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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버터 아몬드’ 윤문현 길림양행 대표 

한 톨 나지 않는 아몬드로 1400억원 매출 

연간 아몬드 5000톤을 구워 여기에 허니버터맛, 와사비맛, 단팥맛, 김맛, 불닭맛을 입힌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신의 한 수’를 찾아 상품력을 높인 덕분에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이고 해외 바이어들이 제 발로 찾아온다. ‘아몬드 한 톨 나지 않는 나라’에서 내수와 16개국 수출로 지난해 매출 1400억원을 올린 길림양행 이야기다. 젊은 경영자는 최근 서울 명동에 플래그숍을 오픈하며 ‘브랜딩’에 집중하고 있다.

▎11월 말 서울 명동에 오픈 예정인 길림양행 플래그숍. 글로벌 견과류 종합식품기업을 향한 길림양행의 ‘브랜딩’ 첫발이다. 윤문현 대표는 “글로벌 어느 나라든 마켓에서 우리 제품을 만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길림양행’이라는 회사는 소비자는 물론이고 재계에서조차 생소하다. 몇 해 전 선보인 탐스팜(Tom’s Farm) 브랜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 만든 견과류 제품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국내에서 팔리는 빵, 과자, 아이스크림, 피자 등에 들어간 견과류 대부분은 길림양행에서 나온 것이다.

B2B에서 B2C로 전환한 길림양행의 주력 제품은 ‘허니버터 아몬드’로, 업계 최초로 맛과 향을 입힌 시즈닝 견과류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 제품이 유명해진 것은 외국인 관광객 덕분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마트, 편의점에 들러 허니버터 아몬드를 사는 게 필수 코스가 됐고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품목에 올랐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왕자 만수르가 간식으로 즐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지난해 내수와 수출을 포함한 매출은 1400억원. 아몬드 한 톨 나지 않는 나라에서 수입 원재료를 가공해 수출에 성공한 이는 윤문현(41) 대표다. 그는 부친의 회사를 물려받은 2세 경영인이지만 회사의 비즈니스를 완전히 탈바꿈했고, 100억원 빚더미 회사를 국내 최대 견과류 전문기업으로 키웠다. 주위에서 ‘윤 대표는 창업자와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10월 초에 서울 강남 도산공원 근처 길림양행 서울사무소에서 윤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인재 영입의 어려움 등 지방 중소기업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 전 서울사무소를 개소했다. 영업, 온라인, 디자인, 마케팅 부서 인원 25명이 근무한다”며 “길림양행의 견과류 브랜드 구축과 수출 확대를 위한 전초기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28살에 ‘빚더미’ 견과류 수입사 경영 맡아


길림양행의 모태는 길상사다. 1982년 창립한 길상사는 국내 최초로 아몬드를 수입해 도매 유통을 시작했다. 해운회사에 다니던 윤태원 회장이 지인 소개로 1988년 회사를 인수해 이름을 바꿨다. 윤 대표는 “아버지께서 회사를 인수하실 때만 해도 수입원은 캘리포니아 회사 한 곳, 국내 납품처도 롯데제과 등 몇 곳에 불과했다. 당시 아몬드를 컨테이너째 들여와 굽거나 혹은 그대로 납품처에 보내는, 직원 몇 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였다”고 말했다.

당시 아몬드 수입회사는 길림양행이 유일했다고 한다. 아몬드는 국내 견과류 생산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수입금지 품목이었는데, 밤 수출을 위해 쿼터 물량으로 소량 들여오게 되었고 이를 길림양행이 맡았다. 세계 최대 아몬드 공급사인 미국 블루다이아몬드 그로워스의 한국 독점대리인 자격도 누렸다. 큰돈을 버는 사업은 아니었지만 비즈니스 형태가 단순해 ‘편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수입 규제가 풀리면서 견과류 시장은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롯데제과·CJ·오리온·SPC 등 식품 대기업이 직접 나서 아몬드를 수입, 가공하면서 원재료 납품업체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국내 소비 트렌드도 재래시장에서 마트, 편의점으로 이동하면서 ‘단순하고 편했던’ 사업에 큰 변화가 생겼다. 윤 대표는 “공급처와 수입원, 유통망이 다양해지면서 잘못하다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십상이었다. 수입한 원재료를 직접 가공, 납품해서 전체 매출을 높이는 것만이 살길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윤태원 회장은 제조회사로의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단순 납품만 하던 회사가 제조설비를 갖추는 게 쉽지 않았다. 매출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설비 투자에 나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윤 회장은 공장 터 등을 담보로 융자를 받았다. 그러나 차별화된 제품 개발에 실패했고, 단순 로스팅으로는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윤 대표는 “결국 잔금을 주지 못해 공장을 다 짓지도 못했다. 어음이 남발됐고, 잘못하면 회사가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회상했다.

