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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식 선보공업 회장 

한계를 허무는 무한 혁신 

장진원 기자
세상에 없던 신기술은 때로 산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지난 1993년, 선보공업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선박 모듈 유니트가 그렇다. 연료공급 시스템, 탱크톱 전체, 연료 정화 시스템 등 특정 부분을 모듈화한 창조적 아이디어는 한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몇 단계 끌어올린 숨은 원동력이다. 창업 CEO인 최금식 회장은 이제 그린에너지 토털 솔루션 기업으로의 변신에 나섰다. 선박 모듈 유니트로 쌓은 독보적 기술력을 새로운 미래성장동력으로 확장하겠다는 비전이다.

한국의 조선산업은 불가능에 도전해 눈부신 성공을 이룩해낸 영웅 서사에 가깝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공장 부지 사진과 500원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영국의 조선·금융업계 관계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전설로 회자된다.

현대중공업은 1971년 영국·서독·프랑스·스페인에서 5000만 달러 외자를 차관 형식으로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인 1972년 3월, 봄기운이 완연한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배다운 배 한 척 만들어본 적 없는 나라였지만, 초대형 조선소와 유조선 2척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이 이어졌다. 불과 2년 뒤인 1974년 6월, 공장 준공식과 건조를 마친 유조선 2대의 명명식이 동시에 거행됐고, 모든 장면이 흑백 브라운관을 타고 생중계됐다. 불도저 같은 의지와 신념으로 뭉친 기업가, 기적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싸워낸 임직원들의 영웅담이다.

울산조선소를 기점으로 한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은 그야말로 퀀텀점프를 이뤄냈다. 1974년 삼성중공업, 1976년에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잇따라 설립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한국 조선업은 2000년대 들어 일본과 유럽 등을 제치고 세계 최고로 부상했다. 2010년대 이후 경제위기, 유가 하락, 중국과의 경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LNG선 등 친환경 고부가가치 기술을 기반으로 다시금 ‘조선업 세계 1등’이라는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조선산업 발전 공로로 ‘금탑산업훈장’ 수훈

지난 5월 23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선 ‘2024 대한민국 중소기업인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최금식 선보공업 회장의 금탑산업훈장 수훈이었다. “세계 최초로 선박 제조에 모듈 유니트(module unit) 개념을 도입해 조선업계의 혁신적인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특히 ‘LNG 가스연료 공급시스템’ 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소개도 이어졌다.

현대, 삼성, 한화 같은 대기업이 써 내려간 한국 조선업의 신화 뒤편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협력사의 피땀이 서려 있다. 최금식이라는 석 자, 선보공업이라는 기업명은 조선업 종사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조선업계의 혁신적인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는 상찬을 원청 대기업이 아닌 협력사가 받았다는 것만으로, 한국 조선업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업 세계 1등 신화에 최 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음을 뜻한다.

195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최 회장은 부산기계공고 배관과에 진학했다. 평생을 다져온 엔지니어로서의 삶이 시작된 셈이다. 1973년 군 입대 후엔 공병으로 복무했다. ‘공사계’로 일한 3년간 건축 계획, 시공, 자재·인력 관리까지 건축에 관한 모든 과정을 섭렵했다. 최 회장은 “체계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군에서 체득했다”며 “이후 조선업에 뛰어들었을 때도 당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전역 직전인 1976년 7월, 최 회장은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 울산 현대중공업 입사였다. 국내 조선산업이 막 기지개를 펴던 때였다. 최 회장은 50여 년 전 기억을 선명히 끄집어냈다.

“취업은 수월했어요. 부산기계공고의 인지도가 높았고, 회사에 학교 선배도 많았으니까요. 경력기능 7급으로 입사해 사무실에서 기능관리직으로 일했습니다. 배를 만드는 회사는 당연히 처음이었죠. 작업에 참여한 첫 배는 당시 범양상선이 발주한 2만3000톤 벌크 캐리어였습니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스스로를 혹독히 몰아부치는 성향이 20대 초반 청년 시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배관과 용접 기술이 전부였던 신입사원은 독도(讀圖), 즉 도면을 볼 줄 알아야 전체 건조 작업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밤잠을 줄여가면서 도면과 씨름했습니다. 무조건 도면을 읽어내겠다고 결심했어요. 밤낮없이 후배를 찾아가 도면 읽는 법을 배웠고, 도면을 보면서 잠을 설쳤어요.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 후엔 캐비닛 속도면을 모두 꺼내 분류했죠. 현장 전달용, 내가 봐야 할 도면을 구분했어요. 배는 층층이 쌓아 올리는 아파트 구조와 같습니다. 군대 공사계 경험이 큰 도움이 됐죠. 도면 정리를 마친 그날부터 작업 현장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종일 살았습니다.”

