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아먼드 해머 

이민자 의사에서 LA를 대표하는 컬렉터로 

프랑스 컬렉터 중 양대 산맥은 루이비통 재단을 설립한 베르나 아르노 회장과 현재 파리 중심에 전 증권회사 건물 내부를 개조해 피노 재단을 설립 중인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다. 두 사람 모두 세계 10대 컬렉터이며 전 세계 컬렉터들의 롤 모델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재벌 컬렉터는 당연히 록펠러 가문이다. 그렇다면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컬렉터는 누구일까? LA를 대표하는 컬렉터로는 장 폴 게티와 아먼드 해머가 있다. 모두 성공한 기업인이며 그들이 평생 수집한 소장품들은 게티 박물관(Getty Center)과 해머박물관(Hammer Museum)에서 관람할 수 있다.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Installation at the Hammer Museum, Los Angeles; photo by Brian Forrest.
1990년에 설립된 해머박물관은 아먼드 해머의 소장품을 보존하기 위해 완성되었다. 설립 당시 그의 컬렉션은 4억 달러 가치를 지녔으며 해머는 동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자선사업가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이사회의 핵심 임원으로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자신의 많은 소장품을 여러 박물관에 대여해준 컬렉터였다. 1980년 들어 대여해준 작품들의 전시 방식에 불만을 품게 된 일이 생겼는데 이것이 해머가 자신의 소장품 전체를 일괄 전시하는 개인 박물관을 설립하려는 욕망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시장에서 박물관과 컬렉터의 관계는 역사를 넘어 어느 세기에서나 늘 긴밀했다. 박물관은 훌륭한 작품을 기증해주는 컬렉터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그들이 소장한 작품의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 자신의 소장품을 꾸준히 대여해주고 여러 해를 나누어 기증하고 있는 프랑스 컬렉터들에게 프랑스 박물관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준다. 이는 기증자가 큐레이터 자격을 갖게 되는 의미 있는 순간이다. 매일 그 작품을 집에서 감상하고 있던 컬렉터는 해박한 전문 큐레이터만큼이나 뛰어난 전시 기획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에서 주어지는 혜택이다.

아먼드 해머도 뛰어난 기획자의 소양을 지녔을 것이다. 결국 1988년 1월 해머는 웨스트우드에 그의 석유회사 본사 부근, 차고 부지에 박물관 건설을 발표했다. 지역 공동체에서 이 건축 프로젝트가 지역 개발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 회사 주주들이 연방 판사로부터 건설비 상한가를 받아냈던 사건이기도 했다. 주주들은 아먼드 해머 회장이 박물관 건설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지출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른 개인 컬렉터들이 설립한 박물관에 비해 럭셔리한 느낌은 없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더욱 안락한 느낌이 든다.

댈러스미술관과 워커아트센터를 건축한 에드워드 라라비 반스(Edward Larrabee Barnes)가 디자인한 건축물은 비교적 엄격해 보이는 외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작품들을 전시하는 갤러리 위주로 완성된 내부가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해 마치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궁전에 온 듯하다. 건축가 마이클 몰츤(Michael Maltzam)은 초기 건축 이념을 발전시켜 2006년 빌리와일더극장(Billy Wilder Theatre), 2012년 안뜰과 커피숍, 2015년에 존 터니(John V.Tunnery) 다리를 완성했다. 해머박물관의 이사회 회장인 존 터니를 기리는 이 다리는 상층 갤러리와 내부 안뜰을 연결해준다. 박물관은 해마다 건축적 발전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아먼드 해머는 1990년 12월에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박물관이 개관한 지 한 달 뒤였으니 그는 자신의 소장품을 한곳에 모으고자 했던 꿈을 이루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동시에 그는 해결해야 할 자금 조달과 법정 투쟁 문제들을 남겼다. 다행히도 1994년 캘리포니아대학의 의회에서 해머 재단 및 경영진과 함께 99년 동안 해머박물관을 운영할 것에 관한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박물관의 안정적인 관리를 도모했다. 그 덕분인지 박물관 입장료는 무료다. 흥미로운 사실은 게티센터와 더브로드 역시 무료라는 점이다. 이들 모두 박물관을 설립한 목적이 온전한 자선사업가의 관점으로 자신의 수집품을 일괄 전시하고 그것을 대중과 나누려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Gustave Moreau(French, 1826~1898), Salom Dancing before Herod, 1876, Oil on canvas, 56 1/2×41 1/16 in. (143.5×104.3㎝),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해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많은 분야에 야심에 넘쳤던 인물이다. 그의 전기를 집필했던 작가 에드워드 제이 엡스타인(Edward Jay Epstein)에 따르면 해머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989년 이스라엘에 1억 달러 상당의 기부 및 투자를 한 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려는 시도를 했다. 1989년 노벨상은 결국 달라이 라마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평생 이스라엘에 큰 공헌을 했다. 사망하던 해 역시 92세라는 고령에도 몇몇 이스라엘 조직을 위한 기금을 조성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이어갔다. 경제, 정치, 예술 분야에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열정이 넘쳤던 해머의 후손 중 아미 해머(Armie Hammer)가 눈길을 끈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던 미국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나왔던 아미 해머는 아먼드 해머의 증손주다.