2006년 아들 윤문현 대표가 스물여덟 살 나이에 회사를 이어받았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합격해 입사일을 기다리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 회사 빚만 100억원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학 시절부터 아버지 곁에서 일을 돕기는 했지만 막상 경영을 맡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유능한 인력이 회사를 빠져나가고, 운영비가 아까워 화장실에서 온수조차 맘대로 틀지 못하던 시기였다. 윤 대표는 “남은 직원들에게서도 희망의 빛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단순가공 공장은 위기의 해법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PB(유통업체에서 직접 만든 자체 브랜드 상품) 시장이었다. 이마트 등 대형 유통사가 견과류 PB 상품을 개발하면서 중소기업에 제조의 기회가 늘었다. 윤 대표는 “로스팅 공장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이미 시장의 유통 시스템은 중소업체가 취사선택할 몫이 아니었다. 대세에 안착하는 것이 중요했다”며 “PB 제품 가공으로 공장 가동률이 높아지면서 매출이 조금씩 늘었고, 제조 경험도 쌓여갔다”고 말했다.

그는 ‘운’이라지만 ‘신의 한 수’가 있었다


PB 제품 특성상 소비자는 기존 상품보다 20% 정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납품업체의 마진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길림양행 역시 PB 제품 가공으로 매출은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견과류 단순가공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고, 가격 출혈도 심해 손꼽히는 견과류 업체들이 부도를 맞았다. 윤 대표는 다시금 비즈니스 형태를 바꿨다. 목표는 ‘가공 완제품을 위한 새로운 레시피 개발.’ 위기가 새로운 도전을 낳은 것이다.

윤 대표는 “2013~2014년 견과류 시장의 성장세가 꺾였지만 성숙된 시장에서 니치마켓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당시 견과류 소비 형태를 보면 국내에선 가공식품 비중이 5%에 불과했지만 미국은 40% 정도였다. 언젠가 우리도 미국 시장을 따라갈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5% 시장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는 대량수입유통 시장과 가공식품시장 중 후자를 선택하고 다시 투자를 시작했다. 시장조사 결과 독과점 상품이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1등 브랜드도 대단한 맛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윤 대표는 “아몬드 등 원재료에 다양한 맛을 시즈닝(양념)해서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아몬드 외에 다양한 견과류를 섞어서 원가를 낮추어야 한다는 두 가지 대전제를 세웠다”고 말했다. 우선 건강 콘셉트를 지키기 위해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름에 튀기면 산패가 빠른 반면 구우면 수분이 빠지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오래간다. 하지만 로스팅 후 당액으로 코팅해 시즈닝 가루를 입히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굽기 강도, 당액 농도, 냉각 시간, 시즈닝 과정 등에서 시행착오가 수없이 반복됐다.

윤 대표는 이 과정을 ‘자물쇠’에 비유했다. “비밀번호 세 자리 숫자의 자물쇠를 열려면 000부터 999까지 돌려야 하죠. 그러다 보면 그중에 하나는 열리잖아요. 우리가 ‘되는 점’을 찾는 과정도 이와 같았어요. 운도 따랐고요.” 그는 ‘운’이라고 말했지만 개발자와 둘이서 며칠 밤을 새우다 찾은 ‘신의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버터와 꿀을 이용한 레시피를 개발하고 겉면에 당액을 코팅해도 아몬드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쉬 눅눅해지지 않는 비법을 개발했다. 다양한 맛의 견과류를 선보일 수 있는 비결이다.

2014년 연말 기회가 찾아왔다. 해태제과 허니버터칩이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가 치솟을 때였다. 편의점 GS25가 “허니버터가 인기니 아몬드에 허니버터를 씌워보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납품 기일은 2주. 또다시 상품개발자와 밤을 새웠다. 이듬해 1월 편의점에는 35g, 마트엔 210g 용량의 허니버터 아몬드를 내놨다. 출시 첫 달 2억원어치가 팔리더니 두 달째는 10억원, 석 달째는 20억원으로 매출이 급성장했다.