기능관리직이니 사무실에서 일해도 됐지만, 최 회장은 늘 현장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매일 작업자 도면과 자신이 정리한 도면을 일일이 대조했다. 작업과 도면을 동시에 익히기 위함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간 잔업 시간까지 하루 종일 도면 분석에 매달렸다. 도면에 익숙해지니 자신감도 붙었다. 작업 일정이 빠듯할 때면 현장 엔지니어와 함께 연삭기로 자재를 깎았다. 사무실의 서류 작업 대신 현장에서 몸으로 기술을 익히니 조선용 배관 전문가로 사내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배관 기술에 쏟아부은 열정은 초고속 승진으로 이어졌다. 입사 8개월 만에 6급 조원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5급 조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중공업 설립 후 전례 없는 2계급 특진이었다.

“울산조선소 시절 내내 일이 즐거웠습니다. 도면에 매달린 것도 무얼 바라거나 누군가 봐주기를 기대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일이 좋았죠.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해 뛰는 그때의 경험이 이후 사업 때도 기반이 된 것 같습니다.”

여과기·소음기 국산화로 기술혁신 시작


최 회장은 1980년 이직을 결심했다. 국가 기간산업이라 어디든 기술이 필요하면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거제로 향했다. 대우중공업 거제조선소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쌓은 배관 기술력을 인정받아 4급 30호봉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대졸 초임 급여와 같았다. 이직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2년에는 기술실 대리로 진급했다. 대졸 사원 기준으로 1년 반 만에 대리 승진이었으니, 회사에서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과장 업무까지 병행하게 되면서는 500명 넘는 작업자와 외주 협력사까지 관리했다. 사내에선 그것만으로도 ‘고졸 신화’ 소리를 들었다.

위기는 항상 잘나갈 때 찾아오게 마련이다. 능력 있는 사원으로 칭찬이 자자했던 최 대리도, 한국 조선산업도 그랬다. 1976년 이후 연평균 30% 넘게 고속 성장하던 국내 조선업은 1985년 들어 세계적인 과잉 발주 부작용으로 몇 년간 부진의 늪에 빠졌다. 1987년 들어 경기가 회복되면서 선박 발주 요청이 쇄도했지만, 그사이 대우중공업은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대대적인 인원 감축에 나섰다.

“으레 그렇듯 협력사부터 감축하지 않았겠어요. 협력사를 관리하던 제 자리도 날아갔죠. 그때 나이가 서른 셋이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구조조정인데, 역시 위기가 곧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해고되지 않았으면 창업은 꿈도 꾸지 않았을 테니까요.”

회사를 그만뒀지만 외려 마음은 편했다. 쉼 없이 달린 10년 직장 생활 끝에 휴식도 맛봤다. 그사이에도 사방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쇄도했다. 현대중공업 옛 동료들의 연락도 받았다. 하지만 회사를 나오니 비로소 ‘내 기술, 내 의지로 만든 내 물건’이라는 생각이 깊어져만 갔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빨리 시작해 성공하고 싶었죠.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장남이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가 찾아오셨어요. 신문지에 돈 200만원을 곱게 싸오셔서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 하시더군요. 가족들을 위해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의지는 불타올랐지만 현실은 차가운 얼음 같았다. 생산밖에 몰랐으니 대우 출신의 설계 전문가와 동업에 나섰다. 두 사람이 300만원씩 투자해 자본금 600만원으로 창업에 나섰다. 남의 사무실 귀퉁이에서 책상 2대와 전화기 2대로 시작한 곁방살이였다.

1986년 ‘남영공업’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다. 돈 없이 시작했으니 때마다 남의 사무실을 전전해야 했다. 창업 아이템은 여과기와 소음기로 정했다. 여과기는 해수에 함유된 각종 이물질을 걸러주는 장치, 소음기는 선박 엔진 소음을 줄이는 장치였다. 두 부품 모두 수입품에 의존하던 때다. 최 회장은 시작부터 장비 국산화에 명운을 걸기로 결심했다.

자본이라곤 없었으니 공장 마련도 애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을 빌려준 밸브회사 대표가 동업을 제안했고 부지 계약까지 마쳤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꿔 눈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도 맞았다. 다행히 사정을 들은 대우중공업 재직 당시 상사가 500만원을 선뜻 내줘 공장 설립에 나섰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으니 친지들도 돈 빌려주기를 꺼렸어요. 냉가슴만 앓다 무작정 찾아간 옛 상사가 큰 돈을 선뜻 내주니 그 고마움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나중에 선보로 모셔 오랫동안 회사와 동고동락한 후 정년퇴임하셨죠.”

