다. 또 피렐리는 달력 하나를 만들 때도 리처드 애버던, 칼 라거펠트, 스티브 맥커리, 브루스 웨버와 같은 거장급 사진작가들과 협력했다. 이 철학을 이어받아 비영리로 운영되는 피렐리 행거 비코카는 피렐리사에서 기금을 지원받으며 입장료는 무료다.필자가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어렵게 여겨지는 대형설치 현대미술 작품을 보려고 방문하는 수많은 초등학생이었다. 이 미술관은 무료로 운영되는 덕분에 밀라노 주변의 모든 초등학교 학생의 방문이 상당하다고 한다. 미술 수업과 모든 예체능 수업이 거의 없어져가는 한국의 실정을 생각하면, 이제 사라져갈 산업적 재료로 작품을 하는 작가들의 생생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미술을 보는 아이들이 앞으로 영감을 받아 뿜어낼 아트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우리도 창조 국민을 위한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행거 비코카 외부 전경. Photo : Lorenzo Palmeri.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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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름 키퍼, 일곱 개 천상의 궁전들(2004~2015)
▎안젤름 키퍼, 일곱 개 천상의 궁전 2004~2015. Photo : © Jiyo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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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공장의 마지막 견학장에서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은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가 10년에 걸쳐 만든 영구 설치관이다. 2004년 피렐리 행거 비코카는 개관 축하 작업으로, 독일의 개념미술 작가이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가와도 같은 안젤름 키퍼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작품을 주문한 기업과 10년에 걸쳐 영구 설치를 위한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관계다. 과거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the Sistine Chapel)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30년에 걸쳐 만든 것을 생각하게 할 만큼, 현대판 최고의 커미션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컨테이너 박스 내부를 시멘트로 쌓아 올려 높이 14~18m, 무게 90톤인 ‘일곱 개 천상의 궁전(2004~2015)이라는 작품이다. 7개 조각과 5점 회화로 구성된 장소 특정형 인스톨레이션 작품으로, 우리로 하여금 미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운 테크놀로지 미술 시대에 이렇게 굵게 갈 수 있는 물질성을 가시화한 새로운 작업의 존재 등 여러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4~5세기경 출판된 히브리어 문학 작품 『세페르 헤칼롯(Sefer Hechalot) - 궁전의 책들』 본문에서 작품의 제목 ‘일곱 개 천상의 궁전’을 참조했다. 책은 신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인도의 상징적인 길을 묘사하고 있으며, 작가는 7개 구조물에 고유의 이름과 의미를 붙이고, 회화 5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같은 작가의 시적인 숙고를 강조하고 있다.
▎마리오 메르츠, ‘이글루’, 피렐리 행가 비코카의 전시 인스톨레이션, 밀라노, 2019. Photo : © Jiyo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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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남아 있는 문명의 폐허 같기도 하고, 그러한 페허가 만들어내는 경외감 같은 위엄성과 어떠한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듯한 심오함이 함께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 출신 작가인 키퍼에게 있는 전쟁에 관한 개인적인 여파(Aftermath)들이 이러한 작업을 가능케 했으며, 특히 무솔리니의 독재 시절을 겪은 이탈리아의 미술기관에서 유럽의 종교와 역사성을 반영한 작품을 영구 컬렉션으로 선택한 것은 놀랍지 않다.
▎필립 파레노, 대니 거리, 2015(디테일) 전시 전경 “필립 파레노 H {N)Y P N(Y} OSIS”, 파크 에비뉴 아모리, 뉴욕. Courtesy Pilar Corrias, Barbara Gladstone, Esther Schipper. Photo : ©Andrea Rossetti Rif: Danny The Street_ Armory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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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전후 세대 작가인 안젤름 키퍼와 마리오 메르츠의 작품은 거대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이탈리아 산업 공장을 대표하는 공간인 피렐리 행거 비코카 안에서 유럽의 문화·사회·정치적으로 문맥화되어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다. 이러한 기업의 노력 덕분에 한때 발달된 철도와 도로 산업으로 호황을 누렸고 여러 지점을 연결해주던 밀라노는 이제 현대미술과 창조산업으로 과거와 현재, 지역(Local)과 세계(International)를 연결한다. 중소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발달된 산업을 기반으로 밀라노는 패션위크, 디자인 페어 등 다양한 문화 행사로 전 세계 관람객의 이목을 끌고 있다. 피렐리 행거 비코카는 지역과 장소의 역사성을 강조하여 현대미술과 밀라노의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내고 있다.
- 이지윤 미술사가 ‘숨’프로젝트 대표
※ 이지윤은…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 박사/미술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 360도]를 기획했고,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