주문량을 맞추느라 허덕였지만 매출이 늘자 직원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 대표는 불안했다. ‘이런 인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사실 허니버터칩 인기에 올라탄 것뿐이지 않나.’ 그는 제품군을 넓히기 시작했다. 와사비맛, 카라멜맛 등을 개발했는데 와사비맛이 대박을 터트렸다. 이후 변화하는 트렌드와 고객 니즈를 반영해 별빛팡팡·티라미수·쿠키앤크림·단팥·딸기·망고바나나·복숭아·요구르트·불닭·김 맛 등 다양한 맛을 개발했다. 윤 대표는 “현재 민트초코맛을 개발 중이다. 앞으로 아몬드에 100가지 맛을 입힐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 공략 위해 ‘브랜딩’ 박차

2014년 650억원이던 길림양행 매출은 2018년 1400억원으로 증가했다. 올해 영업이익은 1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매출 비중을 보면 내수에서 수출로, 도매에서 소매로 이동 중이다. 수출을 시작한 2015년 수출액은 90억원 정도였는데 지난해 150억원을 넘어섰다. 현재 수출국은 중국·홍콩·일본·싱가포르·태국·아랍에미리트 등 16개국이다. 특히 중국인들에게 허니버터 아몬드는 불닭볶음면과 함께 한국적인 독특한 맛으로 큰 인기다. 지난 11월 11일 중국 광군제에서도 하루 만에 티몰 플래그십스토어 단독 매출이 약 360만 위안(한화 6억원)을 달성하며 뜨거운 인기를 입증했다.

윤 대표는 “올해 수출 비중이 크게 늘었다. 연말까지 500억원을 예상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경기도 광주 본사 공장이 생산 한계에 이른 것. 이 때문에 길림양행은 2020년 원주혁신도시 내 새 공장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향후 20년 사용을 계획하고 부지를 매입했다. 그는 “1982년에 설립한 회사지만 사실 우리는 신생회사에 가깝다. 현재 모습은 2014년 이후에 형성된 것”이라며 “그 전에는 단순 무역회사였고, 지금은 견과류를 제조 가공 유통하는 식품회사다. 견과류를 취급했을 뿐 완전히 다른 회사”라고 강조했다.

길림양행의 비전은 글로벌 견과류 종합식품기업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독일에 기반을 둔 세계 최대 젤리 회사 하리보(Haribo)다. 아기곰 모양 등 다양한 형상의 젤리와 사탕, 감초과자 등을 생산한다. 윤 대표는 “하리보는 전 세계 16개 공장을 가동하며 연 매출 2조원을 달성하고 있다. 우리도 원주공장 안착 후 해외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 특히 아몬드 생산지면서 소비가 가장 많은 미국이 타깃이다. 아몬드 최대 생산지인 미국에 농장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경쟁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미국에 농장을 확보하고, 현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 미국과 유럽의 핵심 유통 채널에 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윤 대표는 ‘브랜딩’에 집중하고 있다. 초콜릿 하면 ‘페레로로쉐’, 젤리 하면 ‘하리보’가 떠오르는 것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아몬드 과자 하면 누구나 ‘허니버터 아몬드’를 떠올리게 하겠다는 목표다. 중·고교 동창인 백순흠 기획개발팀장이 속도를 내고 있다. 백 팀장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제냐의 미국 시장 상품기획자(MD), 다양한 레스토랑 개발자 등으로 일했다. 2016년 길림양행에 합류한 그는 상품 개발과 패키지 디자인에 주력해왔다.

11월 말 오픈 예정인 서울 명동역 ‘길림양행 플래그십 스토어 HBAF’는 브랜딩 전략의 첫걸음이다. 이곳에선 견과류 제품은 물론이고 볼펜, 티셔츠, 모자, 잠옷 등 아몬드 캐릭터 굿즈도 판매한다. 명동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쉴 수 있는 카페도 준비했다. 윤 대표는 “매장 열어서 얼마 벌겠다는 것은 계산에 두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1시간 정도 쉬며 즐기는 동안 우리 브랜드를 노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912호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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