가진 것 없는 30대 청년 창업가의 길은 이후로도 가시밭이었다. 크레인 설비가 없으니 매번 체인블록(사람의 힘으로 짐을 감아 올리는 도르래)으로 수작업을 해야 했다. 천장이 낮아 땅바닥을 파야 작업이 가능한 경우도 숱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불량률이 높아지자 직원들과 마찰을 빚는 일도 늘었다. 급기야 업무 중단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를 돌이키던 최 회장은 “결과적으로 당시 경험이 선보 발전의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사내 구성원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익힌 경험이 됐기 때문이다. 현재 선보 계열사는 국내 어떤 대기업 못지않은 직원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다.

공장 설립, 제품 개발, 대우중공업 납품까지 결정됐지만 어려움은 여전했다. 당장 자재를 구입할 현금이 없어 발주서를 들고 협력업체를 찾아다녀야 했다. 이를 악물었던 청년 창업가에게 기회의 손을 내민 건 이번에도 전 직장이었다. 대우중공업 사내 협력사로 들어오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당시 대우에 의장품을 납품하던 하청업체가 사외에 있었는데, 물건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아예 사내 협력사로 등록해서 운영하자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신생기업인 남영공업엔 천금 같은 기회였죠. 협력사 등록을 위한 공탁금 마련도 애를 먹었는데, 딱한 처지를 알게 된 대우중공업 임원 두 분이 각자 퇴직금을 담보로 내놓아 문제를 해결해주셨어요. 옛 동료들의 도움과 신뢰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여과기·소음기가 제때 공급되자 사업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수입에 의존하던 부품을 국산화해 기술력을 인정받았지만, 풀리지 않은 갈증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사업 확대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조선소의 여과기·소음기 전량을 독점한다고 해도 100억원이 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실제 매출은 50억원 수준이었죠. 부품 국산화에 성공했듯이, 남보다 한 발 앞서 미래성장동력을 찾아야 했어요. 그렇게 착안한 게 바로 유니트였습니다.”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선박 모듈 유니트

당시 조선 기자재 부문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선박의 기본 골격이 갖춰지면, 배위에 올라 일일이 파이프 하나하나를 손으로 연결하고 조였다. 협소한 엔진룸에서 각종 장비와 복잡한 배관 라인이 뒤엉키니 작업에 속도가 날 리 만무했다. ‘더 쉽고 빠르게 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심하던 차, 최 회장의 머릿속에 번갯불처럼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바로 유니트였다.

그 무렵 현대중공업도 자체 유니트 개발에 착수했다. ‘기술개발을 함께하자’는 최 회장의 제안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현대중공업 기술팀과 남영공업 개발팀이 힘을 합쳤다. 유니트 개발은 일개 부품 개발이나 배관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러 조선 기술이 집약된 고도의 엔지니어링 과정이었다. 주변에서도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말렸다.

“현대중공업에서 도면에 빠졌던 순간처럼, 창업 후 제품 개발과 납품에 매달렸던 것처럼 다시 한번 몰입했어요. 조선 전반을 다시 공부했고 밥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유니트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1993년 드디어 연료오일 공급 유니트(Fuel Oil Supply Unit) 개발에 성공했어요. 메인 엔진에 들어가는 연료 공급 시스템이었습니다.”

개별 부품이나 시스템이 아닌, 모듈 유니트 전체 개발은 세계 조선사에 유례가 없는 시도였다. 조선 기자재 국산화와 제작 공기 단축, 성능 향상에 목말라하던 국내 조선업계에도 빅뉴스이자 희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바다의 보석’ 선보공업으로 새 출발


한번 탄력을 받은 개발은 관성에 가속까지 더했다. 메인 엔진용 유니트에 이어 제너레이터 엔진용 유니트 개발에도 성공했다. 조선업계에 처음으로 아웃소싱 시스템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조선사는 남영공업이 개발·제조한 유니트를 선체에 탑재해 용접만 하면 됐다. 독(dock)에서 한 달 이상 걸리던 공정이 7일 이하로 단축됐다. 원가 절감, 공정 단축, 오작동 방지와 작업 효율 향상이 한꺼번에 이뤄졌다. 조선 공정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에 업계에선 “역시 최금식이니까 해냈다”는 말이 퍼졌다.