해머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소장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마티스에게 루브르박물관에서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게 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던 스승, 구스타브 모로의 작품들이다.

요한이 죽음을 맞을 것을 예고하는 헤롯왕 앞에서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는 살로메가 그려진 작품이다. 아먼드 해머가 선택한 모로의 작품은 그야말로 모로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보석이다. 죽여서라도 끝내 요한을 소유하고자 했던 살로메의 유혹적인 춤은 인간이 지닌 악마의 얼굴을 보게 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모로의 또 다른 보석, [데이비드 왕](1878년)은 [헤롯 앞의 살로메 춤](1876년)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걸작이다. 해머가 소장한 [생 레미의 병원](1889년)도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예술 작품들은 박물관 창립자의 취향과 안목을 그대로 반영한다.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아먼드 해머의 뛰어난 감각에 감탄하게 된다. 소장품은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어서 방문객들은 규모는 작지만 독창적인 유럽과 미국의 그림, 조각 및 페이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모로의 작품뿐 아니라 티치아노, 렘브란트, 루벤스, 프라고나르, 고야, 세잔,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피사로, 반 고흐, 고갱, 마네, 모네 등 그의 소장품은 전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와 유럽 예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프랑스 예술사를 한눈에


▎Titian(Italian, ca. 1488~1576), Portrait of a Man in Armor, ca. 1530, Oil on canvas, 33 9/16×26 7/8 in. (85.2×68.3㎝),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그 외에 조지 벨로스, 메리 카사트, 토머스 에이킨스, 존 싱어 사전트, 길버트 스튜어트 등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미국 예술가들의 중요한 작품도 추가했다. 수년 동안 그는 다양한 비즈니스 벤처에 종사했지만 1965년부터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예술 작품을 사고파는 것으로 꾸준히 자신의 컬렉션을 개선했다. 그가 수집한 사실주의, 인상주의, 오리엔탈리즘, 바르비종파, 포스트 인상주의, 점묘파 및 상징주의 작품들은 프랑스 예술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탁월한 기업가의 통찰력은 평생 분별력을 지닌 예술품을 수집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아먼드 해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먼드 해머는 1898년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가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줄리우스 해머는 1875년에 러시아 제국의 오데사(우크라이나)에서 미국에 이민 와 브롱크스에 정착해 제약회사를 경영했다. 아먼드는 모리스고등학교를 나와 콜롬비아대학에서 1919년 학사를 취득한 후에 콜롬비아 의대에 입학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아버지는 연방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의 환자 중 한 명인 마리 오가네 소프는 구차르 외교관의 부인으로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였다. 그녀가 죽음을 맞으면서 줄리우스는 소송을 당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먼드는 형제들과 함께 파산을 맞은 가족 사업인 Allied Drug 회사의 운영을 맞아 1년 만에 회사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그의 인생에서 첫 성공은 당시 합법적으로 높은 수준의 알코올을 함유한 생강 추출물을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이었다. 당국의 주류 판매 금지를 우회하면서도 합법적으로 대량 판매를 할 수 있었다. 불리한 난관을 오히려 성공 기회로 만드는 그의 뛰어난 처세술이 드러난 미래의 정치적 수단을 예고한 첫 성공이기도 했다.

