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11)]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예술을 만나면 

옛 그림 속 벌과 나비가 홀연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인왕산 자락은 개나리꽃으로 노란 물이 들었다가 어느새 단풍으로 불그레해진다. 앳된 소녀가 들고 있는 항아리에선 우유가 졸졸졸 흘러나온다. 동서양의 옛 그림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움직임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부여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51)의 작품들이다. 그의 예술이 펼쳐지는 곳은 한지나 캔버스가 아니라 디스플레이 패널 위다.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그가 2020년 새해를 맞아 예술과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융합이라는 색다른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에서 4월 19일까지 열리는 ‘이이남, 빛의 조우’ 전에서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을 재해석한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2019) 앞에 서 있는 이이남 작가. / 사진:전민규 기자
지하철 9호선 마곡나루역에서 내려 서울식물원 내 마곡문화관을 찾아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겨울의 옅은 햇볕을 등에 지고 새로 깔린 시멘트 길을 터벅터벅 걸어 호수에 걸린 다리를 건너자 덩그러니 서 있는 2층 건물이 보였다. 1928년 준공된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을 리모델링한 이 건물의 문을 열고 암막 같은 검정 커튼을 들추니 왼쪽 벽면을 모두 채운 이이남 작가의 신작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온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을 재해석한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2019)이다.

어둠 속에서 이 작가가 걸어 나와 반갑게 맞는다. “겸재는 65세 때 이곳 양천에서 6년간 현령을 지내며 강서 지역의 풍경을 8폭짜리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것을 8개의 빔프로젝트로 구현했어요. 제가 그동안 겸재의 그림으로 작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서울식물원 측에서 개관에 맞춰 전시를 요청해 와 약 1년에 걸쳐 준비한 작품입니다. 공간하고 아주 잘 어울려 기분이 좋습니다.”

그 옆에 천장을 찌를 듯 세로로 서 있는 커다란 디스플레이 패널 4장에서는 ‘박연폭포’가 거센 물줄기를 벼락같이 떨구고 있다.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거린다. 맨 아랫단 패널 속 집과 사람의 크기가 폭포의 위용을 배가시킨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사계절의 풍광이 빛으로 재현된다. 개성에 있는 실제 모습도 이럴까. “삶의 흐름을 보여줬던 전통 동양화가 소장품이 되어 박물관에 갇혀버린 현실에서, 이이남의 장난기 많고 유머러스한 애니메이션들은 원작의 흐름과 움직임을 재창조한다”고 말한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뉴욕시립대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복층 전시장에 설치한 ‘겸재 정선, 고흐를 만나다’(2014)는 동양과 서양, 한국화와 유화, 역사와 가상이 겹겹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조선에서 발명된 전기를 겸재가 고흐에게 전해주고 자화상을 선물로 받아 돌아온다는 줄거리입니다. 겸재 그림 속 나그네를 겸재로 설정하고, 그가 고흐의 그림 속을 넘나들며 말을 걸지요.” 얼굴을 붕대로 동여맨 고흐가 눈을 껌뻑거리며 그림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총 5점이 나온 이번 전시는 ‘이이남, 빛의 조우’라는 제목으로 4월 19일까지 진행된다. 무료다. 전시장 가는 길은 9호선 양천향교역이 조금 더 가깝다. 온 김에 서울식물원 관람도 놓치지 말자. 신선한 산소를 듬뿍 들이마실 수 있는, 신세계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박연폭포’(2017) 앞에 선 이이남 작가. / 사진:전민규 기자
이 작가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웃었다. 노는 대신 일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이 당시엔 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풀벌레 한 마리에 담긴 자연의 감성을 몸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그 시절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서 풋풋한 시골 내음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연에 각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이날 작가는 자신이 감명을 받았다는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일부를 살짝 보여주었다. 복어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바닷속 모래 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다. 조금 뒤 카메라는 이를 부감해 보여주는데, 완성된 문양이 놀라울 정도로 기하학적이다. 물고기가 구애를 위해 만들어낸 ‘신세계’는 작가에게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지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화두가 됐다.