연료 공급 유니트 개발에 성공한 지 2년 후인 1995년, 남영공업은 조선 빅 3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의 1차 협력사로 등록했다. 이후 선박 엔진용 연료 오일 정화 시스템(Fuel Oil Purifier System) 개발에도 성공했다. 1996년 들어선 사명을 지금의 선보(船寶)공업으로 변경했다.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 중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겠다는 다짐과 포부를 담았다.

이듬해인 1997년, 사무실과 공장을 현재 위치인 부산 사하구 다대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제대로 갖춰진 생산 시설과 연구소에선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생산과 연구개발(R&D)이 이뤄졌다. 대기업에서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고졸 사원이 선박용 여과기와 소음기로 독립한 후, 세계 최초의 선박 모듈 유니트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정확히 20년이 걸렸다.

최 회장은 2010년 들어 세계 최초로 LNG 연료 공급 시스템(LNG FGSS) 개발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5년에 걸쳐 100억원을 쏟아부었건만, 국내 조선소 어느 곳 하나 채택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 자체 개발한 시스템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중소기업이 고난도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선 R&D 인재 확보, 투자 등 부딪치는 어려움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수년간 100억원을 투자해 만든 기술을 사장할 순 없었어요. 새로운 판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중국, 일본 조선소로 눈을 돌렸죠.”

친환경 이슈가 부각되면서 기술력을 갖춘 국내 조선사들은 이미 자체적인 LNG 연료 공급 시스템 개발을 완료한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 조선사들은 LNG 선박 건조를 막 시작하던 시기였고, LNG 연료공급 시스템도 개발하지 못한 처지였다. 선보공업은 지금까지 총 14척분의 LNG 연료 공급 시스템을 중국과 일본 조선사에 성공적으로 공급했고, 현재 20여 척분의 수주 잔량을 확보한 상태다. LNG 연료 공급 시스템 수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보 전체 매출 중 직접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0%까지 커졌다.

“부산의 작은 기업이 LNG 연료 공급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하니, 세계적인 조선소와 선주들이 믿질 않더군요. 설사 입찰에 참여하더라도 선보의 고객인 국내 대기업과 경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경쟁사의 견제, 해외 선주와 조선소에 우리 제품의 성능을 믿게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고객이 영업을 창출하는 회사

닥쳐온 위기 앞에 좌절하고 쓰러지느냐, 오히려 기회로 삼아 넘어서 성장하느냐. 모든 기업가가 꼽는 기업 성패의 과정이다. 최 회장도 그랬다. “직장 생활 시절부터 창업 후 이른 모든 과정이 뼈를 깎는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남들과는 다른 길, 누구도 밟지 않은 길을 걷겠다는 다짐과 이를 실행한 의지가 오늘의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선보가 이제까지 개발해 선보인 제품들이 모두 그랬다. 본격적인 성장 동력이 된 모듈 유니트는 전 세계 조선업계를 놀라게 한 첫 시도였다. 지금까지 선보가 선보인 신제품 중 다른 회사가 선점한 제품이나 모방품은 거의 없다. 창업 초기부터 오롯이 퍼스트 무버의 길을 택한 최 회장의 판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최 회장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를 끊임없이 찾고 개척해나간 것이 선보의 DNA”라고 강조했다. 그의 개척 정신은 최근 또 다른 신사업 발굴로 이어지고 있다. 탄소중립, 친환경 에너지 시대를 대비한 그린에너지 솔루션 사업이다. 이는 글로벌 조선산업의 부침과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2012년 이전 조선산업은 약 10년간 최고 호황기를 맞았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해양오염 방지를 위한 이중선체(선박의 외판을 두 층의 강판으로 만드는 방식. 유조선 등의 외판에 구멍이 생겨도 기름 유출을 막을 수 있는 구조) 변경도 발주 물량을 늘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2012년 이후 빠진 장기 불황은 이후 약 10년간 조선산업을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국내 조선사들도 해양플랜트 등에 집중하며 생존을 모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전 세계 산업계에 불어닥친 친환경·탄소중립 바람은 조선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디젤엔진, 즉 중유를 원료로 운항하는 컨테이너선 한 척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는 덤프트럭 5000만 대 수준이다. 이 정도로 많은 오염물질을 뿜어내면서 움직이는 운송수단이 지상에는 없다. 심각한 환경오염 주범으로 떠오른 선박에 대해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2008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로(0)로 만들라는 기준을 정했다. 현재 해상에 떠다니는 선박의 80%가 IMO 규제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사와 선주 입장에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다. 폐선하거나 LNG선으로 개조하거나, 그도 아니면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다시 포집하는 방법이다. 선보가 주목하는 것은 마지막, 즉 탄소포집이다. 이와 관련한 핵심 기술을 지닌 스타트업인 카본밸류, 또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과 협업해 탄소포집 설비를 개발 중인데 올 연말이면 시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친환경 에너지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수소 생산 시스템도 힘을 쏟는 신사업이다. 물을 전기분해하는 원천기술에 연료 공급 시스템을 개발한 선보의 기초 설계기술을 결합한 수전해 사업이다. 현재 선보가 개발한 수전해 시스템은 국내 시장점유율 1위로, 제주 해상풍력단지 등에 납품해 성능을 인정받았다.