1921년 23세가 된 해머는 콜롬비아 의대를 졸업했을 때 소련을 강타한 장티푸스 환자들을 돕기 위해 모스크바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아버지와 우정을 지닌 러시아 지도자들과 접촉했고 자연스럽게 레닌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아버지 덕분에 곡물이 필요한 소련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고 현장에서 직접 살상을 목격한 후에 레닌에게 소련에 광대한 물물교환 제도를 제안했다. 당시 소련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유럽의 경제 봉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레닌은 그의 설득에 합의했고 1922년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미국의 밀을 러시아의 모피, 목재, 캐비어, 보석으로 교환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했다. 아먼드는 소련에 도착하는 각 선적에 러시아 제품의 재판매에 따른 이익을 추가해 수수료 10%로 협상해 큰 수익을 거두었다. 해머는 레닌과의 협상 중 석면 채굴권을 따냈고 레닌 해머에게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1920년대 말 모스크바에 소련 최초의 연필 공장을 세워 ‘붉은 자본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또한 소련에 입점한 자동차 회사 포드(Ford)를 포함해 30개에 달하는 미국 회사들의 대표가 될 정도로 소련에서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1929년까지 거래에 전념하여 꾸준히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레닌이 죽었을 때, 그는 스탈린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1929년 그의 짐작대로 스탈린이 권력을 잡으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사는 소련 정부에 양보해야 했다. 그러나 해머는 엄청난 보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현금이 부족했던 소련 정부는 로마노프 왕가가 소장했던 예술품과 보석으로 보상금을 대신해야 했다. 예술과 인연이 없었던 집안 출신이었던 해머가 처음으로 예술품과 접한 순간이었다.

1933년, 미국에서는 금주령이 해제되었다. 그는 이것이 그에게 또 다른 기회의 순간이란 것을 포착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소련에서 받은 보상금과 예술품, 보석들을 팔아 여러 양조장을 인수해 미국의 거대 기업 중 하나인 United Distillers 그룹에 합병하여 주류 부문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당시 40세도 안 된 해머는 이미 미국의 저명한 산업부문 기업가가 되어 있었다.

1956년 해머는 석유 부문에도 진출했다. 항상 그랬듯이 해머는 순전히 기회적으로 행동했다. 세금상의 이유로 금융 투자를 추구하던 그는 석유 및 가스회사에 주목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1920년에 설립된 이 석유 회사는 큰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다. 해머는 그다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10만 달러만 투입했으며, 그중 절반은 그의 세 번째 부인 몫이었다. 1년 후 그는 캘리포니아에 엄청난 자본을 재조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재빨리 성공할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감을 잡아 대부분의 주식을 구입해 회사의 지배권을 잡았다. 1957년 해머는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이 회사는 37개국에서 활동하는 인산염 광산 및 화학 거래 사업인 Henry J. Leir Interore SA를 인수했다. 1970년대 총소득은 20억 달러를 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 그룹을 이끌었고, 가장 정교한 전략적 선택과 협상으로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석유 회사로 성장시켰다.


▎Rembrandt van Rijn (Dutch, 1606~1669), Juno, ca. 1662~1665, Oil on canvas, 50×48 3/4 in. (127×123.8㎝),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정치적으로 해머는 공화당 지지자였다. 닉슨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5만4000달러를 기부했는데 기부금 중 일부가 불법적으로 조성됐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공화당이었던 조지 H. 부시 대통령 덕분에 사면을 받는다.

무역을 통해 레닌에서 고르바초프, 루스벨트에서 레이건까지 두 초강대국 지도자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해머는 FBI가 오랫동안 소련의 KGB 스파이 활동에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했지만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일생을 은밀히 관찰할수록 오히려 서구 개발 국가에 외면당하던 소련이 개발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위해서 양면으로 애썼다는 결과만 찾았다. 아먼드 해머를 움직였던 엔진은 힘과 존경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두 나라를 무역으로 연결해주면서 두 나라의 성장과 더불어 자신의 성장을 도모함으로써 일반적인 자본가와 완연히 다른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그는 자산 대부분을 미술관과 사회단체에 기부한 자선사업가이며 평화의 중재자로서 노벨평화상을 기대할 만한 삶을 살았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피의 흐름과 맥박의 강도, 신경세포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해야 하는 의학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러 각도로 세심히 바라보게 하는 힘을 준다. 그것이 예술과 일맥상통한다. 인류가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숙제이며 자연의 순리인 ‘죽음’과 매 순간 함께하는 그들이 바라보는 예술을 유대인 의사의 통찰력 있는 관점으로 해머박물관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다.


▎Henri de Toulouse-Lautrec(French, 1864~1901), Touc, Seated on a Table, ca. 1879~1881, Oil on panel, 9 1/4×5 9/16 in.(23.5×14.1㎝),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Camille Pissarro(French, 1831~1903), Boulevard Montmartre, Mardi Gras, 1897, Oil on canvas, 25 5/8×32 in.(65.1×81.3㎝),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Vincent van Gogh(Dutch, 1853~1890), Hospital at Saint-R my, 1889, Oil on canvas, 6 5/16×28 7/8 in. (92.2×73.4㎝),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John singer sargent(American, 1856~1925), Dr. Pozzi at Home, 1881, Oil on canvas, 79 3/8×40 1/4 in. (201.6×102.2㎝), The Armand Hammer Collection, Gift of the Armand Hammer Foundation, Hammer Museum, Los Angeles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1911호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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