조선대 미대에 들어가 조소를 전공한 그에게 평범한 조각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엉뚱하게도 공중에 떠 있는 형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온갖 궁리를 하다가 친구의 어깨를 짚고 점프하는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렇게 2인상을 만들었는데, 교수님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죠.”

대학원 졸업 후 순천대 만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테크놀로지에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컴퓨터를 이용해 정지된 영상을 움직이게 하는 애니메이션 기법이었다. “우리가 만화영화라고 알고 있는 셀 애니메이션 기법은 손으로 한 장 한장 일일이 그려 만드는 것인데, 이와 달리 컴퓨터를 이용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죠. 물건을 정지시켰다가 찍은 화면을 이어 붙이면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걸 현대미술에 접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고전 그림 속 작은 생명체들이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선보인 것이 2001년이었습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흥미는 계속됐다. SK텔레콤이 주최한 모바일 공모전에도 후배들과 같이 참가해 사람과 물고기의 삶을 대비한 영상으로 대상도 받았다. 선배 대신 갑자기 참여하게 된 2007년 뉴욕아트페어에서 가져간 6점을 모두 팔아 치우면서 그의 이름은 백남준을 잇는 역할자로 급부상했다.

디지털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고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의 작품 세계는 미술계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는 가장 중요한 작가의 덕목으로 “생각을 많이 할 것”을 강조했다. 현대인은 너무 생각할 시간이 없이 바쁘게만 사는데, 특히 예술가들에겐 자신만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했다. “직진하는 개미와 지그재그로 가는 바퀴벌레와 점프하는 메뚜기가 있습니다. 개미에게 바퀴벌레는 가끔 마주치는 존재, 메뚜기는 한참 동안 안 보이는 존재겠지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뭔지 생각하고 작품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예술가입니다.”

가상현실 접목한 작품도 구글과 함께 선보여


▎이이남의‘인왕제색도’는 꽃이 피고, 단풍이 지고, 눈이 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 사진:이이남스튜디오
최근 여러 행사에서 이름을 보았습니다.

2019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회식 피날레 미디어 아트 감독을 맡았고, 유네스코 미디어 아트 창의도시 선정 5주년을 기념하는 개인전을 광주 은암미술관에서 얼마 전에 마쳤습니다. 2018년에는 광주비엔날레에 개막식 작가로 참여했죠. 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4·27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작품 설치와 관련해 역사적 현장을 함께하는 기회도 누렸습니다.


▎구글과 협업한 가상현실 작품 ‘혼혈하는 지구’(2016) / 사진:이이남스튜디오
백남준의 ‘다다익선’ 논란에서도 보듯, 테크놀로지가 계속 발전하면서 작품의 보완이나 수리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제 작품을 소장한 분들에게는 완벽하게 보수해드린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어서 고장 나지 않는 TV가 나오는 것도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 고객들에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고 말씀드려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죠.

그럼요. 가상현실도 그중 하나입니다.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가 공개한 가상현실 프로그램 ‘틸트 브러시(Tilt Brush)’를 이용해 만든 ‘혼혈하는 지구’(2016)가 대표적인 작품이죠. 홀로그램 같은, 허공에 영상을 떠 있게 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은데 아직 기술의 완성도가 높진 않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올해는 어떤 작품을 구상하나요.

미래의 미술은 어떤 것인지, 미래의 미술관은 어때야 하는지, 인간과 기계는 어떤 관계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모색해보고 싶어요. 사비나 미술관의 이명옥 관장님은 오래전부터 저를 지켜봐오셨는데, 지난해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지금이 변화를 추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뭔가 확 다른 것을 보여줄 때라고.

그래서 어떻게 확 달라질 건가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에 예술을 접목하고 싶어요. 살짝 귀띔하자면 줄기세포와 관련한 시각화 작업인데, 4월 말에 새로 작업실을 개관하는 전남 광주를 시작으로 5월 초 서울, 5월 말 베이징을 잇는 릴레이 전시를 준비 중입니다. 저와 팀원 8명이 하나 되어 움직이고 있으니 많이 성원해주세요.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001호 (2019.12.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