선보의 신사업은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의 모범 사례로 더 주목받는다. 기업이 필요한 기술을 스타트업 등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편, 기업 내부 자원을 밖으로 공유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창출하는 경영전략을 말한다. 현재 수전해와 탄소포집 사업은 각각 핵심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인 엘켐텍, 카본밸류와 협업·투자로 이뤄지고 있다.

이 같은 혁신을 주도하는 건 2세인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라이트하우스인베스트먼트 대표다. 부울경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한 펀드 조성과 제조 기반 스타트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한 신사업 개척 등이 최 대표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2016년 무렵 ‘스타트업과 함께 오픈이노베이션을 추진하고 싶다’는 아들의 바람을 들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했어요. 노동집약적 산업의 한계에 부딪친 부산을 기술집약 산업의 메카로 키울 수 있다는 비전이 섰습니다. 지역 중견기업 펀드 조성, 200여 개가 넘는 투자 실적, 무엇보다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한 선보의 신사업이 최 대표 주도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랑스럽죠.”

최 회장은 주요 계열사인 선보유니텍의 신사업 비중을 단기간 내에 50%까지 끌어올리고 5년 안에 수소, 신재생에너지, 폐기물 에너지화 등 그린에너지 토털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세웠다. 현재 선보공업, 선보유니텍, 선보하이텍, 선보피스 등으로 나뉜 계열사도 통합해 2026년 상장(IPO)에도 나설 계획이다.

변치 않는 경영 원칙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최 회장은 “고객이 영업을 창출하는 회사”라는 선문답 같은 답을 내놨다.

“품질 우수하고 납기 잘 맞추고 기술도 최고인 회사를 어떤 고객이 외면하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다 갖추면 우리가 영업하지 않더라도, 고객이 먼저 우리 제품의 우수성을 주변에 알린다는 뜻입니다. 작은 상품 하나를 살 때도 고객 리뷰를 보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은 이치죠. 고객을 만족시키는 건 바로 기술입니다. 선보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박스기사] 나눔과 배려에 진심인 사회적 기업가


▎지난 2016년 부자(夫子)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최금식 회장과 최영찬 대표. 신정택 당시 부산사랑의열매 회장(현 세운철강 회장, 가운데)과 포즈를 취했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을 말한다.
최금식 회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사회적 기업가로 꼽힌다. 현재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 부산·경남 회장이기도 한 최 회장은 “지금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라며 “그럴 때 나눠야지, 그 순간을 미루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눔의 마음은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최 회장은 지난 2012년 ‘선보등대재단’을 세웠다. 많은 아프리카 나라가 내전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고 시작한 사업이다. 우간다를 시작으로 매년 한 개 이상의 학교를 짓기 시작했고, 2015년 네팔 대지진 때는 5개 학교를 건립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14개 학교를 새로 세웠고, 올해도 스리랑카와 인근 나라에 공업고등학교 등을 건립할 예정이다.

‘선재장학회’도 대표적인 사회공헌 사업이다. 지역의 초중학생들을 선정해 매년 부산과 서울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지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선 우수 인재를 발굴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최 회장은 선보의 주요 계열사를 아우르며 ‘선보 패밀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의 명함에도 회사 소개자료에도 선보 패밀리라는 단어가 선명하다. 모든 임직원이 ‘한 식구’라는 게 그의 경영 지론 가운데 하나다. 임직원 복지 향상을 위한 ‘선보근로복지재단’은 일·가정 양립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책과 복지규정을 명문화해 시행하고 있다.

지역산업 발전을 위한 노력도 눈에 띈다. 최 회장은 현재 부산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이다. 360개 회원사를 대표해 조선업계의 상생 발전과 경쟁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스마트 물류 플랫폼 기반 복합물류지원센터 건립, E7외국인근로자 도입, 조선소와 관학연 공동 대응 등을 추진 중이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07호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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